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무는 뒷전이고 고기 달라는 찰방
- 우월한 지위로 아이에게 몹쓸 짓까지
- 분노한 사람들 횃불 들고 몰려와
- “나리, 도망가던지 불에 타죽던지요”
- 연수는 망설임없이 아궁이로 향했다

옛날 한양으로 올라가는 황산도(동래에서 밀양까지 뻗은 길)의 중심 역참이었던 황산역(양산시 물금). 갓 부임한 찰방이 책임자로서 정무는 뒷전이고 맨날 방에 틀어박혀 음식 탓만 하자 아랫 사람들의 불만은 커져갔고. 그로 인해 가뜩이나 죽마고우였던 바우가 노비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마음이 뒤숭숭하던 이방 연수만 위아래를 챙기랴 소산역(부산 금정구 하정마을) 등 관할 속역을 돌보랴 동분서주하는데…(상편 줄거리)

조선시대 소산역으로 불리운 부산 금정구 선두구동 하정마을 입구의 비석 2기. 오른쪽이 청렴하고 덕망이 높아 이방에 그친 것이 아깝다며 상급 관리자들이 1697년(숙종 23) 세운 이방 최연수(崔延壽) 송덕비다. 왼쪽은 암행어사 이만직의 공로를 칭송한 영세불망비(고종15).

찰방 나리, 이방이옵니다. 명을 내린 지가 언젠데 이제야 나타나는 게요? 급히 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조금 늦었습니다. 찰방은 못마땅하다는 듯 이맛살을 구겼다. 찰방은 누웠다가 점심상이라도 받았는지 방 한쪽에는 이불이 구겨진 채 펼쳐져 있었다. 해가 중천인데도 등청을 않고 밥만 축내는 것이 마뜩찮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상 위에는 부탁했던 닭고기가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도 별반 살점이 뜯겨나가지도 않은 상태다. 입맛이 당기지 않아 그런 건가. 연수가 넌지시 묻고 나선다. 특별히 부탁해 올린 음식인데 맛이 없으십니까, 나리? 이방이 한번 먹어보시오, 이게 고긴지 나무토막인지. 찰방이 젓가락으로 닭고기를 두들겨 대더니 다시 입을 연다. 내가 원래 이빨이 좋지 않은데 이런 걸 먹으라고 내놨으니 이걸 어떻게 먹는단 말이오. 질기다면 다시 푹 삶아오라고 하겠습니다. 관두쇼, 다시 삶는다고 나무토막이 말랑말랑해지겠소? 찰방은 젓가락을 내던지고서는 다시 자리에 누워버린다. 이러니 내가 기운을 차릴 수가 있나, 원. 말이 고까웠지만 연수는 참았다. 혹여 입맛이 돌지 않으신다면 다른 걸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찰방이 떡 상체를 일으켜 세우더니 입을 연다. 꽃잎처럼 연한 고기라도 먹으면 기운을 차릴 수는 있을 듯하오만. 꽃잎처럼 연한 고기라면 혹시? 맞소, 그런데 그런 게 여기서 구할 수가 있으려나. 순간 연수의 입에서 어금니가 갈리는 소리가 났지만 참았다. 일 년에 한 번 구경할까말까 하는 쇠고기를, 그것도 생고기 꽃등심이라고 콱 꼬집어 말하다니. 그리 비싼 음식을 먹으려고 돈을 낭비했다가는 역참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쫄쫄 굶을 수 있다. 작년 홍수로 인해 제방 보수한 품삯마저 지급하지 못하는 형편이잖은가. 부임했으면 그런 재정사정도 살피고 해야 하는데 재 뱃속부터 채울 생각만 하고 있으니 답답할 수밖에. 그렇다고 이제 막 부임한 찰방의 심기를 건드리고 나설 수도 없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다.

이방 나리, 제가 소산역에 다녀오겠습니다요. 말고삐를 쥔 채 마부영감이 했던 말을 또 하고 나섰다. 아닐세, 볼일도 있고 하니 내가 직접 다녀오겠네. 연수는 고삐를 건네받자마자 말 등에 올라탔다. 그러자 말이 제 앞발을 들어 올리며 히히힝, 힘차게 울었다. 이랴, 연수가 말의 뱃구레를 발로 차자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남문을 빠져나오자 누런 들판이 두 눈을 가득 채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이 노란색이라 했던가. 누구나 할 것 없이 같은 색으로 물들어 서로 어깨를 겯고 바람에 맞춰 춤추는 벼들. 그들에게는 잘난 놈도 못난 놈도, 위도 아래도 구분이 없다. 그야말로 수평세상이다.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은 없는 세상, 그게 바우가 꿈꾸던 세상이 아니던가. 연수는 본다, 저 들판 가운데서 그와 바우가 함께 장구와 꽹과리 장단에 맞춰 춤추는 모습을. 그런 상상 덕분일까. 논을 건너온 바람결에 향긋한 막걸리 냄새가 나는 듯도 하다. 들판의 아름다운 색은 산중에도 번지고 있다. 울긋불긋 수놓은 듯 각종 수목이 어우러져 펼쳐내는 저 계절의 장관. 그런 아름다움이 인간 세상에도 펼쳐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깊었던 것일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말은 어느새 언양 덕천을 지나 사밧재 고갯마루를 치닫고 있다. 그제야 연수는 말도 쉬게 할 겸 비석거리 앞에서 말고삐를 죄었다. 고개 아래로 펼쳐진 역전 들판이 내려다보였다. 저 역전 언저리에 소산역이 위치하고 있다. 소산역에는 대마 한 필, 중마 두 필, 짐 부리는 복마(卜馬) 일곱 필이 늘 대기 중이며, 역전을 관리하는 역노들이 산다. 수명이네를 그곳으로 보낸 것도 그런 연유다. 동병상련이라고, 같은 신분끼리 모여 살면 마음만은 편안할 것 같아서. 하지만 그런 연수의 배려와는 달리 수명이 어미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이 모든 일이 연수의 뜻대로였을 뿐, 수명이네의 처지는 생각지 못했다. 왜 그때 수명이네의 말을 한번 들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수명이네 얼굴에 웃음기가 남아 있었을까.

부산 금정구 부곡동 공수물공원에 있는 동래부사 민영훈 송덕비. 이곳 일대엔 과거 동래부의 물자를 조달하는 공수전이 있었다.

소산고개 아래가 떠들썩하다. 주막에는 봇짐과 등짐을 한 장사치들로 북적이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열사흘, 감동장(구포)이 열린 날이기도 하다. 소산에는 주막뿐만 아니라 대장간과 푸줏간도 있다. 고래로부터 물이 넉넉해 소나 말과 같은 짐승 키우기에는 맞춤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양민들까지 모여들어 큰 마을을 이루고 말았다. 마방 앞에 다다르자 수염이 허연 노인 하나가 알은 체를 하며 나선다. 최 이방이 여긴 웬일이야, 마방 점고는 며칠 뒤라면서? 노인은 황산역에서 색리를 맡았다가 물러나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는 중이다. 늙은이들이 햇볕바라기 하기에는 소산이 제격이라나. 그도 그럴 것이 소산마을은 정남향에 위치한 데에다 뒤쪽의 소산이 담처럼 마을을 에워싸고 있어 겨울에도 추위를 잊고 지낼 만하다. 그러니 명당이 따로 없다. 볼일이 있어 나섰다가 잠깐 들렀습니다, 푸줏간에 고기도 끊을 겸 해서요. 왜, 신임 찰방이 벌써부터 고기타령을 하는가? 어르신도 참. 그래놓고 얼른 마방 별채부터 살핀다. 하지만 수명이네의 그림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 수명이네는 어디 갔습니까? 수명이 어미한테 무슨 볼일이 있는가? 수명이 때문에 물어볼 게 있어서요. 수명이네가 가면 어디 갔겠나, 다들 역들로 몰려가 피 뽑고 도랑 치느라 바쁘니 거기 참이나 이고 갔겠지. 하긴 추수가 낼모레니 소산에서 제일 바쁠 때가 지금이긴 하다. 수명이도 따라갔습니까? 아니, 조금 전까지 마방 앞마당에서 글씨 쓰면서 놀고 있었는 걸? 그래요? 근데 어르신이 보기에도 수명이가 글씨를 제법 쓰긴 하던가요? 왕희지가 따로 없다니까, 그게 다 자네 덕분이겠지마는. 저야 뭐 천자문 몇 자 가르친 거밖에 없는데요, 뭘. 그러니까 하는 얘기지, 이 사람아. 색리영감의 말처럼, 수명은 천한 신분만 타고나지 않았다면 과거제도를 통해 입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 아버지처럼 역노라는 신분이 수명이로부터 모든 기회를 박탈해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우처럼 삶을 포기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글자를 익혀야 세상의 모순을 알게 되고 그 모순을 알아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신분의 굴레도 인간이 만든 제도의 결과물이라면 그 제도 또한 언제든 혁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세상이 천지개벽이라면 그런 천지개벽이 오지 말라는 법도 없잖은가. 그런 것을 깨우칠 때까지 연수는 수명에게 글자를 익히게 할 것이고 글을 읽게 만들 것이다. 그게 바우가 연수에게 남기고 간 마지막 부탁인 셈이니까.

바우의 제삿날을 핑계 삼아 수명이네에 오긴 했다. 하지만 정작 집에 아무도 없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빈 과부집에 계속 버티고 있을 수도 없잖은가. 푸줏간에서 끊은 고기 몇 점과 미리 챙겨온 쌀 한 됫박을 마루에 놓고 돌아섰다. 들른 김에 수명이네 얼굴이라도 봤으면 좀 좋을까. 아직 가슴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사람. 만나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을 남몰래 그리워하며 사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를 사람들은 모르리라. 아쉬운 걸음으로 역참으로 돌아오니 공방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무슨 화날 만한 일이라도 있는가? 나 참 형님, 내동헌에서 신임찰방이 불러서 갔다 왔지 뭡니까. 그래서? 찰방이 하는 말인즉 내일 당장 마방을 옮기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마방을 옮기라니, 대체 그 이유가 무언가? 그게 참, 기가 찹니다요. 공방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잇는다. 글쎄, 그게 냄새가 나서 잠을 못 자겠다는 겁니다. 뭐라, 냄새 때문에 잠을 못 자서 마방을 옮기라고? 역참에 말 냄새가 나는 건 당연한 것, 찰방으로 부임한 사람이 할 소린가.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연수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요구였다. 더군다나 지금이 어느 때인가. 가을걷이가 끝나면 곧 겨울이 닥치지 않는가. 옮기려면 좀 더 기다렸다가 봄에 옮기든지 해야지. 그렇다고 마방 하나만 덜렁 옮긴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것도 아니잖은가. 건초창고며 퇴비장 그리고 말이 마실 우물까지 새로 파야 한다. 이런 대공사를 신임 찰방은 막무가내로 다그쳤으니 난감해 할 수밖에. 내가 내일 참방에게 저간 사정을 얘기할 테니 이쯤해서 공방은 퇴청하게, 벌써 날이 어두워졌네. 그러고는 공방의 등을 떠밀었다.

공방을 보내놓고 서류 몇 가지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저녁상이 내동헌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연수도 퇴청했다. 하지만 집이라고 해서 편안한 곳은 아니었다. 아내가 없으니 모든 게 온기를 잃은 듯했다. 아내와 사별한 지 삼 년째라 적응할 때도 지났건만 이상하게 시간이 흐를수록 더 외롭기만 했다. 그래서 더 수명이네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도 이제 늙었다는 뜻일까. 그러고 보니 역참에 역리 일을 본 지도 어언 이십 년이 넘었다. 관례대로라면 이제 물러날 때가 되었다. 연수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방 직에서 물러나면 소산역으로 노모를 모시고 갈 생각이다. 색리의 말마따나 노후를 보내기에는 소산이야말로 제격이니까. 게다가 수명이네까지 곁에 둘 수 있으니 벗 삼아 즐겁게 늙기 좋은 곳이 아닌가. 그런 생각 탓인가. 잠이 오지 않는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고 있는데 밖에서 다급하게 연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방문을 열었더니 역참의 급부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다. 아니, 이 밤중에 무슨 일이냐? 나리, 공방께서 속히 역참으로 오시라는 당부이십니다. 공방이 왜? 자세히는 모르오나 내동헌에서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내동헌이라면, 그럼 신임찰방에게 무슨 일이 있단 말이냐? 그건 잘 모르오나 내동헌에서 볼점이가 크게 다친 건 사실이옵니다. 볼점이가 다쳐? 일개 어린 계집종 하나가 다쳤다고 사람을 부르다니. 공방이 그런 주변머리가 없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면? 연수의 머릿속에 불길함이 스쳤다. 하지만 연수는 도리머리를 쳤다. 설마 연한 순 같은 아이에게 침노 노릇을 시켰을라고. 연수가 역참의 남문 앞에 이르자 공방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달려왔다. 아니, 무슨 일이기에 이 밤중에 사람을 불렀는가? 사람들의 눈이 있으니 일단 작청으로 좀 들어갑시다. 공방이 연수의 손을 작청으로 잡아끌었다. 뒤따라 연수가 들어서자 공방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형님, 볼점이가 많이 다쳐 급히 의원을 부르긴했습니다만…. 다친 이유는 알아봤는가? 말하기 뭣하지만 하혈이 멎질 않는 걸로 봐서는. 그럼 찰방이 그 어린 것을? 그렇습니다, 형님. 연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한동안 말문을 잃고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재차 묻고 나섰다. 그나저나 볼점이네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알다뿐이겠습니까, 내동헌의 일을 제일 먼저 알린 이도 볼점이네인 걸요. 그러면서 공방은 볼점이네가 한 이야기를 연수에게 다시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볼점이네가 내동헌에 저녁상을 올리고 물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답니다. 설거지를 해놔야 퇴청을 하니 늦었지만 기다린 거라더군요. 그랬는데 너비아니까지 올린 상이라 그랬던지 찰방이 술을 자꾸 찾더랍니다. 그 바람에 관청에 걸러놓은 술도 금세 바닥이 났고요. 그래서 볼점이네가 술이 떨어져서 다시 술을 거르려면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 했더니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볼점이를 찾아 대령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볼점이네가 이유를 물었더니, 어린년이 자신을 석쇠 위의 고기로 여겼다는 거랍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군불을 이리 괄게 땔 리가 없다면서 말이죠. 찰방의 우격다짐이 기가 찼지만 볼점이네로서는 어쩌겠어요. 여식을 잘못 가르친 어미의 자신의 잘못이 크니 벌하려면 저를 벌하라며 애원하고 나섰지요. 하지만 찰방은 노기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답니다. 할 수 없이 볼점이를 데려오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데려왔더니 곧장 방으로 들게 하더래요. 그때까지만 해도 볼점이네로서는 찰방이 어린 아이를 어쩌겠느냐 싶었다더군요. 그랬는데 낮의 일을 꺼내 볼점이에게 태질을 가하더랍니다. 그 바람에 볼점이는 안에서 울고 밖에서는 어미가 우는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지요. 모녀지간에 울어대자 더욱 화가 난 찰방은 사령을 불러 마당의 어미를 쫓아내고 기어이 볼점이의 옷까지 벗겨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답니다.”

말을 마친 공방도 어처구니없는지 길게 탄식을 이었다. 연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직 초경도 치르지 않은 아이를 건드리다니. 이런 사실을 안다면 역참의 역노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뿐인가. 이런 찰방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이보다 더한 일을 벌일 수도 있다. 찰방의 성정으로 보아 능히 그러고도 남을 작자이지 않은가. 임금의 교지를 받고도 부임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겨우 한 달여 만에 임지에 와서 한 짓이 환경과 몸 탓이니 그냥 두면 또 무슨 교활함을 발휘할지 모른다. 연수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공방은 육방의 향리들을 모아주게, 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연수는 작청을 나와 마방 쪽으로 급히 몸을 틀었다. 마방영감이 꾸벅꾸벅 졸다가 인기척에 놀라 연수를 맞았다. 영감, 내동헌 앞에 말 한 마리만 대령시켜 놓으시오. 그렇게 조처한 후 연수는 내처 내동헌으로 향했다. 내동헌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하지만 달빛 덕분에 촛불을 켠 듯 훤했다. 나리, 안에 들어가서 얘기 좀 나눌까 합니다. 역시 예상대로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방문을 열자 문뱃내가 훅 끼쳤다. 연수가 나타나자 찰방은 마지못해 숟가락처럼 엎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아시다시피 오늘 밤에 역참에서 끔찍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런 책임을 응당 찰방 나리도 져야겠지요, 문제는 어떻게 지느냐 하는 방식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하고 말을 이으려는데 밖에서 이방 나리! 하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냐?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역참으로 몰려오고 있답니다요! 알겠으니 물러가 있거라. 사령을 물린 다음 연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들이 몰려온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이곳에 찰방의 편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겁니다. 게슴츠레하던 찰방의 두 눈이 커졌다. 다만 아직 선택의 기회는 있습니다, 마당의 말을 타고 북문으로 나가든지 아니면 여기 이대로 남아 불에 타 죽든지요, 저는 이제 내동헌에 불을 지르러 가야겠습니다. 그러고는 천천히 방을 빠져나왔다. 연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낮에 볼점이가 불을 때던 아궁이로 향했다. 거기서 부지깽이로 불씨를 살리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났다.

이상섭 소설가

※공동기획:부산시문화원연합회,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지식문화연구소 (주)리멘Li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