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는 언젠가부터 거대담론이 사라지고 '재테크 담론'만 무성하다. 대학에서는 인문학과 기초과학이 고사했고, 문학에 서사가 사라진지 오래다. 보수와 진보는 목전 이익에 아옹다옹할 뿐 희망적인 담론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몸을 떠맡긴 정신적 표류자에 다름 아니다. 얼마 전 델리 대학에서 인도생태철학을 연구하고 돌아온 부산대 박준건(52·철학과) 교수 연구실을 13일 오후 찾았다. 박 교수 특유의 생태철학이 전망 부재의 시대에 새로운 건강한 담론 형성의 핵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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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대 박준건 교수가 지난 13일 부산대 연구실에서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를 극복하는 방안으로서의 생태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
부산대 성학관에 있는 박 교수의 연구실은 작은 책의 성채였다. 이 성채는 금정산의 검푸른 소나무숲과 신선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기자는 박 교수가 끓여준 차를 입에 대기가 무섭게 우리 사회의 거대담론 부재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인 것 같습니다. 거대담론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 거리(주제)가 없어졌거나, 아니면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외면하기 때문이겠죠. 1980년대까지 융성했던 '민주주의'라는 거대담론이 민주화로 인해 퇴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데, 분단 상황이라는 큰 과제가 상존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90년대 들어 새로운 담론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세계적인 조류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이른바 세계화 시대, 신자유주의 시대 아닙니까? 이 시대는 경제 앞에 조국이 없는 시대이고 '20대 80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20%의 승자와 80%의 패자로 양분되는 사회이지요. 이런 시대에 인문학은 특히 철학은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 같은 선진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우리의 전망은 결국 세계 자본주의 전망과 무관하지 않다"며 "이것에 대해선 경제학자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나 썩 낙관적이지는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말한 그는 우리 사회의 심각한 정신세계의 결핍과 이로 인해 가까운 미래에 닥칠지 모를 정신적 공황을 우려했다.
문득 박 교수의 연구실에 흩어져 있는 인도 생태철학 서적들이 델리대학 객원 교수 생활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냈다.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와 간디를 비롯한 근대 인도 사상가들의 생태사상을 연구했어요. 현재 이를 종합해 논문을 써야 하는데 게으름을 피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마르크시즘을 전공했고 요즘은 생태철학에 천착하고 있다. 사회주의 몰락을 예언한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시대가 도래(?)한 지금 생태철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상적 지주로서 전망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 자못 기대가 되었다.
"우리 사회에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이성과 감성의 갈등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 갈등구조를 푸는 것이 이 시대의 화두입니다. 생태철학이란 이 화두나 마찬가지라고 보면 됩니다." 흔히 환경보호론은 인간과 자연의 갈등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생태철학의 일부분이다. 생태철학의 분야는 이것을 훨씬 넘어 인간 욕망·욕구의 문제, 자본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문제를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생태철학의 중요성에 대해 "생태를 그리스어로 '오이코스(Oikos·집)'라고 하는데 생태가 파괴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사는 집, 살림살이가 파괴되는 것과 같다"며 "매우 긴박한 '내 자신의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교수의 설명을 들으며 생태철학은 분단과 세계화라는 상황 속에서 우리의 좌표를 제시할 사상적 기초로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의 화두를 붙든 생태철학은 대중 친화적인 환경을 매개로 우리의 과제인 보수·진보, 남·북 등 양극단 간의 화해를 포괄하고 있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강단에서뿐 아니라 현실에 널리 뿌리를 내리는 문제는 바로 생태철학의 본질과 관계된다고 박 교수는 말했다. "생태철학은 인간에게 지금과는 다른, 어쩌면 상반된다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태철학이 요구하는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설명을 이었다. 그동안 세계를 지배해온 사상은 17세기 뉴턴과 데카르트로부터 형성된 이성주의와 기계론적 세계관이었다. 세계를 기본단위의 총합으로 보는 이 세계관 아래에서 인간과 사회의 계량화·수치화는 불가피했으며, 종국에는 대량 생산, 대량 소비가 미덕인 오늘날 자본주의로 꽃을 피우고 있다. 이에 반해 새로운 세계관은 기본단위의 총합론이 아닌 관계망을 중시하며, 다양성과 공동체, 총체를 지향한다.
박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서 생태철학이 동양사상과 아주 가깝게 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가 왜 인도에 갔는지도 짐작이 갔다. 그는 "노자 장자는 원래 생태론자라고 할 수 있으며, 당시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면 그들은 영락없이 오늘날 생태철학의 태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중국과 인도뿐 아니라 우리 나라에도 생태철학의 원류가 자생하고 있었다며, 윤노빈 선생의 '신생철학',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함께 동학사상을 들었다. 박 교수의 철학은 서양의 생태사회주의, 아나키즘, 심층생태주의를 연구한 것은 물론 우리 고유의 생명사상들인 동학, 김지하, 윤노빈, 다석 유영모, 함석헌의 영향을 받아 학계의 일반적인 생태철학에 비해 내용면에서 독특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지난 2003년 '김지하 생명사상과 율려사상에 대한 고찰'이란 논문을 쓴 박 교수는 "학계에서는 김지하의 사상을 연구 주제로 삼는데 대해 시큰둥한데, 철학계의 이 같은 경직된 아카데미즘이 일반인과의 소통을 막고 발전의 저해하는 요인되고 있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서양의 원자론적이고 기계론적인 세계관을 극복하는 것이 저의 화두입니다. 그래서 기계론적 세계관의 원조인 데카르트와 뉴턴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겠지만 대안적 논의를 위해 우리의 생명사상도 적극 연구하고 수용할 계획입니다."
박 교수와 대화는 종종 학계에서 걸려온 전화로 중단되곤 했다. 그는 전국철학자네트워크의 성명서 서명 작업 중이었던 것이다. 최근 신우익을 표방하는 학자들로 구성된 '선진화국민회의'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추진 중단' 요구 성명서에 대한 반박 성명서였다. 이 성명서 발기인 11인 중 한 사람인 그는 이와 관련, "개인의 의견을 말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한국철학회 이한구 회장이 회장의 직함을 내걸고 민감한 사안에 참여함으로써 철학계의 소수의견이 마치 한국철학회 회원 전체 견해인 양 오해되고 있어 이를 지적하려 한다"고 말했다.
말이 나온 김에 전작권 문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묻자 박 교수는 "단순히 보수와 진보의 갈등으로 변질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분단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서 우리 사회는 합리적인 논의 구조가 형성되지 못했죠. 이번 기회에 전작권의 환수가 옳다 그르다를 주장하기에 앞서 이것의 본질에 대해 폭넓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민교협 부산대 회장인 박 교수는 그동안 국가적 사안에 학자의 양심을 걸고 목소리를 내왔다. 지난 2003년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에 대한 검찰 수사와 관련해 반향을 일으킨 전국대학교수 200명 명의의 '학문적 실천은 오직 학문의 논리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는 성명서에도 참여했다. 그는 "당시 우리는 단지 학자로서 학문과 사상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를 구성하는 핵심 원리이며, 따라서 이것은 절대적으로 존중되어야 하고, 그의 학문적 업적이 검찰 수사의 대상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무죄로 판결한 법원의 논리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는 자그마한 체구와 유순한 인상처럼 과격하거나 요란하지 않다. 학자의 현실 참여에 대한 소신을 물었다. "철학자 헤겔이 '철학은 시대의 아들'이라고 갈파했듯 철학자는 사유의 출발점을 현실에 둬야 하고, 현실과 대화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실에만 집착할 때 학자의 본분을 잃을 수도 있지요. 흔히 세계를 해석할거냐, 변혁할거냐 하는 문제를 거론하곤 합니다. 철학자는 어느 하나를 외면하지 않고 팽팽한 긴장을 갖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북동쪽으로 창이 난 성학관 박 교수 연구실에서는 어느덧 금정산이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박 교수와 대학가에서 저녁을 겸해 나눈 소주는 긴 철학수업(?)의 피로를 금방 가시게 해주었다. 지적 호기심에서 철학을 했고, 그 철학이 세계의 제반 문제에 대한 해결사가 되어줄 것으로 믿었다는 박 교수. 현실 사회에 이를 어떻게 반영할 것이냐의 물음에 그는 김지하의 말을 빌어 말했다. '명상과 혁명'의 길을 함께 가야한다고.
〉〉박준건 교수 약력
▲1953년 부산 출생 ▲부산대 졸, 부산대 대학원 석· 박사 ▲부산대 교수 취임(1991년) ▲현 부산대 철학과 교수, 민교협 부산대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