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나는 행인에 부탁한 듯
- 달맞이언덕·백사장 배경의
- 손조차 잡지 못하는 신혼부부

- 허름한 가게 가장 맛나던 복국집
- 화려한 정원의 동백장 호텔
- 부모님들의 연애공간 사라져

- 1960·1970년대에도
- 최고의 명소였던 해운대
- 행복했던 인생의 순간은
- 사진으로만 남았다

#동백섬 걷다 발견한 비밀의 문

2호선 동백역에서 나와 아파트 사이길을 따라서 조선호텔로 가는 길을 걷다 보면 전망 좋은 산책길을 만나게 된다. 전철역에서 시작해 동백섬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초행자에게는 조금 먼 거리일수 있지만, 2005년 APEC 정상회담 이후 솟아오른 마천루의 야경과 바다를 끼고 있는 동백섬 주변의 경치로 인해 해운대를 여행하는 관광객들과 이 지역 거주민들에게 최고의 산책길을 선사한다.
한 삼사년 전후로 동백섬 주변에 바닷가 조망의 레스토랑이 들어서고 동백섬 입구에 요트 선착장과 더베이 101이 생긴 이후로 그 일대가 관광객들로 늘 북적대는 핫 플레이스가 되버린 것을 보고 있자니, 원래 나만이 알고 있던 뒷동산이 너무 유명해져서 이제는 옛날, 그 아늑하고 아기자기했던 나만의 놀이터를 잃어버린 것 같아 조금은 씁쓸한 느낌도 든다.

동백역에서 출발해 걷다보니 동백섬 입구에 다다랐다. 동백섬은 나를 부산에 정착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주차장을 지나 한 5분 쯤 걸었을까, 저 멀리 하얀 솜뭉치 같은 것이 토실토실한 궁둥이를 흔들며 다가 왔다. 토끼였다. 동백섬에 토끼가 살고 있었던가?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동백섬에 토끼를 방목한다는 기사는 봤지만, 진짜 토끼인가? 혹시 시계 태엽장치 토끼 뭐 그런건 아니겠지? 문득 폴짝폴짝 뛰고 있는 토끼를 보니 토끼의 생사가 걱정이 된다. 잃어버린 반려견도 순식간에 잡아먹는 사람들이 있는데, 토끼도 언젠가 잡혀먹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순간 얼굴에 까만 점이 있는 점박이 토끼가 뛰다가 멈칫 서서 나를 쳐다 본다. 마치 자기를 따라 오라는 듯. 맙소사. 토끼가 레이스 달린 옷을 입고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코스프레 토끼도 아니고…. 너 정체가 뭐냐. 토끼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엄청난 속도로 얼마 전 열광하며 봤던 드라마 '시그널'의 조진웅과 이제훈처럼 동백섬의 시간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1962 :동백섬으로 신혼여행 온 연인

강신표 전 서울대 교수가 1962년 달맞이 고개를 배경으로 찍은 신혼여행 사진.

한 남자가 애인으로 보이는 여인의 사진을 찍고 있다. 살랑살랑 실크 스카프를 두르고 뿔테 안경을 낀 이지적으로 보이는 여인. 남자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카메라를 건넸고 저멀리 보이는 달맞이 언덕을 배경으로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여인과 함께 사진을 남겼다. 지나가던 행인이 찍어준 사진이라 쑥쓰러워 어깨를 두르거나 손도 잡지 못했다.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저, 제가 한 장 찍어드려도 될까요?" 남자는 말없이 묵직한 니콘 필름카메라를 건넸다. "저기 배경으로, 부탁합니다" 달맞이를 가르켰다. 저 멀리 소가 누운 형상의 와우산 달맞이가 마치 두 사람을 포근하게 감싸안은 사진이 완성됐다. 풋풋한 청년의 모습은 신혼여행 복장치고는 조금 불편해보였지만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왠지모를 자신감과 당당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여인은 조용했지만 매우 똑똑해보이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사진을 찍고 카메라를 건네자 그가 말했다. "저희 3일 전에 결혼하고 목포를 거쳐 통영, 그리고 이렇게 해운대에 왔습니다. 제가 해운대로 꼭 신혼여행 오고 싶었거든요. 남들 많이 가는 수안보나 속리산 보다 바다를 보자고, 원래 제 고향이 통영입니다."

두 사람의 신혼여행은 이렇게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나는 두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 그들을 찍어준 사진이 2011년 이후 내 책장에 꽂혀 있었으므로. 1993년 이후 연락이 끊어졌던 사제지간의 연은 이렇게 다시 토끼를 따라온 동백섬에서 이어졌다.



1962년 4월 23일.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서 3살 아래 과 후배 김봉영과 혼례를 올린 젊은 청년 강신표. 사회학과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학자답게 전국을 답사하는 신혼여행을 계획했고 목포를 거쳐 제주를 갔다가 고향인 통영에 들리고 부산을 마지막으로 여행하는 여정이었다. 통영의 의령약국 한약방집 손자로 태어난 강신표는 서울대에서 만난 아내와 1962년 결혼을 하고, 마가렛 미드의 '나의 인류학적 자서전'을 함께 번역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 평생을 한국사회와 문화, 올림픽을 연구하는 인류학자로 살았다.

1991년, '문화인류학의 이해' 강의실에서 만난 백발이 무성한 노교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서구에서 들어온 인류학이란 학문이 얼마나 서구 중심적이며 18, 19세기 자본주의와 맥락을 함께 하며 얼마나 많은 정신적 수탈을 자행했는지, 동양문화의 시각에서 문화인류학을 해야한다고 설파하는 노교수의 모습 위로 아까 만났던 젊은 시절 청년의 모습이 겹쳐졌다. 1980년대 말 운동권의 쇠퇴와 90년대 학번에게 닥친 문화, 경제적 풍요, 그리고 X세대의 정체성에 혼란해할 무렵, 갓 입학한 91학번 세대들은 그분과 친해지기도 전에, 아니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 과연 어떤 것인가 미처 알기도 전에 '문화인류학의 이해'란 강의를 마지막으로 그와 헤어져야 했다. 그리고 노교수는 지방의 한 학교의 명예교수로 떠나가셨다. 그리고 20년 뒤 이렇게 흑백사진 한 장으로 다시 만났다. 그분을 뵈면 혹시 그때 백사장에서 사진을 찍어주던 여인을 기억하느냐고, 그날의 해운대에서의 시간이 우리를 이렇게 수십 년 뒤 다시 해운대 동백섬으로 소환한 것이 아닐까 여쭤보고 싶다.


#1972: 잊을 수 없는 복국집

1970년대 금수복국의 전신 금수식당.

10년 뒤 동백섬. 여수에서 밤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한 여자는 부산항에서 수영 비행장으로 갔다. 일본에서 막 도착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 지난번 여수에서 딱한번 만났을 뿐인데 어떻게 찾는담.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나는 건 딱 한가지, 그 남자 머리가 많이 벗겨졌었다. 비행기 트랩으로 내리는 사람들 중 머리가 휑한 남자만 찾으면 되겠지. 아, 저 멀리 보인다.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연신 사람좋은 미소를 하고 가방을 잔뜩 들고 내린다. 1963년 국제공항으로 승격된 이후 1976년 김해공항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일본과 부산을 오가는 승객들은 이곳을 이용했다. 수영비행장에서 만나 이들은 해운대를 돌아다니며 다른 연인들처럼 여행했다. 마침 남자의 누나가 해운대에서 중국집을 운영하고 있었고, 중국 화교가 해주는 해물이 잔뜩 들어간 신선하고 맛있는 중국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다음날은 소개로 해운대에서 가장 소문난 복국집을 갔다.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허름한 가게였고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복국을 먹고 난 다음엔 동백섬이 있는 해운대에 가서 사진도 찍고 당시 가장 크고 화려했던 정원이 아름다웠던 동백장 호텔에 가서 커피도 마셨다. 해운대 여행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여인은 남자를 평생의 배필로 삼고 결혼한다. 아마도 거기엔 싱싱했던 복국과 해운대 절경이 큰 몫을 했을 터, 이 것은 나의 부모님의 스토리이다.



부산을 떠나 서울에 살게 되면서도 엄마는 가끔 부산의 복국집 타령을 하셨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서울의 유명한 복국집에 가게 되더라도 꼭 돌아나오며 부산의 복국집이 훨씬 더 맛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엄마의 기억속의 복국은 미각이 아닌, 당시 충만했던 연애 감정에서 흘러나온 총체적인 오감의 행복했던 기억일 뿐이라고…. 그렇게 엄마의 미각속의 추억을 부정하며 그 복국집에 단 한번도 모셔다 드리지 못한 불효녀는 우연한 기회에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제서야 엄마를 모시고 와 추억의 복국집 추적에 나설 수 있었다. 사람을 찾는 거라면 자신있는데 이건 뭐 사라진 공간 찾기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더구나 증거나 사진 자료가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구술에 의존해야 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1972년도 해운대의 소문난 복국집이라…. 매일 아침 출근길에 지나가는 길에 있는 그 유명 복국집일까? 그 금수복국의 간판에는 'since 1970'이라고 씌여 있고, 금수복국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가게의 연혁을 살펴본 후에야 처음 오픈한 곳이 동래점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시 해운대구는 동래구 소속이었고 명칭도 동래구였다는 점에서 엄마가 기억하는 그 집은 해운대에서 지금도 유명한 금수복국일 가능성이 있다. 혹은 그 동네에서 손 맛좋은 요리사가 열었던, 지금은 경쟁에서 밀려나 없어진 허름한 복국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쉽게도 엄마는 그 식당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세상에서 처음 먹어본 너무 싱싱하고 맛있는 복국이었고, 45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맛이 입에서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그 복국을 사준 남자에게 홀딱 빠져 결혼했다는 것, 이 사람이라면 이 싱싱한 복국을 평생 사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 복국집 때문인지 몰라도 그로부터 45년 뒤 서울에서 딸이 살고 있는 부산으로 아예 이사를 왔고 딸보다 제일 먼저 찾은 것은 동백섬 근처의 복국 집이었다. 제일 첫 마디가 "그 복국집 찾아야 되는데…"였다.

엄마가 진짜로 찾는 것은 복국집이 아닌 그 복국집을 함께 갔던 아버지와의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복국집은 과연 어디였을까. 찾고 싶다. 진짜로.


#사라진 동백장 호텔

1972년 해운대 동백섬에 있었던 동백장 호텔. 장은진 제공

두 사람은 동백섬 근처의 동백장 호텔에 여장을 푸는데 당시 70년대 해운대는 모텔과 여관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있던 시기였고, 그 중 대표 숙박업소라 할 수 있는 동백장 호텔을 선택했다. 동백장 호텔의 위치는 동백섬에서 달맞이 언덕이 보이는 방향이었는데 당시 호텔이라는 명칭을 쓸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동백섬과 해운대 일대에서의 숙박업소 중 특급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백장 호텔에 대한 당시 신문기사를 검색하면 흥미로운 기사가 검색되는데 1968년 큰 화재가 있어 전체 건물이 전소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경향신문 1968년 1월 5일자 기사를 보면, '4일 저녁 7시반 海雲臺 冬柏莊(해운대 동백장) 호텔에서 누전으로 불이 일어나 3백평짜리 목조 2층이 전소. 피해액은 2천만 원'이라고 나와 있다.

당시 2천만 원이면 당시 한옥집 한 채가 백만 원도 채 하지 않을 때이므로 동백장의 규모가 얼마나 큰 호텔이었으며 그 피해액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아마도 현재 시세로 20억 가까운 피해가 나지 않았을까. 그로부터 4년 뒤 1972년에 동백장 호텔로 여행을 다녀온 부모님의 여행기를 구술로 정리해보면 분명 동백장은 다시 보수를 해 화재 사고 있었던 68년 이후에도 계속 숙박업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72년 사진에는 목조가 아닌 콘크리트로 다시 건물을 보수 증축 했음을 알 수 있다.

동백장에 대한 또 다른 기사 하나는 동아일보 1986년 12월 13일자의 기사이다. 서독에서 온 서커스단이 행사를 주관한 공연사 대표가 공연 사례비와 동물 검역서를 들고 잠적하는 바람에 몇일 동안 데리고 온 동물을 동백섬에 풀어놓고 자신들은 동백장에 머무르고 있다는 웃지 못할 사연이다. 재미있는 건 1986년에는 동백장 여관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추측컨대 동백장 호텔이 있었던 자리는 1978년 웨스틴조선이 들어섰을 확률이 높다. 1980년대 동백섬 공원에 이런 사연들이 있었다니 내가 만났던 토끼가 그때 집으로 못 돌아간 토끼의 후예가 아닌가 모르겠다.

장은진 동서대 영상콘텐츠학과 BK연구교수

공동기획: 동서대학교,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