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교수신문은 학회·계간지 편집위원을 대상으로 '한국 사회에 가장 영향을 끼친 책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는데 응답자 103명 중 가장 많은 41명이 '자본론'(칼 마르크스 지음)'을 꼽았다. 다음으로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송건호 외 〃)이었고,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 '과학 혁명의 구조'(토마스 쿤 〃) '제3의 물결'(앨빈 토플러 〃) '오리엔탈리즘'(에드어드 사이드〃) '토지'(박경리 〃) '역사란 무엇인가'(E H 카) '태백산맥'(조정래) '꿈의 해석'(지그문트 프로이드〃) '한국 전쟁의 기원'(브루스 커밍스 〃) '감시와 처벌'(미셸 푸코)로 이어졌다. 1970~80년대 대학가나 지식인들의 '사회과학 교과서'가 다수이다. 남북 단절, 군부 독재, 독점 재벌 같은 당대 한국 상황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꼭 필요했으며, 한반도안에서만 맴돌던 시선을 세계로 돌리도록 사고를 넓혀 주었던 책들. 당연히 이런 영광을 누릴 자격이 있다.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는 정말 필요한 책들을 제대로 갖고 있을까'하는.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한국의 번역 인프라를 짚어봐야 한다. 앞서 언급한 12종을 보자. 이 중 무려 8종이 번역본이다. 우리가 읽어왔고, 앞으로 봐야 할 책중 상당수가 외국산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번역이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필요한 외국서적이 신속·정확하게 번역돼 국내 독자에게 공급돼야 하는, 지극히 당연한 조건이 얼마나 지켜지고 있을까. 원본이 초간 번역되기까지 걸린 기간을 살펴보자. 마르크스가 1867년에 쓴 '자본론'은 자그마치 120년이 지난 1987년 '이론과실천'에서 번역돼 일반인들에게 소개됐다. '꿈의 해석'은 94년, '감시와 처벌'은 21년 만에 우리말로 출간됐다. 외국 명저가 우리나라에서 지각 번역되는 이런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번역되지 못한 책들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근대 정치 사상가인 홉스 로크 루소가 펴낸 저본은 거의 번역되지 않았고 플라톤 전집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은 아예 손도 못 대고 있는 실정이다('번역은 반역인가'·박상익 지음· 푸른역사). 외국에 나가 서점을 즐겨 들러 북쇼핑을 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번역할 서적이 정말 많다고 말한다. 반면 우리 출판계는 소위 '돈이 되지' 않는 책은 번역할 생각조차 않으며, 그런 여력도 없는 무기력증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근대화를 맞으면서 번역을 국가사업의 하나로 채택해 오늘날 세계 출판시장에서 큰소리 치고 있는 일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외국서적은 고사하고 선조들의 출판물까지 못 본채 하고 있으니 상황은 정말 심각하다.
고서 수집광인 신경림 시인에 따르면 남한보다 20배나 못사는 북한이 한문서적 번역 부문에서는 우리를 앞질렀다고 한다. 신 시인은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실학자 넷이 함께 펴낸 시집 '사가시선(四家詩選)'을 읽고 싶었지만 한국에선 번역본이 없었고 중국 옌볜에서 그것을 구할 수 있었다. 그 귀한 책은 1950년대에 평양에서 출간됐고, 최근 남한 모출판사가 그것을 베껴 출간했다. 한국은 번역 후진국인 셈.
대한민국 번역 문화가 빈곤하다는 우려에 대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 출판물을 국제무대에서 파는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번역 인프라가 확고하게 구축돼야 한다는 원칙을 더 이상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