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관시간 넘겨 인적없이 고요해지니
- 돌사자·고려꼬마·동래기생 등 깨어나
- 새벽 세시까지 자유시간을 만끽했다

- 앞뜰 구석에 있던 녹슨 남녀 청동상은
- 54년 전 서면 부산탑 위 우뚝 섰던 날
- 시민들이 보여준 그 찬탄을 떠올렸다

어디선가 휘잉 하고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왔다. 담장 너머 유엔 기념탑 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일었다. 아이의 손을 쥔 젊은 여자가 어깨를 옹송그리고 종종걸음 쳐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모습이 보였다. 너덧 살이나 됐을까, 엄마에게 손을 잡힌 계집아이의 잔등 위로 겨울의 성긴 저녁 햇살이 툭 떨어져 부서졌다. 박물관 앞뜰 박석에도 햇살이 흘러내렸다. 빛이 사위어 가자 조금씩 어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폐관 시간을 넘긴 박물관 앞뜰은 인적 하나 없이 고요했다. 박물관 건물 전면에 내걸린 ‘터키 문명전, 이스탄불의 황제전’이라고 쓰인 커다란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퇴근하는 박물관 직원들이 서둘러 문을 빠져나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제1회 부산시민의 날 경축 행사가 열린 1980년 10월 당시 서면 교차로 모습. 현수막 뒤로 부산탑이 보인다. 국제신문DB

이맘때면 늘 있는 풍경이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건너편 길을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이 잦아들고 가게들의 등불이 하나둘 꺼지는 것과 함께 박물관도 괴괴한 어둠에 잠길 것이다. 그러면 하루 종일 관람객들을 상대하느라 피곤했던 만덕사지 삼층석탑도, 문인석과 석조여래입상도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비로소 안식에 드는 것이다.

박물관 앞뜰 오른편 구석, 호젓한 나무 사이에 선 젊은 남녀의 청동상에도 조금씩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로마의 토가 비슷한 복장을 한 사내는 손을 불끈 쥐고선 구호를 외치는 노동자처럼 팔을 올린 모양새였고, 그 옆에 선 소녀는 그리스 여신처럼 상반신을 드러낸 채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소녀의 하반신을 가린 치맛자락의 한끝이 바람을 받아 둥글게 부풀어 있었는데 드러난 젖가슴은 잘 익은 사과처럼 탐스러웠다.

“춥지 않아?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부는데……”

사내가 소녀를 돌아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아직은 견딜 만해. 오빠는?”

“나야 뭐……. 이제 본격적인 겨울이 닥쳐오면 더 추울 텐데 어떻게 겨울을 날지 걱정이구나.”

“한두 해 겪는 일인가 뭐? 늘 그래온 걸. 그나저나 얼른 봄이 왔으면 좋겠다.”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됐는데 벌써 봄 타령이야?”

“그건 그렇지만 앞으로 닥칠 추위를 생각하면……”

소녀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저 멀리 가로등이 띄엄띄엄 선 부산문화회관 앞거리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이곳, 그러니까 박물관으로 옮겨온 세월이 얼마인가를 가늠했다. 그게 1981년 초가을이었으니까 벌써 36년 전의 일이었다. 그 오랜 세월을 이 호젓한 박물관 구석에서 줄곧 서 있었던 거다. 문득 그날의 아픔이 다시 뇌리를 스쳤다. 크레인에 매달린 무거운 쇳덩이 추가 느닷없이 탑을 쾅 하고 때리자 거대한 대리석 탑신이 한순간에 와르르 속절없이 무너지던 그 날의 충격은 세월이 아무리 가도 잊히지 않을 아픔이었다.

	부산직할시 승격 기념으로 1963년 건립 직후의 서면 부산탑. 높이 24m로 중간에 자유의 횃불을 든 남녀 청동상이 있다. 이 탑은 도시철도 1호선 건설 공사 때문에 1981년 철거됐다.

한때는 이 도시의 상징이자 자랑이었던 그 탑이 지하철 공사에 방해가 되는 천덕꾸러기가 돼 버렸다며 수군거리던 그 도시의 도시계획 공무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그 탑을 철거해버렸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시민이 알까봐 쉬쉬하며 깨진 탑의 잔해를 트럭에 실어 교외에 내다 버렸다. 청동 남녀상은 그 도시의 박물관 창고에 깊숙이 처박혔다.

사내는 바깥으로 나올 기약도 없이 캄캄한 창고에 유폐됐던 그 숱한 밤을 기억했다. 쳐들린 팔로 횃불을 쥔 채 여자가 깊은 밤 홀로 흐느끼던 기억도 생생했다. 마냥 잊고 있다가 30년 만에야 창고에서 자신들을 끌어낸 사람들이 혀를 차던 것도 생생히 기억났다.

“어휴, 이게 뭐야. 완전히 녹이 슬어 못쓰게 됐구먼 그래. 곳곳이 부식돼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우니 이게 원래 청동상이란 걸 누가 알겠어?”

“그러게 말야, 이거 복원하려면 돈 깨나 들겠는 걸.”

어쨌거나 그들이 30년 가까운 유폐생활을 마치고 복원 작업을 거쳐 해방된 것은 겨우 7년 전이었다. 구석자리일망정 그나마 박물관 앞뜰로 옮긴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고 보면 어려운 세월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소녀와 자신이 그 도시의 중심부에 우뚝 섰을 때, 제막식에 참석했던 시민들이 보여주던 그 찬탄을 기억하면 여전히 헛헛한 마음을 숨기기 어려웠다. 바람이 다시 몰아쳐 왔다. 사내는 어깨를 웅숭그리며 여자를 돌아보았다.

“그때 일 기억나?”

“무슨 일?”

“아 그때, 우리가 서면 거리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날 말이야.”

“아, 그럼 기억하지. 그게 그러니까 1963년 12월 14일이었으니까 벌써 54년이나 됐네. 그러고 보니 세월 참 빠르다. 언제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지 모르겠네.”

“그러게, 그때 제막식 테이프를 끊었던 높은 사람들은 이제 다 세상을 떠났겠군. 부모 손을 잡고 왔던 꼬마 애들도 벌써 환갑을 넘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을 테고……”

“근데, 우리는 영원히 늙지 않은 채로 아직까지 여기 서 있잖아? 그러고 보면 오빤 영원한 청년이야.”

“그러는 넌? 아직도 풋풋한 소녀의 모습인 걸.”

여자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이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 꼬마들 우리가 여기 박물관 한 구석에 아직 서 있는 건 모르겠지?”

“글쎄,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어쩌다 여기 오는 사람들도 박물관에 뭐 저런 청동상이 서 있나 하는 뜨악한 눈빛으로 지나치더군.”

사내가 연민 섞인 눈빛으로 여자를 돌아보았다.

“춥지? 내가 좀 안아줄까?”

“쳇, 무슨 소리야? 오빠나 나나 벌거벗고 있는데 망칙하게시리……”

“그럼 팔 아플 텐데 횃불 들고 있는 팔이나 좀 내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테니.”

“그럼 그럴까?”

여자가 생긋 웃으며 횃불 든 팔을 내리더니 반대편 손으로 어깨며 팔목을 주물렀다. 문득 여자가 다시 웃었다.

“오빠, 저기 좀 봐. 저 할아버지들 또 저러고 있네.”

사내는 여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내려다보다가 픽 웃었다.

희미한 각등이 비치는 박물관 뜰로 돌사자 두 마리가 이리저리 겅중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청자로 만든 고려시대의 꼬마 나한(羅漢)이 사자의 등에 올라타 갈기를 잡고 꺼떡거리고 있었다. 직원들이 퇴근한 틈을 타 실내 전시실에서 몰래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머리에 사모를 쓰고 근엄하게 관복을 입은 관원 두 사람이 사자 뒤를 쫓아 다니며 연신 외치고 있었다.

“아서, 아서! 이놈아, 사자도 좀 쉬어야지, 왜 그렇게 밤마다 괴롭혀.”

“할아버지, 사자를 타고 다니면 얼마나 재밌는데 그래요. 할아버지도 한번 타보세요.”

“너,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이놈아 제발 멈추란 말야.”

그러거나 말거나 꼬마 나한 녀석은 배시시 웃으며 사자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쳤다. 갈기를 잡힌 사자는 박물관의 앞 뒤뜰을 마구 내달렸다. 나한이 사자를 타고 뒤편 뜰로 사라지자 관원 두 사람은 자빠졌다 일어섰다 하며 엉금엉금 뒤뜰로 나한을 쫓아 사라졌다. 팔짱을 낀 석조여래입상이 그 꼴을 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에구, 저 녀석은 왜 저리 사고뭉치일까. 저번에도 사자를 타고 다니다가 박물관 앞 유리창을 깨트려 먹었잖아”

“뭐, 저도 갑갑했겠지 뭐. 그러고 보면 유물들도 좀 안됐긴 해. 하루 종일 부동자세로 전시실 유리 상자에 갇혀 있어야 하니……”

	부산탑 건립 당시 하늘에서 촬영한 서면 로터리 일대.

밤 열 두 시부터 새벽 세시까지 세 시간이 박물관 유물들의 자유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꼿꼿하게 서 있던 문인석이며, 돌부처들이 그 시간만 되면 마법에 걸린 듯 다들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는 사람이 되어 박물관 뜰을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박물관은 살아 있다’라던가, 뭐라던 어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쌍사자석등의 사자들도 하루 종일 갑갑했다는 듯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곤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실내에 있던 가야와 신라, 조선 시대의 토우와 토용들도 다들 살아있는 사람과 짐승이 되어 전시실을 슬며시 빠져나와선 앞뒤 뜰을 어슬렁거리곤 했다.

봄과 가을 한번 씩 박물관 뜰의 동백과 매화나무가 화사한 꽃을 피워낼 때면 심야의 무도회도 열리곤 했다. 그때는 전시실에 있던 동래기생, 수영야류패의 실물 크기 인형들도 참가해서 고운 맵시를 뽐내거나 흥겹게 그들만이 들을 수 있는 꽹과리 소리를 울리곤 했다. 다들 동래기생들과 함께 춤을 추고 싶어 하곤 해서 작은 실랑이도 벌어지곤 했다.

두 개의 문인석이 규율반장 노릇을 맡아 유물들이 동네 사람들이 눈치 챌 만큼 너무 큰 소리로 떠들거나 흥에 겨워 박물관 정문 바깥까지 뛰쳐나가지 못하도록 단속했지만 오늘 꼬마 나한처럼 말을 안 듣고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유물들이 생기면 저렇게 골치를 앓는 것이다.

그리고 새벽 세시. 박물관 뜰에 희미한 새벽빛이 스며들면 마법이 풀린다. 유물들은 일제히 제자리로 돌아가 시치미를 뚝 떼고 부동자세가 되는 것이다. 따뜻한 심장과 핏줄을 돌로 만들어진 피부 깊숙이 숨겨둔 채. 박물관 직원들도 유물들이 한밤중에 뜰에 모여 야유회를 여는 것은 미처 모를 것이었다.

“하루 종일 서 있었더니 다리가 뻣뻣한데 우리도 좀 걸을까?”

사내는 소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녀는 손에 쥔 횃불을 좌대 앞에 얌전히 놓아두고 사내의 팔짱을 끼었다. 건물 사이 뒤뜰로 통하는 숲길을 걸으며 사내는 소녀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거의 60년 전이었다. 어느 조각가의 야외 작업실에서였다. 점토로 조상을 빚어 그걸 다시 석고상으로 만들고 이어서 거대한 거푸집이 만들어졌을 때 구리와 주석 덩어리였던 그는 펄펄 끓는 청동 쇳물이 되어 거푸집 속에 부어졌다. 온몸이 녹아드는 고통을 이겨내고 거푸집에 스며들어간 그는 마침내 조각가가 거푸집을 망치로 깨트렸을 때 완강한 허벅지와 팔뚝을 가진 건장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는 용광로에서 쇳물로 녹아들 때의 고통을 이기고 재탄생한 자신의 모습에 만족했다.

그리고…. 자신의 바로 옆에 횃불을 높이 치켜든 소녀를 발견했을 때 느꼈던 그 경이의 순간을 지금도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눈을 막 뜬 소녀가 그를 처음 보고 생긋 웃었을 때 느꼈던 그 벅찬 감동과 환희를 어떻게 잊겠는가. 글쎄, 아담이 처음 이브를 봤을 때도 그랬겠지. 그녀와 함께 60년의 세월을 함께 했으니 인생의 반려란 이럴 때 쓰라고 만들어진 말이 아닐는지.

짚으로 꽁꽁 묶인 그들이 트럭에 실려 도착한 곳은 부산의 서면이란 곳이었다. 높은 건물이 길 좌우로 늘어서 있고 커다란 로터리엔 하루 종일 자동차들이 정신없이 뱅뱅 돌고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인부들에 의해 마악 만들어지고 있던 아치형의 높은 탑 가운데 세워졌다. 높이 24m, 둘레 24m의 거대한 탑이었다. 아치형 탑신 아래로 땡땡땡 하는 경적을 울리며 전차가 지나갔다. 그들의 키가 4.2m이니 작은 덩치가 아닌데도 탑신 한가운데 매달리니 오히려 작아 보일 정도였다.

탑 공사를 하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어서 알게 된 것이지만 그 탑 이름은 ‘부산 재건의 탑’이라고 했다. 부산이 1963년 1월 직할시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여 건립됐다는 거였다. 서면로터리 한가운데 우뚝 선 부산의 상징인 이 탑은 위쪽에 부산이라는 머리글자를 상징하는 ‘ㅂ’자 모양을 형상화했고, 그 ‘ㅂ’자 상부에는 ‘오륙도 형상’을 가로로 본떠 넣었다고도 했다. 초석에는 이런 건립문도 붙여졌다.

‘이 탑은 넓은 바다와 맑은 하늘의 복과 덕을 입어 자유와 평화에의 굳은 신념으로 새로이 출발한 직할시 부산의 영원한 번영과 자손만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온 시민의 정성으로 모아진 것이다’. -하편에 계속-

강동수 소설가·경성대 교수

※공동기획:부산시문화원연합회,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지식문화연구소 (주)리멘Li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