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새벽 부산 영도구 봉래동 도로에서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쪽으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반면 주민들은 불편을 호소하며 희망버스 일행과 대치 중이다. 국제신문 DB

- 한진重 사태 경영철학의 부재 보여줘
- '희망버스' 시비지심·측은지심의 발현
- 요·순 임금처럼 착한 본성 잘 간직해야
- 부산시민 야구장 밖에서도 역동성 발휘를

"시에, '처음에 신령한 둔덕을 쌓으려고 측량하고 터를 다지니, 백성들이 힘써 일하여 며칠 만에 이루었구나! 쌓으면서 서둘지 말라 하였으나, 백성들이 자식들처럼 왔도다! 왕께서 신령한 동산에 계시니, 암사슴과 수사슴들이 엎드리도다! 암사슴과 수사슴들은 포동포동 살지고, 백조들은 하얗게 윤기가 흐르도다! 아, 왕께서 신령한 못에 계시니, 물고기가 가득 뛰어 오르네'라고 하였습니다. 문왕은 백성들의 힘으로 둔덕을 쌓고 연못을 팠으나 백성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으니, 그 둔덕을 '신령한 둔덕'이라 하고 그 못을 '신령한 못'이라 하였습니다. 문왕은 거기에 있는 큰 사슴과 작은 사슴, 물고기와 자라를 즐겼으니, 이는 옛사람이 백성들과 함께 즐겼기 때문에 즐길 수 있었던 겁니다."('양혜왕·상2')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부산으로 몰려든다. 그런데 지난 주말에는 특별한 피서객들이 부산을 찾았다. 바로 희망버스 참가자들이다. 그들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가를 보내러 부산에 간다"면서 온 이들이다. 가장 아름다운 휴가! 이에 대해 반발할 이들이 분명 있겠지만, 적어도 부산에 관해서 내가 들은 말 가운데 이보다 멋진 말은 없으리라. 또 한편에서는 희망버스를 절망버스라고 말하지만, 무슨 속셈으로 한 말이든 간에 그 또한 진실을 담고 있다. 희망은 바로 절망 속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신들의 신,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것에 화가 나서 인간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아름다운 여인을 만들었다. 그녀가 '판도라'다. 그녀가 열었던 단지를 흔히 '판도라의 상자'라고 부른다. 판도라가 이 단지를 열었을 때, 온갖 악과 불행들이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신화는 인류에게 불행을 가져다준 존재가 바로 여인이라고 하지만, 이는 신들이 바라는, 왜곡된 해석이다.

■신들의 횡포에 저항하는 판도라

	중국에서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요임금의 조각상.맹자는 그를 자주 언급했다.

사실 판도라가 인간 세상에 나타나기 전부터 이미 인류는 불행을 겪고 있었다. 바로 신들의 변덕스런 심사로 말미암은 횡포 때문이다. 먹을 것을 숨겨 놓고서 인간들을 제어했던 신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인류에게 주었다 해서 분노한 신들이 어찌 인류를 위했겠는가. 그들 자신들의 노리개로 삼았을 뿐이다. 그들 신들은 마치 노동자를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노동자를 한낱 소모품으로 여기는 경영자들과 다름이 없다. 신들이 머물렀다는 올림푸스는 횡포를 일삼는 대기업과 같지 않은가?

판도라가 단지를 열지 않았다면, 인류는 여전히 불행 속에서 그 불행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판도라가 단지를 열면서 비로소 신들의 농간을 알아챘고, 스스로 희망을 갖고 미래를 빚어낼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이 나라에서는 1960년대 이후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위해서 대기업 중심의 경제정책을 폈다. 그 과정에서 국민들, 특히 노동자들은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시절을 지나서 엄연히 경제강국이 되었음에도 대기업의 경영자들은 노동자들을 대접할 줄 모르고 도리어 계속해서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오만한 기업인들에게 정면으로 맞서며 온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려고 나선 이가 바로 김진숙 씨이니, 그가 이 시대의 판도라다.

김진숙 씨의 바람은 지극히 소박하다. 기업의 일방적인 정리해고, 정규직 대신에 비정규직을 쓰면서 임금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횡포를 그만두라는 것이다. 기업과 노동자가 함께 살자는 것이다. 처음에 기업과 노동자는 하나가 아니었던가. 맹자가 인용한 시를 보라. "처음에 신령한 둔덕을 쌓으려고 측량하고 터를 다지니, 백성들이 힘써 일하여 며칠 만에 이루었구나! 쌓으면서 서둘지 말라 하였으나, 백성들이 자식들처럼 왔도다!" 노동자들도 저 문왕의 백성들처럼 일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버림을 받아야 하는가?

맹자는 양혜왕에게 "곡식과 물고기와 자라가 이루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넉넉하고, 재목이 이루 다 쓸 수 없을 만큼 많아진다면, 백성들이 산 사람을 먹여 살리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원망이 없게 할 수 있습니다. 산 사람을 먹여 살리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원망이 없는 것, 이것이 '왕도(王道)'의 시작입니다"('양혜왕·상')라고 말했다. 예부터 백성들을 원망하게 만든 왕조는 반드시 망했다. 그렇다면 노동자를 일방적으로 해고하여 먹고 살기 힘들게 할뿐 아니라 노동자를 극단적 상황으로 내모는 기업이라면, 망하지 않겠는가? 김진숙 씨는 바로 그것을 막으려고, 노동자도 살고 기업도 살게 하기 위해서 판도라의 단지를 열었던 것이다.

■내 가족 사랑하듯 남도…거기에 어짊이

"내 집의 늙은이를 높이는 마음이 남의 늙은이에게 미치고, 내 집의 아이를 아끼는 마음이 남의 아이에게 미친다면, 천하를 손바닥에 놓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시경'에서 '내 아내를 바르게 하여서 형과 아우에게 미치니, 집안과 나라가 다스려지네'라 하였으니, 이 마음을 들어 저기에 더해줄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미루면 사해를 편안하게 할 수 있고, 은혜를 미루지 않으면 처자도 편안하게 하지 못하니, 옛사람이 남들보다 크게 뛰어났던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자기가 한 것을 잘 미루었을 뿐입니다."('양혜왕·상7')

내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그대로 남에게 미치는 것,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므로 공존하고 상생해야 마땅하다는 것, 그것이 어짊이다. 맹자는 왕이 그런 마음을 지녀야만 한다고 했지만, 맹자가 이 시대에 다시 태어난다면 이 말을 경영자들에게 해주었을 것이다. 참된 경영인은 제 가족처럼 노동자들을 아끼고 보살펴야만 그 기업을 길이 융성하게 할 수 있다고, 그것이 곧 왕도 경영의 바탕이며 요체라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경영을 제대로 펴는 이들이 이 시대 이 나라에는 참으로 드물다. 한진중공업 사태는 바로 그런 경영철학의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절망해야 할 것인가? 아니다.

85호 크레인 위에 노동자의 희망이 있다면, 희망버스에는 시민의 희망, 세상의 희망이 실려 있다. 희망버스는 사람을 싣고 왔다. 그 사람들은 결코 누군가에 의해 떠밀려서 온 이들이 아니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행동한 이들이다. 그들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시비지심으로 판단하고 측은지심에 따라 행동했을 따름이다. 바로 그들이, 그들에게 있는 시비지심과 측은지심이 희망이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고 말하면서 그때마다 요와 순 임금을 거론했다. 요와 순이 어진 정치를 편 것은 그들이 착한 본성을 잘 간직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남과 달랐던 것은 아니다. 맹자는 "요와 순도 남들과 같을 뿐이다"('이루·하32')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은가? 그들도 사람일 뿐이다. 우리도 사람이다. 왜 그들에게 있는 것이 우리에게 없겠는가. 바로 이것이다. 희망버스를 타고 온 이들이 보여주고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이 함께 느낀 것, 그것은 "사람의 본성은 착하며, 사람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희망이 어디에 있으랴.

■측은지심·시비지심이 필요해

한진중공업 사태는 한편으로는 기업 윤리 및 경영철학의 문제, 노동자들을 비롯한 약자 보호의 문제와 연관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의 의식 개혁과 관련된다. 이 모두 부산시민들이 스스로 자각하고 제기했어야 하는 문제였지만, 그렇지 못하였다. 그래서 김진숙 씨가 85호 크레인에 올라갔으며, 그것만으로도 부족했으므로 타지에서 희망버스들이 쏟아져 들어왔던 것이다.

부산은 이미 오래전부터 고통과 불행의 씨앗이 자라고 있던 도시였다. 인구는 줄고 기업들은 떠나가고, 정치인들과 자치단체장들은 늘어나는 적자에 속수무책이며, 지역 발전에는 그다지 관심도 열의도 없는 특정 정당의 국회의원들만 선출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망조가 아닌 쇠망 자체다. 그럼에도 깨어날 줄 모르는 시민들은 제 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바라보고 있다.

	정천구 프리랜서

맹자는 "사람이 짐승들과 다르다고 할 근거는 적은데, 뭇 백성은 버리고 군자는 간직한다"('이루·하19')고 말하였다. 뭇 백성은 버리고 군자가 간직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측은지심과 시비지심이다. 부산시민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마음이다. 그러했으니, 한진중공업 사태를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둔 것이 아닌가.

부산을 찾은 타지의 사람들이 한결 같이 말하는 것은 부산시민들에게는 열정이나 활기가 넘치며 매우 친절하다는 것이다. 부산시가 표방하는 것도 '다이내믹 부산'이 아닌가. 그러나 그 열정이나 활기, 역동성은 고작 야구장에서나 발휘되고 있다. 사사로운 친절은 있어도 참된 측은지심은 부족하다. 부산이 판도라의 도시가 된 까닭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