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의 작가가 흙으로 돌아갔다. 어제 일어난 일이다. 흙의 작가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경남 통영 미륵산 기슭인 양지농원의 땅을 파내고 그 속에 그를 뉘었다.

지난 5일 박경리 씨가 영면한 이후 나흘간 벌어진 일들이 언론을 통해 소상하게 보도됐다. 이 내용들은 한번 훑어보기만 해도 그가 얼마나 큰 작가였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호사유피(虎死留皮)사 인사유명(人死留名)' 즉, 사람의 삶이 헛되지 않으면 그 이름이 길이 남는다는 옛 성현의 말씀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박 씨의 문학세계와 생애, 그를 아는 이들의 추모사 등 다양한 보도가 쏟아지면서 우리는 고인이 소설보다 더한 삶을 산 작가였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눈 밝은 이는 숱한 보도 중에서 1997년 10월 '토지사전'(임우기·정호웅 지음·솔)이 출간된 바 있다는 내용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박 씨의 대표작 '토지'가 완간된 걸 기념하고, 이 소설을 읽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1992~1997, 만6년에 걸쳐 집필된 사전이다. 대하소설 '토지' 속에 나오는 어휘 2600개와 풍부한 속담, 당대의 유행과 풍속, 제도, 120여 명에 달하는 주요인물, 140여 개의 역사적인 사건, 1850~1945년에 이르는 연표, 인물 가계도, 저자 연보를 담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이 절판돼 현재로선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토지사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2600개 어휘의 다수가 서부 경남 사투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남도 사람들이 유달리 '토지'에 애착을 보이는 이유가 달리 있겠는가. '토지'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언어가 읽는 이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으니 친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서부 경남 사투리를 '토지' 속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고 가치를 더해 준 것이다. '토지'가 있었기에 서부 경남 사투리는 표준말의 반대말, 변방의 언어에서 벗어나 우리 문화유산으로 당당히 설 수 있었다.

'토지'의 매력은 뭐니뭐니 해도 운명과 맞서 싸워나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 일것이다. 한때 경남 하동 평사리를 호령해 왔지만 이젠 가세가 기울대로 기운 최참판 댁을 일으켜 세우려는 서희의 집념, 머슴이었다가 서희와 결혼한 후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는 길상의 인생유전, 소작인의 딸 용이와 무당의 딸 월선의 기구한 사랑…. '토지'를 대상으로 한 일부 학위 논문은 이 같은 인물군상의 끊임없는 성격 창조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토지'는 식민지 시대를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그 심층적 의미는 특정한 시대와 공간에 국한되지 않는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다. '토지'는 인간에 의해 인간의 삶이 어디까지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는가 하는 한계를 시험하는 두루마리요 피륙이고 거대한 벽화인 것이다."(서울대 방민호 국어국문학과 교수)

박 씨를 잃은 문단은 깊은 애도를 표시하느라 느낄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문인의 큰누님 같은 고인은 벌써 큼직한 선물 하나를 이 땅에 떨어뜨려 놓았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문인다운 문인은 언제나 존경받는다는 것을 고인은 보여주었다. 그게 박 씨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다. 이 땅에 지금 살아있고, 앞으로 살아나갈 많은 문인들에게 이보다 축복스럽고 자랑스러운 선물이 또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