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자는 관조자가 되는 행복
- 고요한 한가로움을 즐길 수 있다

- 꽃마차·트램보다 느리게 걸으면
- 너른 광장과 후미진 골목길은
- 박물관 극장 시장으로 안내하고
- 천상서 지상, 과거서 현재 연결

유럽 중세 도시로 떠나는 여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관광객을 태우고 다니는 꽃마차이다. '말들이 끄는 트램(노면 전차)'을 타고 도시 관광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그다지 흔하지 않은 경험이다. 그 경험을 체코 2번째 도시 브르노에서 열리는 '브루노-유럽의 중심 도시(Festival Brno-City in the center of Europe)'라는 축제에서 즐길 수 있다.

도시 명물 파르나스 분수.

걷기보다는 마차, 마차보다는 트램, 트램보다는 자동차로 빨리빨리 즐기는 여행은 높이 나는 새가 멀리는 보지만 가까이 자세히 보지 못하듯, 도시 골목길과 거리에 묻어 있는 옛 삶의 흔적들을 스쳐 지나간다.


◇ 이토록 재미있게 걷는 도시

체코 제2도시 브르노에 있는 실험극 센터 스톨루 극장의 창틀에 걸쳐 앉은 인물상.

밀란 쿤데라(1929년 4월 1일생)의 고향 브르노는 느리게 걷기에 너무나 좋은 곳이다. 그의 소설 '느림'에서 여행자는 관조자가 되는 행복, 고요한 한가로움을 즐길 수 있다. 다음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의 한 대목이다.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앗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시골길, 초원, 숲속의 빈터,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버렸는가? 한 체코 격언은 그들의 그 고요한 한가로움을 하나의 은유로써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그들은 신의 창(窓)들을 관조하고 있다고. 신의 창들을 관조하는 자는 따분하지 않다. 그는 행복하다. 우리 세계에서 이 한가로움은 빈둥거림으로 변질되었는데, 이는 성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빈둥거리는 자는 낙심한 자요, 따분해 하며, 자기에게 결여된 움직임을 끊임없이 찾고 있는 사람이다."(김병욱 역)

고요한 한가로움으로 거리를 걸으면, 도시는 꽃마차나 트램을 타고 둘러볼 수 있는 곳과 함께 선물도 준비하고 있다.

걷기는 채소시장 광장에서 시작하고 끝맺는다. 시장 광장의 노점상들은 아침 일찍 문을 열어 갖가지 신선한 과일들과 채소, 손수 장만한 커피와 간식, 아이스크림 등으로 속을 채운 원뿔형의 체코의 전통 빵 '뜨르들로', 겹겹이 크림을 바르고 꿀과 호두를 곁들인 카스텔라 케이크 '메도브닉' 등을 준비하고 있다.


◇ 걷다 보면 고대의 지하 미로까지

실험극 센터 스톨루 극장 벽의 그라피티.

그 곁에는 1597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립됐다가 1690년 건축가 베르나드 피셔 폰 어라크가 바로크 양식으로 자태를 바꾼 파르나스 분수가 한 잔의 커피, 한 조각 간식을 맛깔나게 한다. 커피의 향취가 사라질 때쯤이면 분수 건너편, 역시 바로크 양식으로 1729년 건립된 성 삼위일체 석주가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석주 앞으로 다가가는 걸음걸이를 지켜보는 것 같다. 그 '누군가'는 세 개의 국립극장 가운데 최초로 지어진 레두타 극장(1615년) 입구 석주에 서 있는 천사의 날개를 단 어린 모차르트 동상이었다.

그 극장은 1767년 11세의 모차르트와 누나가 콘서트를 연 곳으로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채소시장 광장.

광장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은 더 먼 과거의 지하와, 더 가까운 현재의 박물관으로 연결된다. 광장의 지하에 있는 고대의 미로는 끝을 알 수 없는 길로 이어져 있어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서 빈둥거리거나 허둥지둥 지나치게 된다.

모라비안 박물관(1817년 건립)은 체코 동부 지역 모라비아의 역사, 모라비아인의 삶과 문화를 담고 있다. 그리고 박물관은 식물학자 멘델(1822~1884년), 국민 음악가 레오시 야나체크(1854~1928년)를 중심으로 과학과 예술의 세계도 담고 있다. 성과 속의 천사와 함께 다시 만나는 위대한 인물들은 도시의 과거를 영광스럽게 할 뿐, 현재를 더욱더 풍요롭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 그 광장과 골목에서 음악이 흐르고

옛 시청사에서 연주하는 시민 악사들. 사진 민병욱

도시는 천상에서 지상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동상에서 시민으로, 박제들의 전시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으로 바뀐다. 골목길에서 살아 있는 예술 활동을 만나게 되는 것은 현재의 도시가 현재 주는 선물일 것이다. 실험극 센터 스톨루(탁상) 극장과 와 실험극 이후 센터 후사(거위·Husa) 극장 입구에는 창틀에 걸터앉은 그 누군가가 공연을 즐겁게 보라는 듯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것 같다.

극장 벽의 그라피티는 공연을 보고 난 뒤 한 잔의 커피가 여유로움을 가져다준다고 일러주는 것 같다.

시장 광장을 시작하여 구시가지로 가는 길은 자유광장으로 이어진다. 광장에서 광장으로 이어지는 골목에 접어드는 곳에서는 매주 일요일 옛 시청사 옥상 첨탑에서 울려 퍼지는 환영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음악을 취미로 몇몇 시민이 첨탑에서 관악기를 연주한다. 몇백 년 동안 울려 퍼진 성스러운 종소리에 이제야 시민들이 화답하는 것 같다.

도시는 여행자들에게 과거의 유적을 보여주면서 현재 시민의 음악도 들려준다. 도시문화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예술 활동으로서 더욱 풍요로워진다. 시민의 동의와 지지 그리고 자발적 참여가 없이 도시 문화는 이루어지지도 풍요로워지지도 않는다.

뒤안길 후미진 곳에서 연주와 전시를 하는 소모임이 골목길로 거리로 광장으로 나와 예술을 도시 전역에 울려 퍼지게 하는 부산을 꿈꾼다.

민병욱 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 bmw@pusa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