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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상호 작가가 지난 22일 부산 기장군 삼성리 야산에 조성한 대안공간 오픈 스페이스 배의 전시실에서 포즈를 취했다.
서순룡 기자
seosy@kookje.co.kr |
산에다 배를 짓고 띄웠다는 이야기는 '노아의 방주'를 제외하곤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 부산 기장의 한 야산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지난 9월 2일이었다. 그런데 고동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점차 커지고 있다. 그래서 지난 22일 오후 젊은 미술인들의 해방구인 '오픈 스페이스 배'를 찾아갔다. 이 배의 키잡이(디렉터)인 작가 서상호 씨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부산 해운대와 기장읍을 거쳐 14번 국도를 타고 가다 일광해수욕장 부근을 조금 지나면 왼편에 조그만 아파트(삼덕연립주택) 2개 동이 보인다. 이 마을은 기장군 상성리 삼덕마을인데, 아파트 앞에서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국도와 나란이 난 작은 길을 기장읍 방면으로 되짚어 300m가량 가면 오른쪽 소나무숲 사이로 승용차 한 대가 겨우 갈 수 있는 길이 나온다. 이 숲길은 한창 소나무 낙엽이 노랗게 물들어 있고 소나무 사이로 군데군데 옻나무 졸참나무 단풍이 늦가을 풍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 길은 월명사 가는 길이기도 한데, 군데군데 돛단배 표지를 보면서 300~400m쯤 갔을까,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들어서자 숲속 풍경과는 전혀 다른, 탁트인 풍광과 함께 오픈스페이스 배가 저만치 보였다.
오픈 스페이스 배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 채의 집(1층 주거, 2층 자료실)과 전시실 한 동과 마당, 그리고 인근 배밭을 포함한 주변 자연경관 모두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마당 여기 저기에는 설치작가 정혜련 씨의 '얼굴' 등 10여 점의 설치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오픈 스페이스 배의 주변 산세와 자연경관은 부드러우면서도 빼어났다. 오른쪽 일광산이 팔처럼 드리운 능선은 흐르고 흘러 마치 손가락처럼 작은 능선들로 퍼진다. 그 작은 '손가락능선' 중 하나에 오픈스페이스 배가 떠 있고 앞쪽 손가락능선은 4만 여평의 배나무밭이다. '저 배나무가 모두 꽃이 필 무렵이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서상호 작가가 막 전시실에서 나와 기자를 맞아주었다. 그는 여유와 배포가 느껴지는 유난히 도톰한 볼살을 갖고 있었는데, 작가라면 꼬장꼬장할 것이란 선입견을 가시게 해주었다.
인사를 하자마자 '배 띄울 장소'로서 이곳을 찾은 계기를 물었다. "2년 전 지인의 소개로 이곳을 보고는 작가들의 사색과 창작의 공간으로 더 없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도심에 가까우면서도 이곳에서는 도시의 찌꺼기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타지역 작가들도 와 보고는 모두들 반합니다."
'오픈 스페이스 배'에 대해 미술인 외 일반인들은 아직 생소함을 느끼고 있어 그 의미를 물었다. "오픈 스페이스 배는 젊고 창조적인 작가들을 위한 열린 공간 '배'라는 뜻입니다. '배'는 부산의 상징이기도 한데, 희망을 안고 출항하는 배(ship)이며, 배밭이라는 장소적 의미, 그리고 발전하고 증가한다는 배(double)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배밭이라는 새로운 열린 공간에서 작가들이 한 배를 타고 현대미술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취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묘한 이름이라고 생각하면서 전시실을 구경했다. 40여 평 규모의 전시실에는 지난 18일부터 12월 3일까지 '우연한 인연 기막힌 인연'이란 주제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데, 김성연 김만석 심점환 이상열 정만영 씨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었다. 또 이 배에는 입주작가 5명(5년 장기:조각각 박은생 신무경, 입체작가 안재국, 6개월 단기:영상작가 정만영, 사진가 김찬수)이 창작에 몰두하고 있는데 이들과 함께 항해하고 있는 것이라고 서 작가는 말했다. 그러니까 오픈 스페이스 배는 제도권(상업적) 미술공간에 대한 대안공간으로서 작가정신이 투철한 젊은 작가를 발굴, 무료로 전시 공간을 제공하는 한편 열악한 미술제작 환경에서 고갈되기 쉬운 작가적 상상력과 도발적 창작 작업을 지원하기 위해 레지던스(입주) 프로그램까지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입주 프로그램은 부산 최초로 미술계의 지형도를 새롭고 자유롭게 그려나갈 것으로 벌써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이런 배의 키잡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게 이상할 것은 없으나 그가 지난해 부산미협이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할 만큼 촉망받는 섬유조형작가란 점에서 이 일은 '외도 혹은 전업'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해나간다는 게 '부업' 정도로 여겨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궁금증을 우선 뒤로 하고 자료실에서 그의 작품들을 일별했다. 그는 흔히 '바지' 작가로 통한다. 지난 2002년 부산바다미술제 행사의 하나로 해운대백사장 앞 바다에 떠오른 거대한(13m) 붉은 바지 작품의 주인공이 바로 서 작가이다. 사람들은 텅 빈 이 바지를 보면서 그동안 잊고 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털어놓았다. 2001년 '내 안의 타인'이란 개인전에서 그는 한지를 소재로 자신의 존재를 잊고 사는 현대인을 바지로 형상화해 주목받았다. 지난해 '제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기념전에서는 전시도록과 팜플릿을 이용한 4m 크기의 바지 '미술아 간다'를 설치했다. 서 작가의 바지는 존재를 부정하고 무의미화, 해체한다. 한편으로 현대인에게 빈 바지(자신의 내면)에 채워넣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그는 또 부산시립미술관 기획전 '경계해체와 표현의 확장'(1998) 등 100회가 넘는 기획 및 초대전을 가졌다.
서 작가의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전날 한 미술평론가의 말을 떠올렸다. "서 작가는 주제를 전달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소재에 대한 발상이 기발할 뿐 아니라 조형물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원하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바로 작가로서의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또 "숨막히는 미술계 상황에서 숨통을 틔우기 위해 오픈 스페이스 배의 디렉터를 한시적으로 자처한 것일 뿐 서 작가는 어디까지나 작가이며, 어쩌면 디렉터 일도 작업의 연장선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술평론가의 이 말을 상기하면서 서 작가에게 "'배'의 디렉터 일이란 어찌보면 작가들 뒤치다꺼리인데, 작가로서 잘 나가다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치명적인 공백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짐짓 물어보았다.
"'성질 급한 놈이 우물 판다'고 이게 저 성격인데 어쩝니까." 곧바로 나온 그의 대답이었다.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솔직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작가로서도 시간적 손해를 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좀 더 부지런하면 된다"며 "이 일은 제가 미술계에 발을 딛고 있는 상황에서 피할 수 없고,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오픈 스페이스 배를 조성하기 위해 문화관광부 등 관계기관에 수없이 지원금 신청서를 넣었다. 하도 많이 해서 요즘은 기획안과 지원 신청서를 작성하는 데 30분이면 뚝딱 해치운다고. 이런 그에 대해 대안공간 '반디'의 김성연 대표는 "지역 미술계의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애정과 열정의 소산"이라며 "그가 있어 든든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자료실을 나와 배밭 너머 작업실로 가기 위해 오솔길을 걸었다. 그는 작은 소나무와 잡목과 수풀이 어우러진 곳을 가리키며 "이 모두가 더 없이 좋은 전시공간이자 전체로 미술 작품"이라며 "지난주에 가족단위의 미술체험 프로그램 '미술아 놀자'를 개최해 좋은 반응을 얻어 내년부터 본격 실시할 계획"이라고 소개
했다. 축사를 개조한 3동의 작업장 중 한 곳에서 안재국 작가가 작업 중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서 작가는 '전업 우려'에 대한 지적을 의식한 듯 "비록 지금 디렉터 일을 하고 있지만 본업이 작가임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며 "올해 7월부터 이달까지 중국 선양에서 열린 빛엑스포에도 초대전을 가졌고, 내년 3월엔 부산 도심에서 야외전시회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산책 삼아 작업실을 다녀온 시각, 짧은 늦가을 해는 어느덧 서쪽 배밭 머리에서 붉은 입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서 작가와 작별하고 돌아오는 길에 "작가란 우아하기보다는 치열해야 한다"는 그의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 > 서상호 작가 약력
▲1968년 부산 출생 ▲동아대 섬유미술과 및 동대학 교육대학원 졸업 ▲개인전 '내 안의 타인'(2001) '미술아 간다'(2005) 등 6회 ▲중국 선양 빛엑스포 초대전(2006), 대전시립미술관 초대전 '소프트 파워'(2005), 광주시립미술관 초대전 '패션과 현대미술'(2003년), 부산시립미술관 기획전 '경계해체와 표현이 확장' 등 100여 회 ▲부산미술인협회 제4회 '오늘의 작가상'(2005), 개천예술제 진주 섬유경진대회 최우수상, 홍익 섬유조형전 특선 등 ▲현 오픈 스페이스 배 디렉터, 부산미술포럼 감사, 전국오픈스튜디어네트워크 기획위원, 부산예고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