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 마음이 참 간사한 것 같아
- 그때는 오가면서 우리를 올려다보며
- 부산의 지킴이·상징이라 치켜세우더니
- 그래도 누군가는 우리를 기억하고
- 새로운 광장에 세워주면 좋겠어”
- 길고 긴 유폐의 나날을 견딘 청동상은
- 자신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시민들에
- 가끔 화가 나기도 했지만 희망을 품었다
1963년 부산직할시 승격 기념으로 건립된 서면 부산탑. 60~70년대 부산의 상징적 구조물로 시민들 사랑을 받았던 부산탑은 도시철도 1호선 공사 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1981년 철거됐다. 탑 잔해는 트럭에 실려 교외에 버려지고, 탑 중간에 있던 자유의 횃불을 든 남녀 청동상만 부산박물관으로 옮겨져 창고에 처박혀 있다가 복원작업을 거쳐 7년 여전에야 박물관 앞뜰에 다시 세워졌는데. 어둠이 내리면 ‘박물관은 살아있다’는 어느 영화처럼 유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상편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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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시립박물관 야외에 세워진 남녀 청동상을 아이들이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다. 서정빈 기자 photobin@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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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신 중앙에 위치한 자유의 횃불을 든 그와 소녀, ‘남녀 청동상’은 부산의 영원한 번영과 부산사람의 발전을 기원하는 시민정신을 담았다고들 하는 소리를 그는 귓전으로 들었다. 그녀가 높이 치켜든 횃불은 정의와 전진을 상징한다고도 했다. 어쩌면, 그 몇 년 전 이 나라를 뒤흔든 ‘4·19 의거’의 함성이 소녀의 횃불에 담겼는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만든 조각가의 이름이 박칠성이란 것도 그는 나중에 들어 알았다. 하고보면 그이가 그 두 사람의 아버지인 셈이었다. 목각인형 피노키오를 만든 아버지가 제페트였던 것처럼.
그들이 서면 한 가운데 버티고 섰던 1960년대 초반은 말하자면 부산의 전성기였다. 6·25 전쟁기에는 임시 수도로서 기능을 수행하면서, 원조와 무역이 부산항을 중심으로 진행돼 산업이 급격히 발전했다고 했다. 동명목재 같은 공장도 들어섰고 섬유, 제분, 제당 등 이른바 삼백 산업이 활기를 띄었다고 한다. 1953년 설립된 제일제당은 전국 설탕 생산의 60%를 차지했고, 극동제분, 조선제분 부산공장, 신한제분, 남선곡선 등이 국내 생산의 40%를 차지했다고도 했다. 면방직, 인견 직물 공장이 설립되면서 지금의 부전동과 전포동 복개천 주변은 섬유 공장으로 가득했다고도 한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부산의 제조업은 새롭게 전환됐다고 했다. 견직물과 면직물 생산에 집중됐던 섬유 업계는 나일론 생산으로 전환을 시작했고, 1960년대 대표적인 종합 기계 공업인 자동차 공업의 신진공업사가 부산진 공장을 준공했는가 하면 1962년엔 금성사가 온천동에 생산 공장을 확장했을 무렵이었다. 신발, 섬유, 합판 산업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고 했다. 1963년 1월 1일에는 부산시의 정부 직할시 승격이 확정되었다는 소리도 오가는 시민들에게서 들었다. 이를 기념해 1962년 12월 1일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는데 기념식에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장을 비롯한 정부요인, 재부기관장, 부산상공인과 시민 2만여 명이 참석했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부산탑이 들어선 것은 부산이 산업의 기지로서 활기를 띤 그 시절, 부산 사람의 자신감과 자부심의 반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번영과 발전의 상징이 바로 그와 소녀상이었던 셈이다.
부산탑이 개막됐을 때의 일을 그는 지금도 잊지 못했다. 날짜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1963년 12월 14일 초겨울이었다. 준공식에는 김현옥 부산시장, 강석진 부산상공회소 회장이라든가 하는 높은 사람들과 수많은 시민들이 참석했었다. 서면 로터리에 몰려든 수만 명의 시민들은 탑을 쳐다보며 경이와 찬탄의 목소리를 냈다.
“야, 탑 한번 장대하구나. 역시 부산의 상징답군.”
“어머, 저 청동상의 다리 근육 좀 봐. 울퉁불퉁한 게 정말 사내답게 보이는군.”
“저, 소녀상은 또 어떻고…. 하늘에서 내려온 아프로디테 같지 않아?”
그 소리를 듣고선 흐뭇해져서 그가 슬쩍 옆에 선 소녀를 돌아보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볼이 발개졌었지.
어쨌든, 그들은 부산의 명물이 되었다. 서면 거리를 오가던 시민들은 걸음을 멈추고 눈부신 듯 그들을 올려다보곤 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가던 어떤 부부는 아이를 무등 태워 그들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게 하려고 발뒤꿈치를 들기도 했다. 인근의 시골 사람들도 부산에 오면 반드시 탑을 한번은 보고가야 한다고들 했다. 로터리에선 자동차가 쉴 새 없이 달리고 탑신 아래론 전차가 달리던 그 때가 부산의 호시절이자 그들의 전성기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행복했다. 세계의 오래된 도시엔 그 도시를 상징하는 동상이 한 두 개쯤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코펜하겐의 인어공주상, 로마의 늑대동상, 그리고 영국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동상…. 글쎄, 한 도시 시민의 사랑을 받는 조형물이 되어 시민들에게 희망과 꿈을 선사한다는 것,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은가. 자신들이 바로 그런 존재라는 게 그는 자랑스러웠다. 이따금 비둘기가 날아와 어깨에 앉기도 했지만 그는 그게 조금도 성가시지 않았다. 그래, 나와 이 여자는 이 도시의 수호신이 아닌가.
그런데…….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이 그 도시의 상징물로 자리 잡은 지 20년이 채 못 된 1980년 그 도시에 지하철이 생겼기 때문이다. 1980년 10월 20일 부산지하철 1호선 건설 기공식이 서면 로터리에서 열렸을 때 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걸 아직도 그는 기억한다. 그때 그는 뭔가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글쎄, 도시가 커진 만큼 지하철이 필요해졌다는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아니, 지하철은 도시의 또 다른 번영의 상징이기도 할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발밑에서 벌어지는 성대한 기공식을 보면서 그것이 자신들의 운명과 연관관계가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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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후반의 서면 부산탑 모습. 타원 안이 남녀 청동상이다. 국제신문DB |
그 예감은 적중했다. 서면로터리가 지하철 공사의 장애가 된다는 말이 흘러나오더니 로터리를 없앤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부산탑도 당연히 철거돼야 할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설마 했다. 부산을 상징하는 탑이니 그렇게 손쉽게 부수지는 못할 것이라고…. 관료들이란 사람들도 그렇게까지 무지막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의 오해였다. 그들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어느 날 기습하듯 크레인을 동원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한 떼의 사람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느라 부산을 떨더니 곧바로 크레인에 매단 커다란 추를 움직여 탑신을 강타했다. 돌먼지가 풀썩 솟구치더니 23m의 탑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와 소녀도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게 길고 긴 유폐의 시작이었다.
“오빠,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해?”
박물관 뒤 숲 그늘을 돌 때 어둠 속에서 소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대답 없이 빙긋 웃고만 말았다.
“글쎄…….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우리가 서면 로터리 앞에서 오가는 시민들을 내려다보며 당당히 서 있던 그때 말이야.”
그러자 그녀가 뾰로통한 목소리가 되었다.
“흥, 그때 생각하면 뭘 해. 다 지나간 일인데. 그건 그렇고 사람들의 마음이란 게 참 간사스러운 것 같아. 그때는 오가면서 우리를 올려다보며 부산의 지킴이라느니 부산의 상징이라느니 치켜세우더니 이젠 우리가 여기 처박혀 있는 것도 모르고 있으니…”
“하긴 뭐 사람들이 다 바쁘게 사느라 우리를 잊은 거지. 요즘 사람들 세상살이가 보통 힘들어야지.”
“그래도 나는 가끔 화가 나.”
문득 그의 머리에 소녀에게 건넬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너, ‘행복한 왕자’ 이야기 알지?”
“……그게 뭔데?”
“오스카 와일드란 사람이 쓴 동화 말이야. 그게 이런 이야기잖아. 어떤 도시의 광장에 말이야, 높이 솟은 기둥 위에 보석들로 치장한 행복한 왕자 동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동상을 찬미하지. 어느 겨울날, 따뜻한 나라로 가지 못한 제비가 동상 위에서 쉬다가 행복한 왕자의 눈물을 보는 거야. 왕자는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비참한 도시의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며, 제비에게 자신을 도와줄 것을 부탁했지. 제비는 남쪽 나라에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도 왕자가 들고 있던 칼자루의 루비를 아픈 아이에게 물어다 주고, 가난한 작가와 성냥팔이 소녀에게 눈에 박혀있던 사파이어를 가져다 주는 거지. 몸을 덮고 있던 금 조각들도 모두 떼 내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거야. 왕자의 모습은 점점 초라해져 가고, 심부름을 하던 제비는 얼어 죽고 마는데, 이제는 볼품 없어진 행복한 왕자 동상을 시의원들은 아예 녹여 버리기로 한 거야. 그때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이 천사에게 도시에서 가장 귀한 두 가지를 가져오라고 명령했지. 천사는 주저 없이 끝내 녹지 않은 행복한 왕자의 납 심장과 죽은 제비를 가져다 바친다는 거야.”
“그럼…… 오빠는 우리가 그 행복한 왕자와 같다는 거야?”
“글쎄, 뭐 꼭 그렇다기 보다는… 천사가 왕자의 심장과 제비의 시체를 하느님께 바친 것처럼 누군가는 우리를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기억하면 뭘 해. 우리는 여기 이 구석에 계속 처박혀 있어야 하는 걸.”
“그래도 꼭 서면 로터리가 아니라도, 언젠가는 어디 새로운 광장이 만들어질 때 우리를 다시 데려다가 그곳에 세워줄는지도 모르지.”
“그래,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
“뭐, 그렇게 되지는 않는대도 사람들의 마음에 우리가 살아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게 아닐까.”
“그래 뭐……근데 사람들은 그걸 알고나 있을까.”
“무얼?”
“우리의 몸은 딱딱한 청동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청동 피부 속엔 자기네들과 똑같이 뜨거운 심장이 뛰고 있다는 걸.”
“글쎄, 안다면 좋고, 모른대도 할 수 없고… 자, 이젠 시간이 다 됐다. 얼른 돌아가야지.”
그는 소녀와 함께 좌대로 돌아왔다. 꼬마 나한상은 어느새 실내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꼬마 나한을 쫒아 다니던 문인석상은 근엄한 모습으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영암사지에서 온 쌍사자도 시치미를 떼고 석등을 받치고 서 있었다. 소녀가 횃불을 집어 들었고 그들은 다시 좌대에 올라 원래 포즈대로 섰다. 소녀가 콜록하고 기침을 했다.
“너 추운가 보구나. 감기 들겠다.”
“아냐, 이제 곧 해가 뜰 텐데 뭐.”
그때 희부연 하늘 한끝에서 뭔가가 나풀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소녀가 탄성을 냈다.
“오빠, 눈이 오나 봐.”
정말이었다. 이 도시에선 흔치않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처음엔 한 올, 두 올 성기게 떨어지던 눈이 곧 제법 굵은 씨알이 되어 온 하늘에 흩날리고 있었다.
“이왕 올 거면 함박눈이 왔으면 좋겠다. 그럼 그게 네 옷이 돼 추위를 막아줄 수도 있을 텐데…”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근데 말야, 오빤 만약 새로 태어날 수 있다면 뭐가 되고 싶어?”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갑자기…… 글쎄, 뭐가 되면 좋을까.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너랑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거?”
소녀가 얼굴이 발개져서 소리쳤다.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망칙하게……”
“망칙하긴 뭐가…… 혹시 아니, 그때는 또 다른 조각가가 우리를 닮은 새로운 청동상을 만들어 세울지. 우리 무릎 앞에 예쁜 아기상도 하나 세우고 말야……”
“체……꿈도 야무지셔.”
입을 비쭉거리던 소녀가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히고는 쏟아지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한 계절을 넘기면 또 따뜻한 봄이 오겠지?”
“그래 또 봄이 오겠지. 그러면 이곳 박물관 뜰에도 아이들이 재깔거리며 뛰어다닐 테고……”
“그래 얼른 봄이 왔으면 좋겠다.”
바람이 휘몰아치자 눈발들이 춤을 추었다. 그것은 눈부신 희망과 기다림의 손짓이었다.
강동수 소설가·경성대 교수
※공동기획:부산시문화원연합회,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지식문화연구소 (주)리멘Li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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