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단위를 넘어서는 세계 문명의 발전과 연관된 문제, 갈등과 불평등 그리고 불공평에 직면해서 인류의 가장 높은 수준의 사고가 무엇인지를 전 세계에 보여줍시다."

오는 7월 30일~8월 5일 서울에서 열릴 제22회 세계철학대회(WCP)를 앞두고 피터 켐프 국제철학연맹 회장이 밝힌 대회 격려사의 일부다. '철학 올림픽'이라고도 불리는 이 행사가 아시아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열린다는 건 무얼 의미할까. 21회 대회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선보였다. 정작 서양철학의 본산인 그리스에서는 이 대회가 개최되지 않았다.

세계철학대회가 서울에서 마련됐다는 건 서양과 동양 철학이 융합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읽힌다. 켐프 회장이 언급한 바와 같이, 서양철학계는 세계가 직면한 공통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느꼈고 그 탈출구는 동·서양 철학의 합체에 있다는 걸 인식했다. 근래 10여 년, 서양철학계의 "목소리에 비해 일궈낸 결과는 신통찮다"라는 반성과 동양 철학계는 "다문화 시대를 맞아 새로운 철학 패러다임을 우리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성이 어깨를 겯었다. 세계 철학계의 변방에 서 있었던 동양 철학이 자신의 저력을 드러낼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 셈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철학자들은 이번 세계철학대회를 더욱 주목한다. 20여 명의 철학자가 참가해 우리의 큰사상가 유영모(1890~1981) 함석헌(1901~1989) 선생의 철학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유영모·함석헌의 '씨알 사상'을 연구한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 윤정현 성공회대 교수, 이정배 감신대 교수,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 김혜암 코넬대 교수,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김상봉 전남대 교수 등이 발표한다. 그동안 한국 철학이 있기라도 했느냐는 비아냥에 분연히 맞서 온 철학자들이다.

이 중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펴낸 '나르시스의 꿈'(한길사)은 이번 세계철학대회의 지향점과 잘 어울리는 책이다. 부제 '서양정신의 극복을 위한 연습'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이 책은 우리와 서양정신의 차이를 말함으로써 서양정신의 본질을 밝히려 한다. 그 차이를 통해 우리의 정체를 알아보고자하는 시도는 한국 철학의 주춧돌을 놓는 작업이기도 하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자화상을 우리 자신의 초상화로 알고 살아왔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철학은 자기를 거울에 비추어 보고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남의 자화상에 자기 얼굴을 뜯어 맞추는 일이었던 것이다." 김 교수의 얘기다. 그는 이 책에서도 '함석헌을 철학적으로 읽는 것, 이것이 우리의 과제다'라고 전제한 뒤 "지난 100년 우리의 지성사만 놓고 본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직도 철학이 무엇인지 모르는 민족이다"라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21세기 한국 철학의 과제가 '함석헌 읽기'라는 그의 주장은 그래서 더욱 절박해 보인다.

마침, 오는 13일(사제지간인 유영모-함석헌 선생의 생일) 오후 7시 서울 은행연합회 2층 컨벤션홀에서 '씨알 생명 평화 문화제'가 열린다. 5월 16일에는 제1차 '씨알사상 포럼'을, 7월 하순께에는 유영모-함석헌 선생을 비롯해 간디 슈바이처 등 전 세계 생명평화 철학가들을 추모하는 '생명 평화 축제'가 마련된다고 한다. 진리와 사랑, 자유와 평등을 일치시킨 씨알정신·사상에 대해 우리, 나아가 세계가 더욱 잘 알게 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