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따뜻한 봄날, 한 소년이 마당에서 세수를 하고 있었다. 그 때 라디오에서 한 줄기 미풍 같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소년은 세수를 멈추고 꿈을 꾸듯 그 멜로디에 빨려들었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2번 '백조의 노래'. 고교 1학년이던 이 소년은 그 후로 그 소리를 찾아 클라리넷을 불고 또 불었다.
이로부터 40년이 지난 지난 4월 25일 서울 예술의 전당. 은발의 지휘자가 포항시립교향악단을 이끌고 무대에 올랐다. 전국교향악축제 20번째 순서인 이날 포항시향은 쇼스트코비치의 발레모음곡 1번과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 G장조, 드보르자크의 교향악 7번 D단조를 연주했다. 당시까지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포항시향은 음악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들으며 일약 '교향악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공중파로 전국에 생중계된 이날 연주 무대는 지휘자 앞에 스코어(지휘자용 악보)와 보면대가 보이지 않아 눈길을 끌기도 했다. 지휘자는 이날 심포니와 모음곡 그리고 협주곡까지 모두 암보(악보 암기)해 지휘했던 것이다.
그 소년과 은발의 지휘자가 바로 부산대 박성완(56·포항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교수이다. 박 교수는 교향악축제 연주뿐 아니라 모든 음악회 연주곡 악보를 모조리 암기해 악보 없이 연주한다. 학구적인 지휘자란 별칭이 붙은 것은 당연. 단원들은 그런 박 교수를 신뢰하고 따르며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소유자라고 부른다.
지난 19일 오후 부산 연제구 연산동의 한 전통찻집에서 박 교수를 만났다. 그는 전날 오전 부산시민회관에서 열린 '휴 콘서트'에, 오후에는 포항으로 달려가 연주를 했다. 음악계의 '선비'로 통하는 그는 예의 잔잔한 표정이었다. 집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이었다기에 지휘자는 어떤 음악을 주로 듣는지 물어보았다.
"저는 음악을 거의 듣지 않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기자를 순간 당황케 했다. 음악가가 음악을 듣지 않는다니.
"'내면의 귀(Inner Ears)'라는 말 들어봤죠?"
"스코어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악보의 음표들이 살아 움직이며 소리를 내죠. 악보에서 마치 향기가 풍겨나오듯 음악이 흘러나와요. 이 음악을 듣는 게 내면의 귀입니다."
종이에서 나오는 향기를 손으로 모아 귀로 맡는 듯한 그의 동작은 무대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또 다른 지휘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꼭 악기를 쳐 내는 소리만을 듣는 건 아닙니다. 음악 CD를 듣는 것보다 악보를 읽으면 음악이 들리고 그 악보가 자연스럽게 입력되죠." 그러면서 그는 승용차에도 CD가 없고 특히 연주할 곡은 절대 듣지 않는다고 했다.
연주자들은 보통 어려운 곡을 처음 연주할 경우 명반을 들으며 참고를 하기도 한다. 박 교수는 '연주할 곡은 절대 듣지 않는다'는 말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법했다.
"지휘자도 연주자입니다. 지휘자는 작곡자의 의도를 충실히 따르는 게 도리입니다. 그래서 지휘를 '재현의 예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연주곡을 미리 듣지 않는 건 선입견을 갖지 않고 작곡자의 의도를 직접 연구·해석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휘자에게 악보를 자기식대로 해석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은 최대한 작곡자의 의도를 파악해 재현하려 한다고 박 교수는 덧붙였다. 그는 흔히 '정통파'로 불린다. 이처럼 작곡자의 악보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포항시향 연주를 포함, 매월 4, 5회의 연주회를 지휘한다. 그것도 모든 악보를 외 무대에 서는 것이다. 심포니 한 곡은 40분에서 1시간이 걸리고, 음표 만도 수천 개다. 게다가 그가 연주한 음악은 초연곡과 현대음악이 많다. 학구적인 지휘자란 평판이 여기서 비롯된 것 같다. 박 교수는 악보에 대한 연구·분석에는 냉철하고 엄격하지만 지휘와 그의 음악은 따뜻하다는 게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의 얘기다. "암보 지휘를 그리 내세울 건 못돼요. 습관이 그리 들었을 뿐입니다." 박 교수의 이 말은 아주 덤덤했다.
언제부터 암보 습관이 들었나는 질문에 그는 네덜란드 유학시절이었다며 그 후로 원칙이 됐으며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했다.
박 교수의 언변은 마치 슬로우모션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묻는 말 외에는 잘 하지도 않았다. 그는 스스로 "나는 얘기거리가 없는 재미없는 사람"이라며 "허, 허" 하고 웃었다. 근처에서 함께 저녁을 먹고 다시 찻집에 앉았다. 그동안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멜로디를 동경하던 소년에서 지휘자로 변신한 여정을 이야기했다.
그 소년은 고2 때부터 본격 클라리넷 레슨을 받고 대학에 들어갔다. 클라리넷을 전공해 대학을 졸업하고 1974년 대학원까지 마쳤다. 대구시향에 입단해 연주 생활을 시작했으나 내면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다. 대구시향을 그만 두고 한 때 중학교 교사를 해보기도 했다. 방황은 5년간 계속됐다. 대학시절 은사인 고 김진국 선생은 지휘자의 길을 가라고 권유했다. 은사의 간곡한 권유에도 그는 "제가 감히 어떻게 지휘자를…" 하며 물러섰다. 그러나 당시 그는 지휘란 신이 선택한 위대한 인물들만 하는 줄 알았다.
"마음을 못잡고 있는데 78년 어느날 세계 4대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암스테르담 콘서트 헤보우 내한 공연 소식을 들었어요. 버나드 하이팅크 지휘로 정경화의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멘델스존 이탈리안 심포니를 연주했는데 정말 환상적이더군요." 이 네덜란드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은 박 교수에게 운명적이었던 셈이다. 당시 대구에서 알게 된 네덜란드인 판 크레흐튼 씨의 소개로 이 오케스트라의 클라리넷 주자 피터 호닝흐 씨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네덜란드 유학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박 교수는 "막상 유학을 결심하고 나니 '내면의 요구', 방황의 근원이 무엇이었는 지가 환하게 보였다"며 "지휘자의 길을 선택한 데는 맥 엘헤란의 말 '양심적인 음악가라면 누구나 지휘자가 될 수 있다'에 무한한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휘자를 '연주자의 교사이자 의사'로 정의했다. 연주자의 음악적 상태를 진단하고 그에 맞는 처방을 내려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안내한다는 뜻이다. 그는 지휘봉의 모든 동작은 연주적 의미가 담겨 있어야 한다며 화려한 지휘 동작 이면의 비음악성을 경계했다. 박 교수는 또 내면의 귀를 통해 듣는 음악을 현실에서 영원히 들을 수 없다는 게 모든 지휘자의 숙명이자 애환이라고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찻집에서 박 교수의 집은 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말이 없다. 혹자는 무표정한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르겠다며 갑갑해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자는 알 것 같았다. 그 순간 그의 내면은 음악을 듣고 있다는 것을.
문화팀장 pine@kookje.co.kr
# 이야기 하나 더
- 박교수의 '말러 사랑'
얼마 전 부산대 박성완 교수와 신라대 백진현(마산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교수가 모처럼 부산 시내 한 민속주점에서 만나 밤늦도록 통음했다. 말 없기로 소문난 박 교수는 두주불사, 주선(酒仙)의 경지다.
백 교수가 "선생님, 저 이번 정기연주회에 말러 4번 합니다"고 했다.
"말러? 말러 말라 하노." 박 교수는 이렇게 툭 던지듯 말해놓고 백 교수와 함께 웃는다. 기자는 처음엔 영문을 몰라 하다가 지휘자 세계에서 회자되는 펀(pun·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유머. 작곡가 말러와 '무엇하러'란 뜻의 사투리 뭘라·말라를 등치시킨 것)이겠거니 하고 따라 웃었다.
그 배경이 그럴 듯했다. 독일 후기낭만파 작곡가인 구스타프 말러의 곡들은 장대하고 웅장한 스케일로 유명하다. 그의 심포니는 난해하다. 그래서 지휘자는 공부하기 어렵고, 단원들은 연주에 애를 먹고, 게다가 청중들은 듣는 게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말러 교향곡을 '말라고' 굳이 하느냐는 말이 나왔다고. 백 교수의 부연 설명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말러 말라고'를 복창하며 다시 웃었다.
곧 주제는 반전됐다. 두 사람은 말러 음악을 상찬하기 시작했다. 백 교수가 먼저 "말러 심포니 중에서 천국을 노래한 4번이 가장 예술성이 높은 것 같던데요. 3악장 아다지오는 '직이데요'"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이어졌다. '한 소절 안에서도 박자가 바뀌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데도 전체적으로는 화음이 기가 막힐 정도다. 말러 연주는 힘들지만 묘미가 있다".
박 교수는 백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대구시향 지휘자 시절 말러 4번 연주 경험을 들려줬다. 그리곤 "5번은 더 좋다"고 말을 꺼냈다."5번은 말러 특유의 비통한 반항과 우수, 고외와 절망 속에 방황하는 인간 내면의 세계를 웅장한 스케일로 표현했지." 그는 이어 "지난 5월 부산심포니에타와 4악장 아다지오를 연주했는데 말야, 모든 심포니의 아다지오 중 백미일걸세"하고 말했다.
말러가 정신질환을 앓으면서 작곡한 곡들이 어떻게 이처럼 심오할 수 있느냐는 감탄에서 그가 한 때 미소년을 흠모했다는 소문까지 두 지휘자의 말러 얘기는 끝이 없었다.
# 약력
▲1950년 경북 포항 출생 ▲계명대 음악대학 및 동 대학원 졸업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음악원 지휘과 최고과정 졸업 ▲안톤 케르셰스(당시 암스테르담 필하모닉 상임지휘자), 루카스 피스(현대음악가) 사사 ▲부산대 교수 취임(1987년) ▲대구시향 상임지휘자 ▲울산시향 상임지휘자 ▲부산시향, 수원시향, 코리안심포니,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스테이트 심포니 오케스트라 객원지휘 ▲현 부산대 교수, 포항시향 상임지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