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 범어사 옛길에 있는 비석골. 5기의 비석 중 한가운데가 조엄 공덕비로 1808년(순조8) 세워졌다. 비에는 ‘승려들이 금정산성 방어에 동원돼 어려운 생활을 하고, 주변 사찰은 의승번채(義僧番債·산성을 지키는 승려의 급여를 위해 지방 관청에서 주변 사찰에 징수하던 돈’ 때문에 피폐해 있었는데 조엄이 이를 혁파하고 잡역까지 감면해 주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범어사측이 조엄 사후 그의 후손인 조중려에게 요청해 쓴 것이라 한다.)

- 동래부사로 부임해 온 조엄
- 보시정신 실천하다 입적한
- 범어사 낭백 스님 방문 열어
- 잡역 없애는 노력 등 뜻 실현
- 스님들 “그분 돌아왔다” 여겨

조선의 배불숭유 정책으로 절이 억압받을 당시. 한때 낭백스님이 수행정진하던 범어사 역시 온갖 부역으로 고초가 극심했다. 낭백스님이 많은 덕업을 쌓고 입적한 후 세월은 흘러 젊은 조엄(1719년·숙종 45~1777년·정조 1)이 동래부사로 부임해 첫 순찰지로 범어사를 찾았다. 어산교에서부터 말을 내려 절 구석구석을 살피는 등 그 모습이 이전 부사들과 다르자 스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는데… (상편 줄거리)

참선 방 뒤편에 있는 작은 방에 이르자 조엄이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현판도 없는 초라한 방의 문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으나 누가 계속 관리를 해 온 것인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조엄이 문고리를 잡아당겼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은 바람 드나들 틈 하나 없이 종이로 발리어져 아예 열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문을 여시오.” 문을 왜 발라놓았냐고 물을 것이라 예상했던 주지스님은 문을 열라는 그의 말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단호한 그의 얼굴을 보고 결심한 듯 주지스님이 문틈에 붙여둔 종이를 뜯어내었다. 조엄이 문고리를 잡고 쑥 앞으로 잡아당기자 덜커덩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좁은 방 안에 갇혀있던 수십 년의 시간이 문 앞에 서 있는 조엄의 얼굴로 와락 쏟아졌다. 조엄은 눈을 감고 그 시간들을 고스란히 받아내었다. 그것은 케케묵은 먼지가 아니었다. 조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갈던 묵향 같기도 하고 어린시절 어머니의 저고리에서 맡았던 젖내 같기도 했다. 아, 놀라운 탄성이 스님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절에 들어온 이후로 저 문이 열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스님들이 발돋움을 하며 앞다투어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텅 빈 방이 웅웅 소리를 내어 우는 듯했다.

조엄은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한가운데 입구를 봉한 서찰이 있었다. 서찰을 향해 예를 갖추려는 듯 합장을 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주지가 잠시 후 봉투를 조엄에게 건넸다. 봉투를 받은 조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갇혀있던 시간의 무게를 짐작하려는 사람처럼 봉투를 두 손으로 쓰다듬던 조엄이 마침내 입구를 열었다. 봉투 안 누런 한지에는 힘차고 단단해 보이는 필체의 일곱 글자가 자로 잰 듯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개문자시폐문인(開門者是閉門人· 문을 여는 사람이 바로 문을 닫은 사람이다)’

문밖의 스님들 입에서 다시 한 번 아,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주지스님이 조엄을 향해 큰절을 올리자 마당에 섰던 스님들이 모두 따라서 엎드렸다. 당황한 조엄이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이러시는 연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바람이 옷깃에 스치는 소리만 날뿐 가을날 해를 고스란히 받은 채 엎드린 스님들의 등은 미동도 없었다. 조엄이 먼저 입을 떼었다.

“처음 찾아오는 사찰이지만 내가 평소에 보아오던 모습처럼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이 절을 들어서기 전에 보았던 채마밭을 지날 때에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저 혼자만의 느낌이었습니다. 좀 전 서찰의 내용도 그러하고, 주지스님께서도 그러시고 마당에 엎드린 스님들도 저에게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입니다.”

조엄 공덕비

주지스님이 합장을 한 채 조엄에게 앉기를 권했다. 주지스님의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평안해져 있었다. 마당에 엎드린 스님들에게 모두 제 할 일을 하러 가라 이른 후 주지스님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입니다. 이 절에 낙안선사께서 계셨습니다.” 흠, 주지스님이 목을 가다듬었다.

“법호가 낙안(樂安)이시고 낭백(浪伯)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선사께서는 일찍이 범어사에 입산해 신심을 갖고 부지런히 수행정진 하셨습니다. 특히 보시행을 발원해 선사께서 가진 것을 모두 타인을 위해 바쳤습니다. 무엇보다 그 분은 생을 거듭하면서 서원(誓願)을 이루겠노라 말씀하시고, 살아생전 커다란 원력을 온 힘을 다하여 쌓으시고 이 방을 나서셨습니다.”

“이 방이 낭백스님께서 마지막을 보낸 곳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선사께서 말씀하시길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관리로 다시 범어사에 찾아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나리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보고 그 분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듯 하였습니다.”

“그 분의 말씀을 직접 들은 자가 있습니까?”

“노스님께서 한 분 계셨는데 작년에 입적하셨습니다.”

주지스님이 바깥을 내다보자 원우행자가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원우는 매사에 대범하게 처신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노연이 어릴 때부터 너무 심약하게 키운 터였다.

“노연보살을 모시고 오너라.”

원우가 암자 마당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노연이 나타났다. 원우가 노연의 손을 확 잡아채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나 손바닥은 땀으로 젖어 미끄덩거렸다. 원우는 손바닥의 땀을 옷에 문지르며 방으로 들어서는 노연의 뒷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낭백스님을 아시오?”

“예.”

고개도 들지 않고 노연이 대답했다. 목소리가 닮았는가? 그 분 목소리인가, 스님의 목소리가 어떠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너무 오래 산 탓인지도 모른다. 늘 너무 오래 살았다고, 이제 그만 떠나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날이 오지 않았는가, 다시 그 분을 뵙는 날이 오지 않았는가.

“그 분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느냐?”

노연은 고개를 들었다. 어산교에서 말을 내리셨다고 했다. 그리고 낭백스님의 방문을 손수 열었다는 것이다. 이 분이 아니라면 그 누구란 말인가. 콧날이 길고 귀가 크고 귓불이 쳐졌으며 눈에 힘이 있고 그 빛이 형형했다. 노연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마당에서 서성거리는 원우의 울먹임이 방안까지 들려왔다. 저 녀석을 아무래도 좀 더 강인하게 키웠어야 했다고 노연은 생각했다.

낭백스님은 다시 범어사로 돌아왔다. 몸은 다 망가져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밭을 일굴 수도 없었고, 짚신 하나 제대로 삼을 수 없었다. 범어사로 돌아온 날 법당에 들어가신 스님은 하루종일 참선에 드신 채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노연이 공양을 가지고 갔으나 스님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낭백스님께서 법당을 나온 것은 다음날 스님들의 아침공양이 마친 후였다. 낭백스님은 주지에게 스님을 모두 불러 달라고 하였다.

“나는 많은 일을 하느라 수행 정진을 하지 못했다. 내 스스로 숙명통(宿命通)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너희들이 다음 생에 나의 원력을 확인할 수 있는 세 가지의 증명을 남겨놓겠다.”

늘 땅을 울리던 스님의 목소리는 노쇠하여 잘 들리지 않았다. 노연은 뜨거운 고통을 삼키듯 침을 목안으로 힘겹게 넘겼다.

“나는 환생하여 나라의 고급 관리가 되어 범어사를 찾아오겠다. 그 때, 관리들이 말을 내리는 조계문이 아닌 어산교 앞에서 하마하겠다는 것이 나의 첫 번째 증빙이다. 두 번째는 내가 쓰던 이 방을 봉해 두었다가 그 날 내 스스로 열 것이다. 세 번째는 절의 필요 없는 잡역을 없애고 있는 힘을 다해 불사할 것이다. 그런 관리가 있거든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알라.”

스님! 신음 같은 탄성을 지르며 스님들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낭백스님은 호흡하기가 힘이 드신지 잠깐 말씀을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 육신은 굶주린 호랑이에게 보시할 것이다.”

스님! 이번엔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낭백스님은 모두를 물린 후 행자에게 지필묵을 가지고 오라고 일렀다. 한참동안 먹을 간 스님은 그동안 말라 있던 붓에 오랫동안 먹물을 묻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낭백스님이 없어진 것을 안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스님의 방은 바깥에서 봉해져 있었고, 늘 신던 짚신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스님들이 주변 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나무꾼들이 낭백스님의 옷과 짚신, 그리고 유골을 수습한 곳은 뒷산 원효암이 있는 절벽 아래였다. 그곳은 호랑이가 자주 나오는 곳이라 나무꾼들도 출입을 삼가는 곳이었다.

남은 주검을 수습하여 절에 돌아와 다비하는 날, 날씨는 서럽도록 맑았다. 연기는 끝간 곳도 모르게 하늘로 길게 피어 올랐다. 자갈로 가슴을 후벼 파듯 아팠으나 노연은 꼿꼿이 서서 낭백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호랑이에게 보시하고 남은 육신이 얼마 없어서 다비는 일찍 끝이 났다. 사리(舍利)와 영골(靈骨)이 나와서 부도에 모시느라 스님들이 웅성거릴 때에도 노연은 흐트러짐 없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늘은 스님의 흔적을 깨끗하게 지우고 가을의 청명함을 그대로 내놓았다. 그것이 마치 스님의 마음인 듯싶었다.

“…제가 그렇게 덕업을 쌓은 그 분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 분이다. 이 분이 틀림없다. 고개를 숙인 채 노연이 아퀴를 짓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낭백스님께서 입적하신 날은 하늘이 맑고 높았슴니더. 기해년 가을이었고예….”

흠칫 놀라 커진 조엄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정말 기이한 인연이군요. 기해년은 제가 태어난 해입니다. …제가 그 분의 현신이든 아니든 잘못된 것은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조엄의 눈이 날카롭게 빛이 났다. 지금까지 보여주던 온화한 모습이 아니었다. 일을 할 때 얼마나 냉철한 사람인지 알게 해주는 눈빛이었다.

“여러 스님들과 자리를 같이 해서 절의 사정을 듣고 싶습니다. 사찰의 어려운 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잡역과 부역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절에도 할 일이 많은데 매일 같은 출역으로 들볶이니 도무지 붙어 있을 수가 없어 떠난 스님들이 부지기수라 절 유지조차 곤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금정산성 보수공사와 방어에 필요한 인력들을 모두 이곳에서 수용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는 더 늘어나 한 해에 맡은 부역이 270여 가지가 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승번채(義僧番債) 때문에 절 살림은 피폐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그 부역을 다 해내지 못할 시 책임을 물어 주지스님을 불러 곤장을 치기도 했습니다.”

조엄의 인상이 확 일그러졌다.

“어찌해서 부역이 이리 심하단 말이냐? 다른 절보다 훨씬 그 폐해가 심하지 않느냐?”

허리를 구부리고 섰던 아전들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양 안절부절 못하였다. 조엄은 전임 부사에 대해서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남달리 괴팍스러운 성격이라 동래민들의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임 부사가 관권을 이용하여 절에 잡역을 부당하게 부과했다며 이방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추후에 부역이 줄어들었는지 분명히 확인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폐해가 지속되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엎드린 스님들 속 어디선가 낭백스님을 부르는 소리와 함께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석양을 받은 스님들의 등허리가 흔들리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울음이 이어졌다.

“앞으로 범어사의 불사에 적극 참여하여 커다란 보탬이 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범어사의 여러 스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조계문을 향하던 조엄은 뭔가가 끌어당기는 듯한 이상한 느낌에 문득 뒤를 돌아다보았다. 늙은 여인네가 긴 느티나무의 그림자 끝을 밟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노연이라고 한 아까 그 여인네였다. 조엄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뎅그렁 풍경소리가 조엄의 발아래 물처럼 흘러내렸다. 마치 깊은 잠에서 깨기라도 한 듯 조엄은 그 소리에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나무 끝에 서 있던 여인네가 어느 새 땅바닥에 엎드린 채 부복하고 있었다.

동래부사가 다녀간 다음 날 범어사에서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강보에 싸인 채 이 절에 들어와 살다가 잠시 출가한 후 다시 돌아와 30여 년을 공양주로 산 늙은 여인네가 제 생을 다한 일이었다. 밤사이 숨을 놓은 늙은 여인의 얼굴은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듯 평안해 보였다고 했다. 늙은 여인네가 아끼던 행자는 그 동안의 어린 티를 벗고 상주 행세를 톡톡하게 해내었다. 손님이 오시면 훌훌 날듯이 갈 것이니 그때는 행자님이 나를 배웅해주오 라고 말한 공양주의 평소부탁을 잘 새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을은 깊어 금정산의 단풍은 더욱 붉었고, 하늘은 맑고 구름은 높은 날이었다.

박향 소설가

※공동기획:부산시문화원연합회,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지식·문화콘텐츠연구소 리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