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발간돼 동보서적 영광도서 등 전국 대형서점에 공급된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전 4권)'이 이번 주 동안 모두 반품됐다. 문학과지성사는 이 책이 기획 편집 제작까지 9년이 걸렸으며, 편집위원 11명과 문학연구가 104명이 참여해 작가 351명의 대표작 900여 편을 담아냈다고 설명했다. 이른 바 야심작인데, 왜 서점에서 배포된 지 4개월이 지나 '리콜'된 것 일까. 내용상 묵과할 수 없는 잘못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만다라'를 쓴 소설가 김성동 씨를 다룬 해제(소설 2편)가 엉터리였다.
'소설 2편'은 김 씨의 단편 '오막살이 집 한 채'를 1960∼1970년대 대표작품 중 하나로 들고 충북대 이익성(국문학과) 교수가 쓴 해제를 달았다. 이 해제에서 이 교수는 문학의 순수성과 관련된 본격 문학에 집중하기보다는 추리소설을 창작하거나 신문에 역사소설을 연재했으며, 종교에서 바둑으로 관심 영역을 확장해 '국수'와 같은 작품을 창작하기도 하고, 사회적 관심을 보인 '영부인 마님 정말 너무해요'와 같은 작품 등을 발표했다고 썼다.
이에 대해 김성동 씨가 발끈한 건 당연한 일. 그는 "추리소설을 쓰거나 신문에 역사소설을 연재한 적 없다. '국수' 등에서 바둑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소품일 따름이며, '영부인 마님'은 공동 콩트집이다"고 반박하고 있다. 김 씨는 이 교수가 자신과 이름이 비슷한 추리작가를 구분 못하고 있는 것 같다며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다.
이번 사태에 대해 서점관계자들은 '충격적인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문학과지성사가 이런 큰 결함으로 책을 회수한 사례는 일찍이 없었다고 한다. 잘못된 해제를 바로잡아 책을 다시 제작해야 하니 손해도 만만찮다. 출판사 편집진은 이 책을 역작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이처럼 치명적인 실수가 발견됨으로써 내용에 대한 신뢰성을 의심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 혹여 다른 잘못도 없는지 전면 재검토 해봐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문학과지성사에 대한 비난 여론도 드세다. 김성동 씨가 3개월 전에 이 사실을 알고 출판사 측에 항의 편지를 보냈을 땐 반응이 없다가 언론에 보도된 후에야 조치를 취하는 건 거대 출판사의 횡포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출판사 측이 김성동 씨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고, 향후 계간지를 통해 공개사과를 할 계획이라지만 훼손된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엔 너무 부족해 보인다. 상황이 파악되자마자 출판사 측이 곧장 조치를 취했으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을 터이다. 문학과지성사가 통·폐합의 아픔을 딛고 한국을 대표하는 거대 출판사로 성장하는 동안 어느새 문화권력이 돼버린 걸까. 작가들과 어깨를 겯고 이 땅의 문학을 지키고자 했던 창간 초발심이 다 휘발됐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문학이 죽고, 인문학이 고사하고 있다는 우려가 끊이지 않고 있지만 정작 당사자들의 자성과 노력은 부족하다는 걸 이번 사태는 잘 보여준다. 창작은 작가의 자존심이자 모든 것인데 이를 무참하게 훼손한 것은 문학의 정조를 유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번 사태는 김성동 씨 개인뿐 아니라 문화예술인 전체의 명예와 관련된 문제이다. 김성동 씨가 문학과지성사 측 등을 명예훼손죄로 고발할 예정이라고 한다. 문학인들도 그냥 지켜만 보지 말고 고민을 공유하면서 반면교사로 삼는 지혜를 발휘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