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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11> 원융으로 화합하는 땅, 화개

평등과 화합의 세상 꿈꾼 고운·진감… 쌍계서 한데 어우러지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4-12 19:23:38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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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원이 짓고 쓴 진감선사 비명
- ‘도불원인 인무이국’으로 여니
- 도는 사람과 멀리있지 않고
- 사람은 나라 따라 차별없다 밝혀

- 석가·공자 이치는 다르더라도
- 도달하는 곳은 한 길이라 하며
- 신라 유학자임에도 스스럼 없이
- 승려의 지혜와 공덕 높이 칭송

- 비명 마지막 ‘부끄럽다’ 밝히니
- 유·불교 끌어안은 깨우침으로
- 선사 큰 마음 읽어낸 원융 빛나
- 서기 887년 도합 2533자 완성

‘도불원인(道不遠人) 인무이국(人無異國)’. 최근 주한중국대사관이 코로나19 확산으로 곤경에 빠진 대구시에 마스크 2만5000개를 지원하면서 운송 차량에 붙인 현수막에 적힌 문구다. ‘도는 사람과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른 차별이 없다’는 의미다. 중국인들이 인용해 장안의 화제가 된 이 문구는 다름 아닌 최치원이 쓴 국보 제47호 진감선사 비명의 시작이다. 물론 ‘무릇’ ‘대저’라는 의미의 어조사 ‘부(夫)’자가 앞에 붙는다.
   
쌍계사에 있는 최치원이 쓴 국보 제47호 진감선사비. 전액의 전서체는 기이하면서도 웅혼하고, 비명의 해서체는 근골이 심려하여 마치 죽순이 돌을 뚫고 나온 듯하다는 평과 함께 흔히 신필(神筆)이라는 찬사를 듣는다. 하동군 제공
■유가의 인(仁)의 정치, 불가의 평등은 하나의 道이니

‘부도불원인(夫道不遠人) 인무이국(人無異國)’에 이어 ‘是以東人之子 爲釋爲儒必也(시이동인지자 위석위유필야)’로 진감선사 비명은 이어진다. ‘그러므로 동쪽나라(신라) 사람들이 불교와 유교를 배우는 것은 필연이다’라고 하였다. 불교에 귀의한 스님의 비명 서문에 보편적 진리로서의 도와 인간의 평등을 말하고, 불교와 유교가 도를 깨치는 다르지 않은 길이라 밝힌 것이다.

치원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하는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시험 빈공과(賓貢科)에 장원급제했다. 그만큼 유교에 정통하지만 불교, 특히 당시 당에서 크게 선풍을 일으키던 선종에 해박하고 도교에도 밝았다. 치원이 왜 그처럼 학문과 종교를 넘나들며 이치와 지식을 탐구했는지는 차차 알아가야겠지만 ‘인(仁)’과 ‘평등’이 중심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유교는 ‘인의 정치’를 이상으로 삼고 불교는 ‘평등’이 바탕이니 말이다.

이어, 간혹 배운다는 자들이 ‘석가와 공자가 교의를 설함에 있어 흐름을 나누고 체제를 달리하여,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과 같으니 서로 모순되어 한 귀퉁이만 고집한다’며, 그러나 ‘여래(如來·석가)가 주공(周公), 공자와 비록 드러낸 이치는 달라도 도달하는 곳은 한 길이다’고 하며 굳이 유·불을 나누려는 편협함을 은근히 꾸짖는다.

또 양(梁)나라 시인 심약(沈約)의 ‘공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석가는 그 이치를 밝혔다’는 말과, 공자가 제자들에게 ‘나는 이제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라는 말을 더한 뒤 ‘석가가 가섭존자에게 은밀히 전한 것은 혀를 움직이지 않고 능히 마음을 전한 것에 들어맞는다’고 하며 ‘멀리서 현묘한 도를 전해와 우리나라를 널리 빛낸 이가 어찌 다른 사람이랴. 선사가 바로 그분이다’고 해 지혜와 공덕을 높이 칭송한다.

   
진감과 고운의 원융사상의 구현으로 여겨지는 화개장터는 지금까지도 화합의 장소 역할을 한다.
■질박함은 존귀를 가리지 않았으니

비명은 서(序)로 사실을 기록하고, 명(銘)으로 공덕을 노래한다. 서의 첫머리에서 진감선사 사상의 근본을 말하고 덕을 칭송한 치원은 이어 그의 출생과 성장, 당나라 유학과 수행 과정을 적는다. 귀국 후 옥천사를 창건하고 열반에 들기까지의 행적도 기록했는데 그 대략은 앞선 9회에서 본 바와 같다.

치원은 선사의 성품도 더듬는다. ‘질박함을 잃지 않았고, 말에는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입는 것은 헌 솜이나 삼베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겨나 보리싸라기도 달게 여겼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범벅에 나물반찬도 둘을 넘지 않았으며, 존귀한 사람이 찾아와도 다른 반찬이 없었다’고 적어 스스로 검약하며 존귀를 가리지 않았음을 밝혔으니 참으로 의연하다.

어쩌다 호향(胡香)을 선물하는 이가 있으면 질그릇에 잿불을 담아 환을 짓지 않고 사르면서 ‘나는 이 냄새가 어떠한지 모른다. 마음만 경건히 할 따름이다’고 하였다. 한차(漢茗·한명)를 공양하는 이가 있으면 돌 가마솥에 불을 지펴 가루로 만들지 않은 채 끓이면서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알지 못한다. 뱃속을 적실뿐이다’고 하였으니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꺼림이 이런 것이다’라고 했다. ‘예(禮)’ 또는 ‘도’라는 이름을 앞세워 과하게 포장하는 허울에 대한 실천적 경책이 아니고 무엇이랴.

선사는 절에서 제를 올릴 때 부르는 노래인 범패(梵唄)를 특히 잘하였다. 그 목소리가 금옥(金玉) 같았다.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구성진 소리는 능히 천상계의 신불(神佛)을 기쁘게 할 정도였다. 이에 먼 곳에서까지 배우려는 사람들이 승당(僧堂)을 가득 메웠으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기록해 선사께서 소리로 많은 대중을 교화하였음을 밝혔다.

■거짓·과장 없으니 더욱 귀감 되리

마지막으로 탑비(塔碑)를 조성하게 된 과정을 적고, 이제 ‘명’을 지어 마무리해야 하니 치원은 ‘비록 왕명을 받아 비석에 의탁하지만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임을 밝히며 경건한 마음으로 붓을 든다.

‘입을 다물고 선정(禪定)을 닦아 마음으로 불타에 귀의했네 / 근기(根機)가 익은 보살이라 그것을 넓힘이 다른 것이 아니었네 / 용맹하게 범의 굴을 찾고 멀리 험한 파도를 넘어 / 비인(秘印)을 전해 받고 돌아와 신라를 교화했네 / (중략) / 사람은 갔어도 도는 남았으니 가신 님 끝내 잊지 못하리라 / 상사(上士·재가불자를 말함)가 소원을 말하니 임금이 은혜를 베푸셨네 / 법등(法燈)이 온 나라에 전해졌고 불탑이 산봉우리에 우뚝 서도다 / 천의(天衣)가 스쳐 반석(盤石)이 다 닳도록 / 길이 송문(松門·佛門)에 빛나리라’.

마침내 명을 다 쓴 치원은 붓을 내려놓는다. 온 정성과 힘을 다하였으니 문득 두 눈은 침침해지고 머릿속은 멍해진다. 물을 끓여 차 한 잔을 마셔 정신을 가다듬은 뒤 천천히 다시 읽으며 글씨를 살핀다. 글은 여전히 부끄러운 마음이나 과장과 거짓은 없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다행히 해서체를 기본으로 행서체의 미를 더한 글자는 모두 반듯하니, ‘광계(光啓) 3년 7월에 세우고 승(僧) 형영(夐榮)이 각자(刻字)함’을 밝힌다. 서기로는 887년이었고 본문 2470자, 글을 쓴 최치원 자신을 밝힌 54자, 전서체로 쓴 전액(篆額)의 비명 ‘당해동고진감선사비’ 9자 등 도합 2533자였다.

비가 세워질 무렵인 7월 5일, 왕께서 즉위 2년 만에 승하하니 시호를 정강(定康)으로 하였다. 뒤를 이어, 앞서 승하한 헌강왕의 누이동생 만(曼)이 즉위하니 신라 51대 왕이자 세 번째 여왕으로 최치원을 매우 아낀 진성왕(眞聖王)이다.

■名文보다 더 빛나는 것은 고운과 진감의 원융

   
진감과 치원
뒷날 조선의 한 유학자는 치원이 승려의 비명을 지은 것을 비판하면서도 ‘이 나라 문장은 공으로부터 시작되고, 우리나라 학사 중에 공이 첫머리라네’라고 칭송했다. 또 다른 유학자는 ‘고운은 이름난 학사이고 진감선사는 성스러운 승려이다. 도덕이 당시에는 이들에게 의지했는데, 문장이 후대에는 없어지고 말았구나. 어루만지며 한 차례 낭랑히 읊조리니 가슴속이 밝고 신선해짐을 느끼네’라고 비문의 아름다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일반의 지식으로 그 문장에 온전히 감동하기에는 시대와 용어가 크게 다르다. 다만 유학자로서 왕명을 받아 불가의 승려를 대함에 스스럼이 없는 것은 놀랍고 빛난다. 부족하거나 교만해서가 아니라 두루 깨우침으로 선사의 큰마음을 바로 읽은 그 빛남이다. 선사도, 치원도 불교나 유학에 얽매이지 않아 모두 끌어안는 원융(圓融)으로 서로 통한 것이 하필 두 물줄기와 바위가 만나는 쌍계라니, 이 얼마나 기이한 인연인가! 오늘 화개장터의 어우러짐도 그때 이미 시작된 필연이라면 쌍계사는 그 약속의 증거일지니 찾는 걸음을 자주해도 좋을 일이다.

김정현·소설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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