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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일근 시인이 집 앞 대숲 사이 길을 걸으며 시상에 잠겨 있다.
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
'시노래'가 울려퍼지고 있다. 그 진원지는 울산이다. 지난 7월 제1회 한국시노래축제가 한국의 대표시인들과 전국의 시노래회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시민들의 큰 호응 속에 열렸다. 요즘 울산 시민들은 울산사랑 시노래회 '푸른고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이고 '고래를 기다리며'(안도현 시) 등 시노래를 가요처럼 흥얼거린다. 시노래축제를 울산시의 대표 공연축제로 발전시키자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이 같은 새로운 문화풍속의 중심에 '푸른고래'의 회장인 정일근 시인이 있다.
지난 12일 오후 정 시인이 6년째 둥지를 틀고 있는 울산시 울주군 웅촌면 은현리 덕산마을 은현시사(銀峴詩社)를 찾았다. 은현시사는 고산습지인 무제치늪을 품고 있는 정족산(솥발산)의 발치에 자리하고 있다. 집 앞은 은현리 들판으로 탁 트여 시원하고 뒤편은 정족산의 자락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시인의 둥지로 맞춤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다. 겨울 날씨 치고는 포근했던 이날, 은현시사에는 손님들이 많았다. 이궁로 도순태 시인과 작곡가 김학주, 울산 토박이 가수 남미경 씨 등 '푸른고래' 회원들이었다. 이들은 정 시인과 마당에서 이 시인이 최근 펴낸 '만질 수 없는 삶의 안쪽'(고요아침)의 시편을 골라 곧바로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악보 대신 시집을 펴들고 노래를 하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을 주면서 시와 노래는 원래 한몸이었다는 '전설 같은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시노래 '비'가 10여 분 만에 아름답게 마무리되자 정 시인이 촌평을 한다. "시 조오타. 이렇게 노래가 쉽게 만들어지잖아."
'깜짝 시노래 공연'을 감상한 후 시노래 운동에 관한 얘기를 듣기 위해 정 시인의 독서와 사색의 공간인 '솥발산방'에 들어갔다. 들판을 향해 있는 방은 시를 쓰는 '은현시사'라고 했다.
"원래 시와 노래는 한몸이었잖아요. 시노래 운동은 시의 원형을 회복하고 시를 널리 확산시키고자 하는 뜻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는 설명을 이었다. 1999년 처음 시노래회를 울산에서 결성했는데, 때마침 그해 서울과 광주에서도 시인들이 주축이 되어 같은 취지의 '나팔꽃'과 '달팽이'를 각각 탄생시켰다. 이들은 자주 교류 및 합동공연을 펼치고 있다.
요즘이 영상매체와 화려한 춤노래 시대인 점을 감안할 때 '소박한' 시노래의 반향은 놀랍기만 하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시민들이 소박하지만 서정적인 공연을 찾고 있다는 방증이죠. 우리 공연을 찾는 사람들은 주로 가족단위의 30~40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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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일근 시인이 '푸른고래' 회원들과 함께 시노래로 부르고 있다. 왼쪽부터 이궁로 시인, 가수 남미경 씨, 정 시인, 도순태 시인, 작곡가 김학주 씨. 박수현 기자 |
여기에는 그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공연 기획과 총감독 역할을 하는 정 시인의 개인 역량이 큰 몫을 하고 있다는 건 불문가지. 제1회 한국시노래축제가 울산에서 열린 것과, 이 축제의 장에 김남조 김용택 강은교 정호승 도종환 안도현 등 우리시대 내로라하는 시인들이 대거 참석한 것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시노래 운동의 성공이 스타 시인을 내세운 이벤트적 요소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정 시인은 처음엔 울산시인협회, 울산시립합창단과 함께 울산 출신 시인들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합창단이 공연하는 일에 적극 참여했다. 이는 토박이가 적은 울산시민들에게 애향심을 불러일으키는, 울산으로서는 절실한 작업이었다. 울산시립합창단은 시노래에 이어 울산의 인물과 명소를 합창곡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림으로써 시민의 사랑은 물론 전국 합창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울산시립합창단의 시노래가 예술공연으로 자리를 잡아가자 정 시인은 대중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2003년부터 공원과 도심 등지에서 시노래 공연을 시작했던 것이다.
언뜻 '푸른고래'란 이름이 고래의 도시 울산과 잘 어울리는 시적인 이름이란 느낌이 들었다.
"푸른고래란 고래암각화의 반구대가 있는 울산을 상징하면서도 희망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정 시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지난 45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 귀신고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릴레이 시노래 콘서트를 갖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푸른고래'는 지난 2004년 10월부터 1개월 동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래였던 귀신고래가 출몰했던 강원도 양양에서 출발해 울진 포항을 거쳐 울산 장생포항까지 '고래야 고래야 푸른 고래야' 릴레이 콘서트를 열었다. 또 '푸른고래'는 올해 그동안 발표한 시노래 중 10곡을 선정해 시노래 음반 '맑은 눈빛 그냥 그대로'를 냈다. 이 음반의 보컬을 맡은 남미경 씨는 숨겨진 매력을 인정받으며 개인콘서트와 각종 문학제 초청 공연으로 한층 바빠졌다.
3년 전 이곳 은현시사를 찾았을 때 '마당으로 출근해 자연이 불러주는 시를 받아쓰기 한다'던 정 시인. 그는 자연에서 시 받아쓰기 외에 도시에서도 이처럼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8년 뇌 수술에서 기적적으로 소생한 뒤 온전한 시인으로 살 것을 결심하고 두 가지 일을 했는데, 그 중 하나는 시노래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에 귀의(은현리로 이사)한 것입니다. 이 둘은 사실 다르지 않습니다. 자연에서의 시 받아쓰기나 도시에서의 시노래 운동은 자연의 호흡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자연의 호흡은 시의 리듬이고 이는 곧 음악입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귀신고래가 회귀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희망에 대한 염원이자 생명 사랑입니다. 이는 곧 자연 사랑이죠."
솥발산의 품은 넉넉했나보다. 자연은 그에게 많은 시를 불러주었고, 그는 열심히 받아적었다. 그리고 뱀처럼 날쌔고 미세한 자연의 호흡까지도 포착해 냈다. 은현시사에서 그는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 '왼손잡이의 슬픔'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 그리고 시조집 '만트라 만트라'를 냈다. 또 그동안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영랑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러고도 두 권 분량을 시를 더 썼고, 동시도 한 권 분량을 가지고 있다.
"이제 받아쓰기는 졸업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아직 졸업은 멀었어요, 이제 초등학교 5~6학년쯤 될까. 10년은 채워야 좀 알아들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는 집앞 나대지를 정돈해 화단을 가꾸어 봄부터 가을까지 피어나는 꽃을 보고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했던 일, 특히 영랑문학상을 받을 무렵 백모란이 피어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던 소감을 마치 소년처럼 털어놨다. 그러고 보니 꽃밭에는 꽃이 모두 지고 없었지만, 그의 집 마당에는 요즘 구경하기 힘든 목화가 피어 솜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은행단풍이 여름 내내 열매를 다 맺고 난 다음에야 노랗게 물든, 바로 희생의 빛깔이라는 것을 처음 깨달았습니다."
그는 은현리에서 여섯 번째 겨울을 맞는다. 이제 이력이 날 만도 한데, 그는 겨울이 여전히 견디기 쉽지 않다. 뇌 수술 탓이다. 찬바람은 뇌속을 찌르는 것만 같다. 올 들어 가슴도 시린 모양이다. 시집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의 시편 중 '숨찬 사랑'은 '백일홍꽃 백일 동안 붉다는 말은/햇살 환한 은현리에서 거짓이다'로 시작해 '사람의 사랑, 너무 쉽게 피었다/너무 빨리 지는 꽃이다'로 끝난다.
황혼 무렵, 은현시사 앞 대숲을 지나 텅 빈 은현리 들판을 정 시인이 산책하는 모습을 보면서 수만 년 동안 무제치늪을 품은 솥발산이 정 시인의 몸과 마음을 하루빨리 말끔히 치유해주기를 바랐다.
# 정일근 시인 약력
▲1960년 경남 진해 출생 ▲계간 '실천문학' 신인상(1984)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1985) ▲서울신문 시조 당선(1986) ▲경향신문 문화일보 사회부 기자 ▲시집 '착하게 낡은 것의 영혼'(2006) '오른손잡이의 슬픔'(2005)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2003)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2001)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1991) 등 ▲시조시집 '만트라, 만트라'(2006) ▲영랑시문학상(2006) 소월시문학상(2003)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2001) ▲현 울산작가회의 회장, 울산사랑 시노래 모임 '푸른 고래'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