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최고로 청냉·감미로웠다는 물맛
- 냉정샘서 나그네 장수는 '물보다 잿밥'

- 그녀가 준 샘물이 계속 머리에 맴돌아
- 장날마다 샘에 들러 뺨 붉은 처녀 만나

- 가슴이 쿵쿵 천둥소리 내며 방망이질
- 두 뺨이 직박구리 처럼 붉게 변하기도

- 사변 때 사별한 덕이 할머니 이야기
- 남편 그리며 물만 마시다 결국 하늘로

소란스러운 직박구리의 수다에 원희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가니 대추나무 우듬지에 앉은 직박구리가 게으른 원희를 놀리기라도 하듯 쫑쫑거립니다. 직박구리의 뺨은 밤새 더 붉어진 듯 합니다. 원희는 힘껏 종주먹을 들이댑니다.

"늦잠 잔 거 아니야! 눈은 아까부터 떠 있었다니까. 왜 자꾸 시끄럽게 구는 거야?"

원희는 마루에 차려진 밥상 위에 덮여져 있는 밥상보를 걷습니다. 밥과 콩나물국, 김치와 시금치나물만 있는 간단한 밥상이지만 구수한 엄마냄새가 코를 간질입니다. 오늘도 새벽일을 나간 엄마가 차려놓고 가신 밥상입니다. 원희는 얼른 숟가락을 들고 밥을 가득 퍼서 입에 넣습니다.

밥을 먹고 나니 배가 볼록해집니다. 원희는 배를 퉁퉁 두드리며 마당으로 내려섭니다. 직박구리가 돌담 위에 앉아 또 잔소리를 시작합니다. 아, 알았어, 알았다구. 엄마가 밥을 먹고 나면 밥상보를 꼭 씌워두라고 했는데 원희는 그런 말은 매일 들어도 까먹습니다. 원희는 삽짝문을 휙 열고 골목길을 날듯이 뛰어갑니다.

얼른 샘으로 가봐야 합니다. 분명 덕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덕이는 냉정샘 옆에 있는 넓적한 돌멩이에 앉아 먼 하늘을 하염없이 보고 있습니다. 원희는 어린 옥수수알 같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 덕이를 향해 힘껏 손을 흔듭니다. 덕이랑 함께 있으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릅니다. 듣고만 있어도 키득키득 웃음이 나는 이야기도 해주고, 샘물이 흘러내린 도랑에서 가재를 잡아 원희에게 주기도 합니다.

냉정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희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 물을 길어서 마시고 있습니다. 샘물은 엄광산에서부터 내려옵니다. 여름에는 이가 시릴 정도로 시원하고 겨울에는 김이 날 정도로 따뜻합니다. 모두 덕이가 가르쳐 준 것입니다. 덕이는 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길을 가던 나그네도 여기서 물을 한 바가지 쭉 들이키면 하루 피로가 쫙 풀리지."

"그럼 덕이가 나그네야?"

"나그네는 나그네지."

"에이, 바보."

원희는 손으로 샘물을 떠서 덕이에게 휙 뿌립니다. 덕이의 얼굴에 샘물이 방울방울 묻어 반짝입니다. 덕이가 인상을 찡그립니다. 덕이의 얼굴은 주름살이 겹겹이 쌓여 지렁이 같습니다. 원희는 부르르 진저리를 칩니다. 뿡 방구가 새나옵니다. 갑자기 부끄러워서 원희는 얼른 덕이에게 질문합니다. 늘 똑같은 질문입니다.

"오늘은 나타났어?"

덕이가 고개를 흔듭니다. 원희는 덕이 신랑을 꼭 보고야 말겠다고 생각합니다. 키가 거인처럼 크고 얼굴은 부처님처럼 잘 생겼고, 힘이 장사라서 씨름대회에 나가서 소를 탄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씨름을 할 때는 다리랑 팔이 불뚝불뚝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고요. 그 모습이 너무나 궁금하지만, 원희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구포장에서 뭐 팔았어?"

원희가 또 묻습니다. 덕이는 원희가 묻는 말에 짜증내지도 않고 몇 번이고 대답을 합니다. 원희엄마는 두 번만 물어도 짜증을 냅니다.

"엄마, 직박구리는 왜 뺨이 빨개?"

"원래 그래 생겼으니까."

"겨울이 너무 추버서 꽁꽁 얼어서 그런 거 아니가?"

"뭔 씰데없는 소리 하고 자빠졌노?"

엄마는 직박구리가 왜 그러는지 모릅니다. 덕이가 냉정샘에 나타나면 원희네 마당에까지 날아와 쫑쫑쫑 잔소리를 해대는 이유를 엄마는 모릅니다.

덕이가 말합니다.

"옹기를 팔았지. 이래 큰 옹기를 번쩍 번쩍 들었지. 사람들이 박수를 쳐도 웃지도 않았어. 원래 말이 없었지."

부산도시철도 2호선 냉정역 인근의 냉정샘.

옹기장수는 덕이를 냉정샘에서 만났습니다. 옹기장수는 안가는 장이 없었습니다. 부산장, 동래장, 하단장, 구포장, 김해장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습니다. 옹기장수는 늘 냉정샘에서 지친 다리를 쉬어 갑니다. 샘물을 한바가지 마시기만 해도 배고픈 것이 싹 가시고 온 몸에서 힘이 불끈 솟아났거든요.

그 날도 옹기장수는 팔아야할 그릇이 아직 많이 남았지만 얼른 자리를 정리했습니다. 장을 펴는 순간부터 샘물 한 바가지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아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꿀꺽 옹기장수는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킵니다.

냉정샘물은 조선 13도중 물이 청냉하고 감미롭다고 소문이 나 있는 곳입니다. 그 물을 한 잔 마시면 하루의 피로가 새의 날개짓처럼 가벼워집니다. 하지만 정말, 냉정샘의 달콤한 물맛만이 옹기장수의 손을 이렇게 부산스럽게 만들었을까요? 옹기장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간만 잘 맞춰가면 두 뺨이 복숭아처럼 붉은 그 처녀를 볼 수 있다는 것을요.

옹기장수는 덜그럭 소리가 나는 옹기짐을 잠시 길가에 내려놓습니다. 옹기들이 덜그럭거리면 깨지고 금이 갈텐데 그럼 장사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릇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은 발걸음이 조심스럽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하마터면 그 처녀를 덥썩 안아버릴뻔 했던 순간이 자꾸 떠오르니 발걸음이 저 혼자 정신나간 놈처럼 들썩거리는 것입니다. 옹기장수는 길가의 돌멩이 위에 엉덩이를 걸칩니다. 급하지만 조심해서 가자, 옹기를 잃으면 그 참한 처녀도 잃을 게 뻔합니다.

그 처녀의 이름이 덕이라는 걸 압니다.

"덕아, 아부지 다리는 좀 어떠시노?"

"좀 많이 나았심더."

그 날, 옹기장수가 막 냉정샘에 도착했을 때 항아리에 물을 담고 있는 덕이를 보았습니다. 두 번째입니다. 지난번에 옹기가 생각보다 빨리 팔려서 길을 일찍 나섰을 때 처음 본 처녀입니다. 그 때 물 한바가지를 청했는데, 바가지 가득 물을 떠서 가장자리를 손으로 말끔히 훔쳐 주는 그녀의 모습에 옹기장수는 그만 몸이 얼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속에 길다란 대못이 꽉 박혀버린 거지요. 한 번만 더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장이 파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도 옹기를 주섬주섬 챙겨서 이쪽으로 달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또 만났습니다. 덕이, 덕이, 이쁜 이름도 알았습니다.

"덕아, 아지메 먼저 간데이. 조심해서 드가라."

"예."

냉정샘에는 덕이와 옹기장수만 남았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운 덕이가 한바가지 물을 뜨더니 옹기장수에게 내밉니다. 지난번에 물을 얻어 마신 옹기장수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요? 옹기장수는 깜짝 놀랐지만 바가지의 물을 벌컥벌컥 다 마셨습니다. 물이 가득 든 바가지였지만 옹기장수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십니다. 달고 차고 맛있는 샘물의 맛을 하나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가슴이 쿵쿵 천둥소리를 내며 방망이질을 해대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처녀는 벌써 저만큼 걸어가고 있습니다. 바가지는 옹기장수의 손에 들려져 있는데 말입니다. 바가지를 항아리 위에 띄워놓아야 걸을 때 물이 넘치지 않을텐데 덕이가 걸을 때마다 출렁출렁 물이 넘칩니다. 덕이의 검은치마는 물에 젖어 더욱 검게 보입니다. 달려가서 항아리 위에 바가지를 올려주어도 될 것입니다. 키가 작은 그녀는 항아리 길이를 다 합쳐도 옹기장수의 얼굴까지밖에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옹기장수는 가만히 서서 덕이가 점처럼 작아져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만 있습니다. 평소 때 몸속에서 휘몰아치던 광풍 같던 힘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요. 바가지를 들고만 있는 제 손이 미워서 옹기장수는 힘껏 머리통을 내리칩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 만남입니다. 사타구니가 벌게지도록 발걸음을 재바르게 옮긴 보람이 있습니다. 벌써 덕이는 물을 가득 담은 항아리를 머리에 이었습니다. 머리 위에 올려놓은 똬리가 항아리에 걸려 툭 떨어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똬리가 빠져 항아리와 바로 맞닿은 머리밑이 빠질 듯이 아플 것이지만 덕이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거인처럼 큰 사내가 땅에 떨어진 똬리를 주워 자기 입에 물더니 물이 가득 든 항아리를 두 손으로 번쩍 드는 게 아닙니까. 그러더니 제 입에 문 똬리를 덕이의 머리와 항아리 사이에 넣어주었습니다. 그의 뜨겁고 거친 숨소리가 덕이 코앞에서 황소의 콧김처럼 뿜어져 나왔습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온 몸이 뻣뻣하게 굳었습니다. 덕이는 눈을 꾹 감아버렸습니다. 그 순간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했습니다. 사내의 큰 손이 물항아리를 잡고 있는 덕이의 손을 꽉 잡았습니다. 다시 사내의 콧김이 덕이의 얼굴로 쏟아졌습니다. 숨이 멎을 것 같았지만 덕이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습니다. 남자의 두뺨이 직박구리 뺨처럼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직박구리처럼? 그래서?"

직박구리가 제 이야기를 하는 줄 아는 걸까요? 갑자기 시끄럽게 재재거립니다. 피이, 빨리 잘생긴 제 모습을 보여주기라도 하든가. 원희는 직박구리를 향해 혀를 낼름합니다. 원희는 그 다음 이야기가 어찌 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옹기장수가 항아리를 번쩍 들어 바닥에 내리더니 갑자기 덕이를 와락 안아버린 겁니다. 늘 듣던 이야기지만 원희는 그 부분을 들을 때마다 온몸이 간질간질합니다. 간이 콩알만해지고 심장도 두근두근댑니다. 하지만 덕이의 얼굴 표정을 살피는 것이 더욱 재미있습니다. 덕이의 주름진 얼굴이 마치 인두질을 한 것처럼 펴지기 때문입니다.

덕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집니다. 원희는 따라서 이히히 하고 웃고는 샘물을 바가지 가득 떠서 마치 옹기장수처럼 벌컥벌컥 마십니다. 바가지를 내려놓았을 때였습니다. 샘물 밑에 심겨져 있는 느티나무 이파리 사이로 멀리 엄마가 뛰어오는 것이 보입니다. 엄마는 요 아래 콩나물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 냉정샘물로 자라는 콩나물들이라 맛이 좋고 아주 통통합니다. 아마 누군가가 원희가 덕이와 함께 있다고 엄마에게 이른 모양입니다. 원희는 얼른 일어나 덕이에게 손을 흔들고는 엄마에게 달려갑니다.

"아이고, 이 머시마가 또 노망난 할매하고 같이 있네. 내가 저 할매랑 같이 있지 말라했쩨?"

엄마가 때릴 듯이 주먹을 휘두릅니다. 하지만 그건 시늉뿐입니다. 원희는 이히히 하고 웃습니다.

"얼릉 집에 안 가나!"

원희는 엄마한테 혀를 쏙 내밀고 펄떡 펄떡 뛰어서 집으로 갑니다. 집마당에 도착하니 배가 고픕니다. 아침에 먹던 밥상에 파리가 몇 마리 붙어 있습니다. 원희는 손을 휘휘 내저어 파리를 내쫓고 콩나물국부터 후루룩 마신 뒤 남은 밥을 다시 먹습니다.



직박구리가 시끄럽습니다. 왜 저렇게 시끄럽지? 아침도 아니잖아. 잠결입니다. 숟가락을 놓자마자 마룻바닥에 드러누웠는데 잠이 든 것입니다. 원희는 눈을 뜹니다. 정말로 직박구리가 나무 우듬지에 앉아 시끄럽게 웁니다. 원희는 벌떡 일어나서 마당에 있는 돌멩이를 주워 듭니다. 왜 나한테 신경질이냐고 돌멩이라도 던져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엄마 소리가 들립니다. 해가 아직 대추나무에 걸려있는 걸로 봐서 엄마가 올 시간이 아닌데 말입니다. 엄마가 대문간에 서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목소리로 봐서는 냉정샘 옆에 사는 옥이네 아주머니입니다. 원희는 가만히 마당에 내려섭니다.

"며칠이나 아무 것도 안 묵고 굶었다네. 여 샘물만 마셨다더라. 그러니 견디겠나?"

"아이고, 노친네 잘 갔지 뭐. 식구들도 인자 좀 편하게 되었다, 사변 때 남편 죽고부터 그 잘나고 똑똑하던 노친네가 저리 되어삐릿으니 참, 사람 정이란 게 뭔지…. 사람이 딱하기는 해도 자꾸 원희가 붙어댕기싸서 내사 마 신경이 쓰이가 똑 죽겄더만…."

직박구리는 여전히 시끄럽게 웁니다. 뺨이 붉다 못해 시커멓게 보일 정도입니다. 원희는 마당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고개를 한껏 꺾어 직박구리를 봅니다. 참 이상합니다. 오줌빛처럼 노란 노을 때문에 눈이 부시어서 그런 걸까요?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박향 소설가

공동기획: 동서대학교,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