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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아픔, 오롯이 예술이 되고 역사가 됐다

청년문화 - 독일 베를린

  • 박창희 기자 chpark@kookje.co.kr
  •  |   입력 : 2011-08-31 19:26:20
  •  |   본지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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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예술가들의 해방구로 불리는 베를린 시내 타클레스 내부. 5층 짜리 건물 전체가 그래피티로 도배돼있다시피 하다. 작가들은 이곳에서 작품을 팔기도 한다. 베를린=박창희 기자
- 냉전과 대립·파괴와 갈등, 예술로 절묘하게 융합
- 도심이 예술 그 자체…무상으로 공간 빌려주고 아티스트들에겐 보험 혜택
- 세계 곳곳서 몰려든 작가들, 실험적인 작품 마음껏 쏟아내

독일 베를린은 겉으로 평온한 듯 하면서도 안으로는 자유와 다양성의 가치가 용광로처럼 들끓고 있는 도시다. 냉전과 대립, 파괴와 갈등의 역사를 경험한 도시답게 도시 자체가 한편의 웅장한 대서사시 같다. 오늘, 지금, 베를린을 얘기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청년예술이다. "청년들이여 표현하라"는 구호가 일상으로 따뜻하게 내려앉은 듯하다. 최근 창조도시 취재 차 방문한 베를린의 청년예술 생태계를 들여다봤다.

■분단의 도시에서 예술의 메카로

베를린(인구 350만 명)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독특한 도시 생태계를 지니고 있다. 독일 수도지만 독일 속의 '섬' 같고, 엄연히 유럽이지만 유럽이 아닌 것 같다.

베를린 예술의 바탕에는 '분단'이라는 문화코드가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열강들의 힘겨루기 와중에 베를린은 장벽에 가로막혀 동서로 갈라졌다. 한반도의 분단과 비슷한 운명이다. 지혜로운 독일인들은 장벽을 스스로 걷어내 1990년 마침내 통일을 이뤄냈다.

장벽이 무너지자 동서독 예술의 절묘한 융복합 현상이 나타났고, 정부가 거기에 적절하게 물을 주었다. 베를린 시의 예술인 지원정책은 생색내기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방치된 낡은 건물들을 아티스트들에게 무상으로 내주고, 작가로 등록하면 보험 혜택을 준다. 인적·물적 지원과 함께 저렴한 도시 물가는 다른 나라의 예술인들까지 불러모으는 호재로 작용했다.

베를린 시에는 약 600개의 갤러리가 있으며, 미술가 5000명, 작가 1200명, 대중음악 밴드 1500개, 300개의 극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을 위해 베를린 시는 연간 2000만 유로(약 300억 원)의 기금을 만들어 27개 예술지원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이와 별개로 수많은 기업과 기관들도 예술가를 후원하고 있다.

■미테 지구와 일상에 스민 문화

미술과 관련, 베를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미테 지구(Mitte District)다. 갤러리와 카페, 레스토랑, 클럽이 밀집해 있어 수집상들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어느 갤러리라도 자유롭게 들어가 작품을 감상하거나 작가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미테 지구를 걷다 보면 소규모 갤러리에서 작가와 관광객이 격의없이 대화를 주고 받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게 바로 베를린이요, 베를리너(Berliner·베를린 사람)들의 일상이다.

젊은 예술가들을 불러들이는 베를린의 정신은 도시 디자인, 시민들의 모습, 심지어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도 발견된다. 지하철역에서는 정교하고도 멋스러운 타이포그래피로 제작된 시를 읽을 수 있고, 거리 곳곳에서 책방을 만날 수 있다. TV는 저녁 8~9시 황금 시간대에 다큐멘터리와 교양 프로를 편성해 방송한다.

시대 곳곳에서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그래피티(graffiti: 예술성 있는 낙서)도 볼거리다. 베를린의 변두리지역 공장이나 허름한 아파트촌 등에는 그래피티가 난무하다시피 한다. 이에 대해 베를린 시 관계자는 "법적으로 허용된 공간은 많지 않아 대부분 불법이다. 그래피티꾼들과 단속원의 숨바꼭질이 일상이 됐다"고 말했다.

■타클레스의 예술 정신

베를린의 청년예술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타클레스(Tacheles)다. 20세기 초 백화점으로 사용되다가 나치 당원들이 머물렀고, 2차 대전땐 폭격까지 당했던 기구한 운명의 역사적 건물이다. 정부는 타클레스를 재개발하려 했으나, 1990년초 예술가들이 반대운동을 펼치며 무단 점거, 그들의 해방구로 만들어 버렸다. 국제적인 관심이 쏠리자, 독일 정부는 이를 용인했고 최근엔 지원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타클레스에는 30여 개의 아틀리에와 공연장, 작업실, 매점, 사무실 등이 들어가 있다. 단순히 보면 국제적 예술센터다. 낡고 허름한 5층 짜리(건평 약 6만㎡) 건물은 전체가 그래피티로 도배돼 있다시피 하다. 너무나 강렬해 한바퀴 돌아나오자 머리가 어질어질 했다.

입주는 자유롭다. 임대료는 따로 없고 전기료 수도료만 낸다. 입주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팔아 생계를 해결한다. 지난 6월 현재 타클레스엔 28개 국에서 온 작가 100여 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한 아틀리에를 구경하던 중 러시아에서 왔다는 니콜라이(45) 씨를 만났다. 2001년부터 타클레스와 인연을 맺었으며 몇 차례 왔다 갔다 한 전력이 있었고, 금년 초에 다시 입주해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리콜라이 씨는 "난 주로 큰(대형) 작품을 그린다. 이곳 생활이 만족스럽다. 그것은 내 작품이 팔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팔린다'는 말은 지속가능한 작품 활동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타클레스의 자원봉사자 린다 세르나(여·35) 씨는 "타클레스가 배출한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많다. 입주의 문은 열려 있지만 우리 나름의 기준은 있다. 실험적 작가들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고, 함량 미달자는 나가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이심전심 모두 자율로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집시들의 소굴(아지트)처럼 보였던 타클레스가 예술가들의 치열하고도 신성한 둥지로 다가왔다.


#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 콘크리트 장벽 1.3㎞… 아름답게 그려진 평화

베를린의 옛 분단 장벽을 거리 갤러리로 바꾼 이스트사이드갤러리.
베를린은 기억에 대한 집착이 남다른 도시다. 분단의 역사를 예술로 승화시켜 평화를 상기하고 교육, 관광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 상징적 현장이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이다.

총 155㎞의 베를린 장벽이 철거되자, 독일인들은 베를린 중심부의 1.3㎞를 남겨 1990년 슈프레 강변에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곳에 세계 21개 국의 작가 118명을 초대해 각각 한 평 남짓의 벽을 배분하여 평화, 자유 등을 주제로 한 벽화를 그리게 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기념물인 동시에 시민들을 위한 공공 조형물이 된 셈이다. 그뒤 이곳은 국제적 명소로 변해 한해 5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갤러리 옆 도로엔 완전히 낡은 자동차가 털털거리며 굴러가고 있었다. 갤러리 안내자에게 물었더니 "옛 동독의 국민차 트라반트다. 관광상품이며 저걸 타기 위해 관광객들이 줄을 선다"고 설명했다.

이 거리 갤러리는 지난 20년 간 비바람과 장벽 수집가, 그래피티 예술가들에 의해 크게 훼손되기도 했으나, 베를린시는 2009년 대대적인 복원작업을 했다.

베를린시는 지난 8월 13일 베를린 장벽 설치 50주년을 맞아 개인이 보관하고 있는 장벽 조각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800m를 다시 복원했다. 내년까지 500m를 더 살린다고 한다.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를 보고 돌아서자 한동안 머리가 어지러웠다. 예술로 승화된 베를린의 분단 장벽 위로 철조망에 짓눌린 한반도의 휴전선이 포개졌다.

위정자들은 세월을 따라 오고 갔지만, 베를린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과거의 상처와 흔적을 꿰매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었다.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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