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놈 숙주야! 우리가 집현전에 있을 때 세종께서 무어라 했는가. 천추만세 뒤에 그대들은 원손을 잘 보위하라 당부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진정 너 홀로 잊었단 말인가! 의리를 저버리는 너의 사악함이 오늘날까지 이를 줄은 차마 알지 못했구나!" (박운규의 '우리 역사를 움직인 20인의 재상' 중)
단종을 귀양보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를 제거하려다 실패, 역적으로 체포된 성삼문(1418~1456)은 국문장에서 살을 태우는 고문을 당하고 있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신숙주(1417~1475)를 향해 이렇게 일갈했다고 한다. 후대는 성삼문을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과 함께 지조와 충성의 상징인 '사육신'으로 칭송했다. 사육신은 1456년 6월 8일 처형 당했고, 신숙주는 19년 뒤인 1475년 6월 21일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오늘이 신숙주의 기일(忌日).
수양대군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란에 직면한 조선 군신들은 세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육신처럼 죽음으로 항거하든지, 생육신(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같이 새 정권에 등을 돌리고 초야에 묻혀 지내든지, 아니면 막강한 세력을 움켜진 세조의 품안으로 뛰어들던지.
신숙주는 세 번째 길로 들어섰고 후대는 그에게 변절자란 꼬리표를 달아 주었다. 당시 백성은 쉽게 상하는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불러 신숙주의 변절을 비웃었고, 신숙주의 부인은 남편이 부끄러워 목을 매 죽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숙주나물이란 단어는 1930년대 소설에서 처음 등장하며, 조선후기 음식문헌에는 녹두나물이 녹두장음 또는 장음녹두로 기록돼 있다고 말한다. 신숙주 부인이 남편의 변절로 충격을 받아 자살한 것이 사실인지 그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신숙주가 정사든 야사든 변절자란 인상으로 강하게 각인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세종에게 각별한 총애를 받은 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유명한 일화가 있다. 추운 겨울 자정이 넘은 시각, 세종은 산책을 나갔다가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안에 누가 있는지를 알아보게 했다. 내관이 살펴보고 와서 신숙주가 책을 읽고 있다고 아뢰었다. 세종은 신숙주가 집현전에서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새벽닭이 울도록 집현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신숙주가 책을 읽다 그만 잠이 든 것. 세종은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신숙주를 덮어 주도록 했다. 아침에 잠이 깬 신숙주는 자신이 어의를 덮고 있다는 걸 알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세종은 1450년 2월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신숙주 성삼문 등 아꼈던 신하들에게 자신의 뒤를 이을 왕을 잘 보필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결국 신숙주는 세조를 선택했고 후세는 그를 세종의 유지를 어긴 변절자로 평가했다.
현대에 들면서 이 같은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유연해지고 있다. 실제로 신숙주는 세조가 선택할 만큼 출중한 능력을 가진 신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세종~성종까지 6대 왕을 보필할 수 있었다. 그는 국방·외교·어문에 능한 천재 관료이기도 했다. 신숙주가 주도한 한국 최초의 운서(韻書) '동국정운'이 국보로 지정된 데서 우리는 그의 학자적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대중의 손가락질을 받아가면서 조선이란 신생 왕조를 도운 실용주의자인가, 아니면 빼어난 능력을 무기로 출세가도를 달린 처세의 달인인가. 그는 우리에게 숙제를 남겼다. 문화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