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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문학기행 <3> 문정희 시인과 고향 보성

"열정보다는 격정" 남녀평등·사랑詩로 인생의 주름 펴 주네

"아름다운 기억이 깨질까봐…" 문 시인 10여년만에 고향집 찾아

"어른이 된 제게 어머니의 마음, 격정의 처녀, 천진한 아이 다 있어"

  • 국제신문
  •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
  • 2011-03-22 20:10:29
  • / 본지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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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의 율포해변은 문정희 시인의 외가가 있던 곳이다. 독자와 문 시인(오른쪽 두 번째)이 갯벌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시카다상(the Cikada Prize)은 197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웨덴의 시인 해리 마르틴손(1904~1978)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제정됐다. 이 상은 한국 중국 일본 시인 중 성취가 탁월한 한 사람을 선정해 해마다 시상한다. 1945년 일본 원자폭탄 투하사건이 마르틴손에게 큰 영향을 끼쳐 관련 작품을 창작케 했을 뿐 아니라, 그가 생전 동아시아의 시 전통과 자산을 무척 존중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제7회 시카다상 수상자가 문정희(64) 시인이다. 한국 시인으로는 고은, 신경림 시인에 이어 세 번째다. 지난해 열린 G 20 서울정상회의 때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도서관에서 열린 'G20 세계문학기행' 개막행사에서 한국을 대표해 '미래를 기다리는 다산(多産)의 처녀'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한 이도 문 시인이다. 2010년과 2011년에 걸쳐 중·고교 국어교과서에 '꽃 한 송이' '찔레' 등 그의 시가 수록됐고, 그의 시집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알바니아어 등으로 번역돼 세계에 나갔다.

■"나는 열정보다는 격정이지"

지난 20일 문 시인의 고향 전남 보성에서 부산 경남의 '신나는 문학기행' 일행은 문 시인을 만났다. '옛날 다리미' 생각이 났다. 프라이팬처럼 생긴 그릇 위에 벌겋게 단 숯불을 올린 뒤 후줄근하고 주름진 천 위를 쓱쓱 왔다갔다하면 어느새 주름은 펴지고 천은 밝고 빳빳해졌을 것이다. 이날 하루를 함께 다닌 문 시인의 이미지가 그런 존재를 연상시켰다. 그가 일행 사이를 지날 때마다, 벌건 숯불이 눈에 보이고 사람들의 주름이 펴지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보성의 자랑인 차밭에 갔을 때였다. 대한제다 차밭 삼나무길에서 문 시인이 말을 건네왔다. 문 시인은 2006년 9월 기자와 함께 경북 군위 인각사 문학기행을 한 적도 있고 해서 부산 독자들의 문학기행 사랑을 잘 알고 있었다.

(문학기행 일행을 가리키며) "조 기자는 독자들의 이 열정을 어떻게 감당해?" 잠깐 생각해보고 대답했다. "오랜만에 문 선생님 뵈니까, 저는 선생님의 열정이 더 뜨거운 것 같은데요."

그가 무심코 받았다. "나는 열정보다는 격정이지."

이 순간 취재수첩을 덮고 싶었다. 오늘 시인 문정희를 만나 취재해야할 것을 다 취재해버린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거였어! 시인 문정희를 열 수 있는 키워드.

■봉황 우는 명봉역의 기억

   
문정희 시인(왼쪽)이 전남 보성군 노동면 명봉역에서 문학기행 일행에게 자신의 시 '명봉역'을 낭송해주고 있다. 시인의 어릴 적 아픔이 서린 시를 들으며 독자들도 표정이 진지해졌다. 조봉권 기자
진명여고 시절 문학상 20여 개를 휩쓸었고, 고교생 신분으로 첫 시집 '꽃숨'을 냈을 때 서문을 써준 이가 미당 서정주 시인이었다. 1969년 대학 4학년 때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정식 등단했고, 젊은 시절에는 단칸방에서 불태우듯 시를 썼다. 누구보다 일찍 세계를 다니기 시작한 문인으로도 그는 꼽힌다. 시극 창작 부문에도 두각을 드러냈다.

여성에게 채워진 억압을 걷어치워버림으로써 남녀의 평등한 공존을 정면에 제기한 시들 또한 그의 것이면서 사랑시에도 일가견이 있다. 사랑시만 모아 시집도 펴냈다. 그걸 다 해내려면 필요한 건 "열정보다는 격정"이었을 것이다.

보성군 노동면 봉동리에 있는 명봉역. 여기 오자 시인은 어딘지 아득한 표정으로 변했다. "저는 11살 때까지 바로 옆 학동리 호미마을에 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광주 서석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건강한 모습의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이별한 곳이 명봉역입니다." 마을 유지였던 부친은 시인이 14세 때 타계했다.

'아직도 은소금 하얀 햇살 속에 서 있겠지/서울 가는 상행선 기차 앞에/차창을 두드릴 듯/나의 아버지/저녁노을 목에 감고/벚나무들 슬픔처럼 흰 꽃 터뜨리겠지//지상의 기차는 지금 막 떠나려 하겠지//아버지와 나 마지막 헤어진 간이역/눈앞에 빙판길/미리 알고/봉황새 울어 주던 그날/거기 그대로 내 어린 날/눈 시리게 서 있겠지'('명봉역' 전문. 시집 '다산의 처녀' 수록)

■생가 앞에서 보존을 생각함

명봉역과 가까운 학동리 호미마을에 문 시인이 태어난 옛 집이 '다행히' 그대로 있었다. 시인에게서 약간 먹먹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이라고 천진한 마음만 있을까요. 아이 속에도 아프고 슬픈 것, 그런 걸 느끼는 촉수가 있죠. 어른이 된 제게 어머니의 마음, 격정의 처녀, 천진한 아이가 다 있는 것처럼요." 어릴 적부터 지극히 감수성이 예민했을 것이 분명한 그는 "그래서 그간 고향집, 고향마을을 생각하면 아팠고, 아프게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그가 고향집을 찾은 것은 10여년 만이다. 근처에 왔다가도 차마 옛집까지는 못 갔다. 시인의 유년과 원형이 있는 그 집을 지금 다시 본다는 것이 아파서, 아플까봐, 아름다운 기억이 깨질까봐. 막상 일행과 생가를 찾아간 시인은 "여기서 이 창으로 개기일식을 봤다." "감나무는 없어져 아쉽네"하며 마음을 쓸어내렸네.

여기서 일행은 중요한 문제에 부딪쳤다. 이 생가가 타인 소유로 돼 있어 보존을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생가 표지도 없다. 뒷날 큰 시인이 된 이의 원형을 형성해 준 문화적 장소가 위태로워보였다. 예술·문화기행을 다녀본 이들은 잘 안다. 한 지역사회의 예술·문화 자취가 얼마나 연약한지. 아차 하는 순간 없어지면 방법이 없는 것이다. 거창한 기념사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해둬야 후손이 좋다.

■남도 사람들의 예술·문화 사랑
이날 동행한 이남섭 보성문인협회장은 "향후 보존이나 관리에 대해 아직은 구체적인 진척이 없지만 보성군 등과 협의해 차근차근 해나갈 계획"이라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날 문학기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보성의 환대다. 정종해 보성군수가 직접 나와 "부산 연제구와 보성군은 자매결연 고장"이라며 문 시인과 일행을 환대했다. 보성문협 이 회장을 비롯해 안천순 손흥식 시인, 문화관광해설사 세 분이 일행을 안내했다.

김성춘 씨 등 문화관광해설사들은 모두 문인이어서 해설은 재미있고 아름다웠다. 보성에서 또 한 번 느꼈다. 남도의 예술·문화 대접은 당할 재간이 없다고.

▶주최:롯데백화점·부산문화연구회

▶특별후원:국제신문

▶참가문의:http://문학기행.kr (051)441-0485


# 김형식 前 전남도교육원장

- "보성의 보배 문 시인 생가 보존계획 세워야"

   
문정희 시인의 올케 양승심(왼쪽) 씨와 주민 김형식 씨.
"어릴 때부터 유별나게 영리하고 총명이 좋기를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어요." 전남 보성군 노동면 학동리 호미마을 문정희 시인 옛집을 갔을 때 반갑게 달려나온 이가 있었다. 문 시인에게 올케언니가 되는 양승심(74) 씨였다. 오랜만에 만난 올케와 시누이는 얼싸안고 얼굴을 다시 보며 인사를 나눴다. "이렇게 유명한 시인이 되니 우리 마을 사람들도 참 마음이 좋아요." 문학기행이 이런 좋은 만남의 계기를 마련한 듯해 일행은 뿌듯했다.

문 시인이 온다는 말을 듣고 만사 제쳐놓고 자리를 함께해준 동네 어른도 있었다. 전남도교육원장을 지낸 김형식(74) 씨였다. 그는 문 시인을 '정희'라고 했다. '동네오빠'인 셈이다. "정희네 집안은 우리 마을에서 큰 유지였어요. 부모님은 얼마나 미남미녀들이셨던지…. 정희가 오빠하고 열일곱 살 차이가 나요. 귀여운 늦둥이가 얼마나 예뻤겠어요."

"보성군에 많은 자랑거리가 있지만, 세계에서 알아주는 문정희 시인은 또 얼마나 보배요? 그러니 명봉역 앞에 문 시인의 시 '명봉역'을 게시하면 얼마나 좋겄소? 그러잖아도 드라마 촬영지라고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판인디." 그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문 시인의 생가는 지금부터라도 보존할 계획을 세워야 해요.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이 보성군 벌교에 있지만, 문 시인도 얼마나 훌륭한 시인이요? 보성군이 차(茶)도 유명하지만 문학도 유명하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문학기행 일행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동네오빠' 최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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