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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부마항쟁 보고서 <1> 프롤로그

경찰조서·일부 증언 국한된 기록… 항쟁 주체 목소리가 없다

  • 국제신문
  • 김화영 기자 hongdam@kookje.co.kr
  •  |  입력 : 2018-08-30 19: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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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서
- 투쟁선언문으로 촉발된 항쟁
- 이후 40년간 재구성한 사료들
- 진상조사 보고서마저 편파적

- 민주화 울부짖던 대학생들과
- 음료수·김밥으로 응원하던 시민
- 그날의 ‘진짜’ 이야기 다시 쓰다

“10월 16일 부마항쟁을 주도한 전도걸 엄태은 등 7명의 멤버 이야기가 빠졌다. 항쟁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기술됐다.” 정광민(60) 씨 이야기다. 부산대 경제학과 2학년이던 그는 1979년 10월 16일 부마항쟁을 시작했다. 항쟁을 기술한 여러 자료에는 전날인 15일 시위를 주도한 그룹이 계획 실행에 실패하자, 우연히 정 씨가 16일 집회 개최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 씨는 “유신 비판 등 시국토론을 7명 멤버와 오랜 기간 벌여왔기에 언제든 선언문을 쓰고 항쟁을 주도할 준비가 돼 있었다”고 말했다.

부마항쟁 사료와 관련자 증언이 턱없이 부족하다. 지난 2월 발표된 ‘부마항쟁 진상조사결과 보고서(초안)’도 ‘범죄사실자료’ 등 경찰이 피의자 조사과정에서 수집한 내용에 의존해 편파적으로 작성됐다는 지적이 일었다. 항쟁 주체인 학생과 도심 시위에 가담한 시민의 증언이 불충분하다. 1979년 10월 부산에서 항쟁을 목격하고 참여한 장삼이사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진짜 부마항쟁’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기록들

   
부산 도심을 꽉 채운 부마항쟁 시위대의 행렬.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김탁돈 소장 제공
핵심 관련자의 증언과 당시를 기록한 자료를 보면 뜨거웠던 그때를 알 수 있다. 자료는 부산대 총학생회가 1985년 펴낸 ‘거역의 밤을 불사르라’, 부산대민주화추진위원회의 ‘새벽함성’ ‘부마항쟁진상보고서’ 등을 참고했다.

1979년 10월 전부터 부산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서울 이화여대생이 부산대 남학생에게 소포를 보냈는데, 남자 성기 그림과 가위가 들어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부산대는 ‘유신대학’(유신에 저항 못 하는 대학)이라는 자조가 만연한 가운데 자존심까지 상했다.

유신 선포 7주년인 17일엔 뭐가 터져도 터질 조짐이 일었다. 신호탄은 15일. 이진걸(59·당시 부산대 기계설계과) 씨는 친구들과 전날 ‘민주투쟁선언문’을 작성해 1000부를 등사하고, 15일 오전 10시 운동장 스탠드와 교내 전역에 뿌렸다. 이날 10시까지 도서관에 모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선언문 배포시간이 늦어져 집결한 이들 수가 100여 명에 그쳤다. 이날 항거는 흐지부지 끝났다.

정광민 씨는 이 소식이 안타까웠다. 친구들과 유신헌법 철폐 등 7개 촉구 내용이 적힌 선언문을 다시 작성해 밤새워 등사했다. 정 씨는 다음 날인 16일 오전 10시 경제학과 ‘화폐금융’ 시간에 선언문을 배포하며, “도서관으로 가자”고 호소했다. 수십 명이 ‘통일의 노래’와 ‘기다리는 마음’을 부르며 따라나섰고, 전날 시위에 나서려 했던 그룹이 함께 이들을 이끌면서 인원은 점점 늘었다.

■부산을 뒤덮은 민주화 열망

   
옛 부산시청 앞에 대기 중인 장갑차.
정 씨는 도서관에서 선언문을 낭독했다. “모든 정당한 비판과 오류의 시정을 요구하는 순수한 의지를 반민족 행위 운운하면서 무참히 탄압하는 현 정권의 유례없는 독재. 이러고도 우리 젊은 학도는 사회 문제에 방관만 할 것인가.”
시위대가 도서관에서 본관을 돌아 운동장으로 들어가니 400m 트랙이 완전히 대열로 채워져 5000명 이상이 결집했다. 학생들은 교수와 수위, 경찰이 막아선 포위망을 뚫고 온천장 쪽으로 행진했다. 시민은 음료수와 김밥을 나누며 이들을 응원했다. 고속버스와 택시기사들은 교통이 차단됐음에도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유신 철폐’의 외침은 이날 오후 중구 국제시장, 용두산공원 일대로 번졌다. 동아대와 고신대 학생도 가담했다. 수백 명이 한곳에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게릴라 방식으로 시위가 전개됐다. 어두워지면서 시민 참여의 열기는 더 거세졌다. 가정교사와 배달원, 다방 주방장 등이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이다 경찰에 구속됐다.

   
유신정권의 포고문을 읽는 부산시민들.
동아대 시위를 주도한 유덕열(정외과·현 서울 동대문구청장) 씨는 “친구들이 말렸지만, 가슴에 쌓인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부마항쟁은 자발적 민중운동이자, 유신을 끝내려는 열망이 응축된 국민의 저항이었다”고 말했다.

17일 시위는 더 거셌다. 부산대 학생의 봉기 소식에 자극받은 동아대생들이 적극 가담했고, 경찰서와 언론사 등 기관이 습격을 받았다.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고, 공수부대가 투입돼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곤봉에 맞아 중상을 입는 이들이 속출했다. 항쟁은 마산으로 옮겨 다시 불을 지폈다. 부산에서는 1058명이 연행돼 6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고, 마산에서는 505명이 연행돼 59명이 군사재판을 받았다.

김화영 기자 hongdam@kookje.co.kr

부마항쟁 진행 과정

1979년 10월 14일

이진걸 등 ‘민주선언문’ 제작 및 등사

1979년 10월 15일

오전 10시

본관 강의실, 상대 강의실 등에 ‘오전 10시 도서관 집결 요구’ 민주투쟁선언문 배포. 100명이 도서관에 집결했으나, 시위 주도자 등이 없어 해산

오후 2시 

정광민 16일 시위 모의, 다음 날 새벽 늦게까지 ‘선언문’ 등사

1979년 10월 16일

오전 10시

정광민 등이 상대 강의실 들어가 선언문 배포, 오전 10시까지 도서관에 집결 요구, ‘통일의 노래’와 ‘애국가’ 등을 부르며 학생 1000여 명이 도서관에 집결. 전광민 선언문 낭독. 학생들 어깨동무하고 “유신철폐” 등 외치며 정문 앞으로 행진. 5000명 집결

오전 11시

담을 넘는 등 경찰 포위망 뚫고 온천장 쪽으로 행진. 시민들의 응원. 부산 도심권 시위 확산

오후 2시

옛 부산시청 앞으로 학생들 모이고, 중구 부영극장 앞으로 시위대 집결, 광복동 남포동 전역 시위 확산

오후 5시

상인과 노동자 등 일반 시민이 대거 참석, 본격적인 민중항쟁 발전

1979년 10월 17일

오전 10시

기관장 등 2500명이 유신 7주년 행사를 치름, 경찰 부산대 등지에서 주동자 색출 작업, 부영극장 앞 학생들과 상인 수천 명이 모여 유신 반대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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