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자유대 박성조 종신정교수는 "지역의 리더십이 깨어나야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면서 부산지식네트워크 사업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한기 선임기자 beakhg@kookje.co.kr

# 지식사회 화두 '대학학'

- 한가지 학문으로 문제 푸는 시대 지나
- 대학의 창조공장화로 파고 넘어야

# 이탈리아 '코르토나 프로젝트'

- 다방면 지식인들 '아이디어 리그' 펼쳐
- 지식 융·복합 폭발땐 창조경제 실현

# 부산의 발전 전략

- 울산 산·학·관 '트리플 헬릭스' 배워야
- 부산지식네트워크 사업 부활도 조언

노안이 왔을 법한데도 눈빛이 형형했다. 캐주얼한 복장에 모자를 썼다. 멋쟁이시다. 모자로 누른 성성한 백발이 바닷바람에 휘날렸다. 북항 저편에서 간간이 뱃고동이 들려왔다. 지식의 쓸모, 지역의 리더십을 말할 때는 눈빛이 이글거렸다. 격정을 쏟아낼 때는 설핏 눈가에 이슬이 비친다. 눈물인가. 무엇이 노학자의 누선을 자극하는가. 그가 쓴 은테 안경은 부산 국제시장에서 산 거란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명료하게 해 주는 고마운 물건, 고향산이라 애착이 간다고….

지난 주말 연구차 한국을 찾은 박성조(79) 베를린자유대 종신정교수를 부산역 근처에서 만났다.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 석학-. 그의 이름은 한국에서보다 유럽에서 더 알아준다. 유럽을 섭렵하고 네팔을 거쳐 왔다기에 이번에는 작심하고 대담을 청했다. 흔쾌히 수락했다. 그와는 이미 몇 차례 인터뷰를 했던 터라, 무슨 새로움이 있을까 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지식의 샘물을 퍼올리는 두레박이었다. 어디서 그런 샘물이 솟는지, 어디서 그런 수경(修綆·긴 두레박줄)을 구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대학들이여, 잠을 깨라

박 교수가 이번에 들고온 화두는 '대학학(大學學, Universitology)'이다. 생소한 개념이다. 무슨 얘기일까.

"내가 만든 개념이에요. 세상이 달라지고 있고 대학이 바뀌고 있어요. 대학들이 변화하는 세상에 어떻게 대처·대응해야 하는지 모색해보자는 거예요. 대학이 살 길도 거기 있을 겁니다."

다소 추상적이지 않느냐고 했더니 "천만에!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각론을 준비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지난달 네팔에서 열린 제 12차 '세계 대학 네트워크(Global University Network)' 컨퍼런스에서 박 교수가 기조강연한 주제가 '지식창조공장 대학: 이익과 지식 간의 갈등', 즉 '대학학'에 관한 것이었다. 요점은 이렇다.

대학은 규모가 커야 하고 복잡한 행정체계 속에 종합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는가. 그런 체제가 전통과 권위, 새로운 학문의 융·복합과 창조적 지식을 이끌어낼 수 있는가. 세상은 지금 인터페이스(interface)를 요구하고 있다. 농경사회는 농부, 산업사회는 공장에 대한 연구가 필요했지만, 21세기 지식사회는 대학의 지식창조가 핵심 과제다. 지식사회는 한가지 문제를 한가지 학문으로 풀 수 없다. 학제 간 연구와 융·복합 과정으로 접근해야 한다. 한국을 뒤흔든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를 보라. 저게 병원이나 의학자, 보건행정 전문가가 풀 수 있는 문제였나. 이런 문제를 풀려면 대학이 지식창조공장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대학학은 대학의 지식창조를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있긴 하나 지엽말단적이다. 학제 간 연구의 중요성만 강조할 뿐 성과는 극히 미미하다. 대학 간 경쟁을 건물, 시설, 학생 수, 폴리페서 배출, 명예박사 수여 등으로 판단하려 한다. 기초학문은 등한시하면서 노벨상을 쳐다 본다. 지역대학들의 실상은 더 답답하다. 치열한 연구 경쟁도, 한 우물을 집요하게 파는 학자도, 그러한 문제제기나 토론도 보이지 않는다. 지식창조의 텃밭에 잡초만 무성한 꼴이다. 박 교수는 "이러한 연구 풍토로 어떻게 21세기 지식사회의 파고를 넘을지 걱정"이라며 한숨을 지었다.


#지식창조 아이디어 리그

	박성조(왼쪽) 교수가 글로벌 지식경제 등을 주제로 본지 박창희 대기자와 대담하고 있다. 백한기 선임기자

박 교수의 '광폭 행보'는 국제적 관심거리다. 그의 폭넓은 식견과 경험은 유럽 지식시장에서 이미 인정받고 있다. 베를린자유대 정치학과에서 종신정교수로 박사과정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그는 지난 2월 브뤼셀에 있는 유럽의 명문 카스(CASS) 유럽경영대학의 이사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오는 9월부터는 포르투갈 리스본의 외교관 양성 및 국방대학에서, 내년부터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상경대학인 보코니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몽골 네팔 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에서도 수시로 특강 요청이 들어온다. 그의 요즘 최고 관심 분야는 글로벌 지식경제다.

대담 중이던 그가 질문을 하나 던졌다. "코르토나 프로젝트라고 들어봤어요?" 고개를 젓자 그는 지식창조의 훌륭한 사례가 여기 있다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코르토나는 르네상스 시발지인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전통 마을이죠. 그곳에선 매년 한 차례 다방면의 지식인들이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펼쳐져요. 인문학자 작가 음악가 건축가 의학자 자연과학자 등이 한자리에 모여 미(美), 나(自我), 해체 같은 특정 명제를 걸고 1주일 간 다채로운 관점과 시각을 놓고 토론하는 겁니다. 이게 유명한 '아이디어 리그'예요. 지식의 융합·통합을 이끌어내는 프로젝트죠. 배울 필요가 있어요."

이런 형태의 아이디어 리그를 펼치다 보면 지식공장에서 어느날 '펑' 하고 지식 융·복합의 폭발이 일어난다. 이것이 경제와 결합하면 지식경제, 창조 영역으로 발전하면 창조경제가 된다. 박 교수는 "새로운 지식창조, 지식경제를 끌어내려면 실체와 이론이 같이 가야 하고, 총론보다는 각론이 필요하며, 지역토착 문화와 동반한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산·학·관 '트리플 헬릭스'

그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울산이 부산보다 잘 사는 이유를 아세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이번에는 통계청 자료를 유심히 보라고 다그친다. 통계청 자료를 보니, 울산의 1인당 개인소득은 1916만 원(2013년)으로 5년째 전국 1위다. 부산(1618만 원)보다 298만 원 많다. 1인당 지역내 총생산도 울산은 6042만 원으로 1위, 전국 평균의 2배에 이른다.

"울산이 부산보다 잘 사는 비결은 '트리플 헬릭스'에 있어요. 트리플 헬릭스는 산·학·관 간의 협력적 관계 역할을 분석하는 모델이죠. 대학·기업·정부(지자체) 간 효과적인 네트워크 구조는 혁신체계의 기본이죠. 이 세 개가 삼발이처럼 동등한 힘과 역할로 파트너가 될 때 트리플 헬릭스가 작동합니다. 내가 만나 본 울산 공무원들은 대체로 유능한 것 같았어요. 박맹우 전 시장 같은 경우는 추진력이 대단하지 않았나요. 거기에 튼실한 글로벌 기업들과 연구욕 넘치는 지역대학이 받혀주니 소득이 성큼 높아진 겁니다. 부산에는 왜 변변한 정부출연연구소가 없나요? 외자유치를 맡은 공무원들은 영어를 잘 하나요? 이들은 국제감각을 배양하고 있나요? 대학들은 지역을 위해 어떤 연구를 하나요? 이런 것들을 하나 하나 점검하고 챙겨야 글로벌 도시가 되는 거예요."

무심코 보는 통계청 자료 속에 트리플 헬릭스의 역학이 숨어 있었다는 건 신선한 발견이다. 박 교수는 "요즘은 트리플 헬릭스에 '시민운동'이 추가돼 4각 구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고 설명했다.


#기장 촌놈의 뚝심

박 교수는 기장 대변 출신이다. 기장초등학교와 경남중·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독일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촌놈이란 소리가 듣기 싫어 뚝심으로 버티며 악바리처럼 공부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은 오히려 촌놈이란 말이 정겹게 들린다"며 "난 누가 뭐래도 '기장(대변) 촌놈'이야"라고 말했다. 기장에는 선영이 있고 친척들이 살고 있다. 독일에 있으면서도 한국 동향은 물론 부산 소식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몸에 밴 고향의식 탓이다.

부산의 발전 전략을 묻자,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키 포인트를 정리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지역균형발전이 강조되는 데도 서울과 부산은 왜 격차가 커지나요? 리더십의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세계의 제2도시들은 저마다 지식과 비전을 앞세워 미래를 준비하고 있어요. 내 고향 부산은 언제까지 무기력하게 있을 건가요? 칼을 빼야 합니다. 계획하고 모험하고 도전하지 않는 지도자는 새로운 도시의 주역이 될 수 없어요."

자리를 정리하면서 박 교수는 몇 년전 본지가 집중 제기했던 부산지식네트워크(BKnet) 프로젝트를 되살려 보라고 조언했다. 지식사회, 창조경제의 주역은 결국 사람(전문가)일 수밖에 없고 그 모든 것이 거기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 이는 미래 지식창조의 주인공이 될 청년들의 비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책을 보다 눈이 침침해 잘 보이지 않을 때는 냉수로 세수를 한다는 세계적 석학. 부산도 세수를 하고 미래 비전을 논해야 하지 않을까. 2시간이 넘는 대담에도 노학자의 눈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