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초등학생·학부모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공통된 화제는 교육 쪽으로 모아졌다. 아이들은 각종 사교육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고 불평을 해댔고, 학부모들은 배부른 소리라고 눈총을 날렸다. 그러던 중 어느 학부모가 '바디 랭귀지~' 어쩌고 했는데 듣고 있던 아이들중 한 명이 물었다. "바디 랭귀지가 뭔말인데요?" 요즘 초등학교 고학년생들은 학원이나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니, 개인 학업에 따라 다를 수는 있으나, 'Body language' 정도는 그리 어려운 영어 표현이 아니라고 판단한 그 학부모는 눈에 딱 힘을 주고 이렇게 말했다. "아, 니는 영어 공부는 안 하는 갑제. B · O ·D ·Y, L ·A · N · G · U · A · G · E, 바디 랭귀지, 모르나?" 아이의 대답은 이랬다. "아이 참, 바디 랭귀지가 아니라 '바리 랭그'라고 해야죠, 바리 랭그." 좌중이 일순 잠잠해졌다가 곧 왁자지껄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 자리가 끝난 뒤 기자는 어느 발음이 정확한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해 봤는데 결론은 금방 내려졌다. '바디 랭귀지'라고 하면 영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열 중 아홉은 뭔말인지 모른다는 것. '콩그리시'파들은 여전히 '바디 랭귀지'가 정상 발음이라고 여기고.

전 대통령인수위 고위 관계자가 '오렌지가 아니라 오륀지'라며 국민을 상대로 발음을 잡아주고, 새 정부 측근들이 '~프렌들리(이 역시 일설에 의하면 본토 발음이 아니라고 한다)'를 자주 인용하는 걸 떠올려 보면, 초등학생이 '바리 랭그'라고 한 건 별스러운 일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이 시대엔 적확한 영어 구사력이 필요하다. 영어 잘 해서 나라 안팎에서 손해볼 일이 없을 터이다. '영어 구사력=국제 경쟁력'이란 설정에 누가 이의를 제기하랴.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는 영어와 국어가 시소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권력이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금방 국어가 죽어 버린다. 영어를 더 잘 하려면 국어에 한층 밝아야 하고, 국어를 꿰뚫고 있는 이가 영어 공부에 매진하면 다홍치마라는 얘기는 진부할지라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영어를 우리말로 옮기고, 우리말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두 언어의 숙달없이 가능할까를 생각해 보면 납득이 되지 않을까. 영어 못잖게 국어도 중요한데도 한국의 현실은 늘 역주행이다.

최근 전국 대학들이 잇달아 발표하는 대입 요강을 살펴보자. 2007년과 눈에 띄게 드러나는 부분은 '논술 고사 폐지 내지는 최소화'이다. 지난해 모국어 사용 능력이 중요하다며 논술 고사 비중을 높였던 대학들 대부분이 새 정부의 '영어 프렌들리' 정책에 일찌감치 백기를 든 모양새다. 다행인 건 일부 대학들이 논술고사가 아니라 에세이 작문이나 구술시험을 도입해 새 '정부의 '영어 프렌들리' 정책을 슬쩍 피해가고 있다는 것. 하나, 정부와 대학의 이런 미묘한 신경전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논술 고사 폐지됐다'며 다른 쪽 공부에만 전념하는 수험생들이 자꾸 늘게 마련이다. 생각해 보자. 영어가 제 아무리 세계를 주름잡는다 하더라도 일단 모국어는 제대로 배워야 하지 않을까. 고등 교육기관일수록 모국어 사용 능력을 중요시 하는 건 당연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권력 논리에 휘청대는 대학들이 그렇고, 말문 닫은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이며, 소신없는 언론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결국 그 피해는 우리 모두에게 돌아오는데도 한사코 버티고 있다.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