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년 사월 늦봄, 부산포 앞바다를
- 왜선이 새까맣게 뒤덮을 때만 해도
- 경상좌수영 19살 관노비 끝량은
- 그것이 무시무시한 전쟁의 시작이자
- 빨간 비단 댕기 맨 노을이의 죽음이
- 닥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캄캄한 그믐날이었다.

바다에서 보는 포구는 거뭇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정박된 왜군 전함 수십 척이 물결에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화려하게 외관을 치장한 거대한 아다케부네(安宅船·안택선)와 그보다는 크기가 작고 날렵한 세키후네(關船·관선)들이었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 흰 동그라미가 그려진 검은 깃발이 나부꼈다.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유지로 꽁꽁 감싼 볏짚과 송진을 가득 머금은 관솔을 등에 진 끝량은 달망 아재와 함께 포구 쪽으로 천천히 헤엄을 쳐 갔다. 부두 앞은 적의 경계가 삼엄해서 그들은 멀리 떨어진 바다를 돌아 거꾸로 포구 쪽으로 가고 있는 참이었다.

헤엄을 치는 끝량의 머리에 문득 평화롭던 시절의 수영갯가가 떠올랐다. 지금 왜선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바로 저 포구에 조선 수군의 판옥선이 줄줄이 늘어서 있던 시절, 각지에서 군역을 지러 나온 수군들로 저잣거리가 흥청거렸던 시절, 장날이면 쌀가마니를 첩첩이 포개 실은 우마차가 거리를 메우고, 주막 앞길 마다 놓인 가마솥에서 국밥을 끓이는 김이 설설 오르던 그 시절……. 어쩔 수 없이 노을의 동그스름한 얼굴도 떠올랐다. 머리에 물동이를 얹고 빨간 비단 댕기를 찰랑거리며 바삐 걷던 나긋나긋하던 뒷모습도…….

악다문 끝량의 입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조금만 기다리라. 네 놈들을 오늘 불지옥에 처넣어 줄 꺼이니까."

	임진왜란 때 항전을 그린 '동래부 순절도'.

올해 열아홉 살인 끝량은 경상좌수영의 관청색(官廳色·지방관아의 주방 책임자)에 딸린 공노비였다. 끝량의 아비도 수영의 오래된 노복이었다. 끝량이 아홉 살 적에 아비가 관격으로 급작스럽게 죽은 다음 끝량은 수영의 불목하니로 눈칫밥을 먹으며 자라왔다. 예닐곱 개나 되는 장수들의 집무실 아궁이를 데우고 화롯불을 피워 대령하는 것은 어린 끝량에겐 힘겨운 일이었다. 손등이 긁히고 터져 성할 날이 없었고 대궁밥도 차례가 미처 오지 않아 늘 허기가 졌다. 끝량은 열여섯 살이 되면서 관주(官廚)로 옮겼다. 저잣거리를 돌며 그날그날 소용되는 식재료를 사들여 오는 게 끝량의 일이었다. 수영의 노비로 잔뼈가 굵어가면서 끝량은 조금씩 사내 티가 나는 장정이 되어갔다.

끝량이 좌수영의 우후(虞候·수사를 보좌하던 정4품직)댁 비녀 노을에게 노을빛 마음을 품은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노을은 우후댁 별당애기 씨의 교전비였는데 그때 열다섯이었다. 물일을 하느라 손은 거칠었지만 그녀의 눈매는 서늘하고 깊었다. 끝량은 그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무지근해졌다.

언제 적인가, 그녀가 우물가에서 울고 있는 것을 끝량은 보았다. 머리카락이 산발이 돼 있었고 얼굴엔 푸릇한 멍이 들어 있었다. 상전의 비위를 거슬러 매를 맞았을 것이다. 끝량이 다가서는 기척에 노을은 흠칫 놀라 내아로 달아났다. 그녀의 머리꼬리에서 흔들리는 낡은 무명 댕기를 보았을 때 끝량의 마음은 칼에 베인 듯 싸해졌다.

그 이후로 끝량은 틈만 나면 우후댁 내아를 훔쳐보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어느 늦은밤 끝량은 내아의 담을 넘겨보다가 노래 소리를 들었다. 별당 행랑방에서 물레를 돌리는 젊은 여자의 그림자가 장지문에 어른거렸다. 낮고 부드러웠지만 시름이 담긴 목소리였다.

"물레야, 물레야. 빙 빙 빙 돌아라. 이웃집 총각 잠 못 잔다. 휘영청 달은 밝고 물레 소리 자지는데, 한숨 쉬는 저 총각 애간장 다 녹는다. 날아 날아 새지 마라 물레 소리 끝치느냐. 애간장 다 녹이고 또 누굴 녹이려나. 물레야 괴머리야 빙 빙 빙 돌아라……"

이러다 들키지, 하면서도 끝량은 발길을 떼어놓을 수 없었다. 애간장이 녹은 건 이웃집 총각이 아니라 끝량이었다. 끝량은 사흘 후 우물에서 물을 긷는 노을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노을아……"

어쩔 수 없이 끝량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노을은 물을 푸다 말고 끝량을 돌아보았다.

"끝량 오라버니……."

"저 이거……"

끝량은 손에 든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엔 금박 물린 붉은 비단 댕기가 들어 있었다. 노을은 봉투 속에서 반쯤 빠져나온 댕기를 흘끗 보더니 딴청을 했다. 총각이 처자에게 댕기를 선물하는 뜻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저, 어, 어제 저자에 나갔다가 누, 눈에 띄길래……"

"흥, 그걸 매고 돌아다니다가 마님이나 애기씨 눈에 띄면 어쩌라구……"

끝량은 노을의 손을 억지로 끌어당겨 봉투를 쥐여 주곤 얼른 돌아 나왔다. 나오다 돌아보니 노을은 물이 담긴 오지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마악 내아의 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물을 푸러 나온 노을의 뒷머리에 곱게 묶은 붉은 댕기 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았을 때 끝량은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상전의 허락을 얻어 노을과 혼인해 비록 오두막일망정 관아 밖에서 살림을 꾸리는 외거노비라도 돼야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도 그날 밤이었다.

노을이 우물에 빠져죽은 시신으로 건져 올려진 것은 왜적이 수영관아를 들이친 그 다음날이었다. 칼을 든 왜적의 난행을 피해 도망치다 우물에 몸을 던졌다고 했다. 죽은 노을의 몸은 납빛으로 부풀어 있었고 저고리 동정이며 치맛자락이 마구 찢겨 있었다. 황급히 피란을 떠난 상전댁을 따라가지 못하고 뒤쳐진 모양이었다. 그때 끝량은 울지도 못하고 입술을 깨문 채 주먹만 부르쥐었을 뿐이었다.

전쟁이 터진 것은 다섯 달 전인 임진년 사월, 유난히도 화창하던 무르익은 늦봄이었다. 부산포 앞바다를 왜선들이 새까맣게 뒤덮을 때만 해도 끝량은 그것이 무시무시한 전쟁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부산진 첨사 정발이 왜적과 맞싸우다 전사했고 부사 송상현이 지키던 동래성도 중과부적으로 함락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수영 갯가 백성들의 민심도 소연해지기 시작했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고립무원인 동래성을 돕기 위해 군사를 몰고 갔다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군사를 물려 후퇴해 버렸다. 뿐만이 아니었다. 박홍은 적과 싸워봐야 이길 수 없다며 화살 하나 쏘지 않고는 전선에 구멍을 뚫고 돌을 실어 가라앉히고는 가속을 데리고 도망을 쳐 버렸다.

장수가 도망을 치자 군사들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늘 활기찼던 수영의 저잣거리는 허둥지둥 피난길을 떠나는 백성들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적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들었을 무렵엔 수영은 이미 텅 비어버렸다. 곰솔이 우거졌던 신령스런 수영은 왜군들의 사령부로 바뀌어 버렸다. 늘 늠름하게 바람에 나부끼던 좌수사의 수(帥)자 기가 사라진 장대에는 붉은 원이 그려진 적장의 깃발이 대신 올라갔다. 그때 끝량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태어나서부터 수영의 노비로 살아왔으니 도망을 가려야 갈 데도 없었다. 하기야 온 조선천지가 적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니 적의 영토가 아닌 곳이 없었다.

피난 못간 다른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끝량은 속절없이 피정복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왜군의 칼에 눌린 끝량은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으로, 수영에 주둔한 왜장 스기와카 덴사부로 휘하 부대에서 몸종 노릇을 했다. 백성들은 왜군에게 끌려 다니며 성을 수축하는 인부나 왜선에 군수물자를 나르는 짐꾼으로 동원됐다. 조금이라도 일손이 늦으면 짐승처럼 채찍으로 맞는 것은 예사고 잔인한 칼에 맞아 죽어나가는 사람도 한 둘이 아니었다. 세태에 재바른 자들도 없는 건 아니어서, 저잣거리의 물상객주나 보부상 중에선 왜복을 입고 적을 상대로 물품을 조달하는 자들도 생겼다. 언제 배웠는지 왜말 통변을 하는 자까지 나타났다.

끝량은 늘 괴로웠다. 몸종 노릇을 하고 있으니 짐승처럼 끊임없이 노역을 당하는 저잣거리의 백성보다는 덜 고달프긴 했지만 포악한 왜장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저잣거리에서 마주치는 백성들의 참상도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식수품을 사러 저자를 걷는 끝량의 소매를 누군가가 잡아끌었다. 좌수영의 야장(冶匠)으로 있던 달망 아재였다. 끝량을 늘 조카처럼, 막내 동생처럼 살갑게 대해주던 사람이었다. 왜군이 수영을 함락시켰을 무렵 그는 이미 자취를 감춘 터였다. 늘 궁금하던 참이었으므로 끝량은 달망 아재가 반가웠다. (하편에 계속)

강동수 소설가

※공동기획: 동서대,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