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원전과 병원에서 운반된 방폐물 드럼은 경주 방폐장 인수저장 시설에서 표면방사선률검사 육안검사 등 7단계의 검사를 거쳐 지하처분시설 등에 영구 처분된다. 사진은 인수저장시설의 드럼 내부 샘플. 김화영 기자

- 옷·장갑 등 저준위 쓰레기 보관
- 경주 방사성폐기물처리장 건설
- 생존권 놓고 갈등 29년이나 걸려
- 사용후핵연료 시설 반발 더 클듯

- 국내 핵연료봉 재처리·보관장소
- 콘크리트 재활용 규정도 없는데
- 2019년부터 임시저장시설 포화
- 고리 1호기 폐로로 가속화 전망

- 처분비용마저 2024년 53조 추산
- 적립기금 겨우 2조2800억 그쳐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 해체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처리가 더 어렵다."

국가 에너지위원회가 고리 1호기의 '영구정지'를 결정한 지난 12일. 경성대 김해창(환경공학과) 교수는 "해체기술 개발에 못지않게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확보가 급하다"고 지적했다.

보통 110만㎾급 원자력발전소 1기를 철거하면 50만∼55만 t의 폐기물이 나온다. 콘크리트 97%를 제외한 약 6000t이 방사성폐기물이다. 여기에는 방사능에 오염된 원자로나 사용후핵연료도 상당수 포함된다. 우리나라는 아직 폐기된 핵연료봉의 영구 보관장소는 물론 콘크리트 재활용 규정조차 없다."

■저준위 방폐장 건설에 29년 걸려

방사성 폐기물은 고준위와 중·저준위로 나뉜다. 오는 24일 준공식을 하는 경북 경주시 양북면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은 원전 작업자들이 쓰고 버린 옷이나 장갑 등 저준위 쓰레기를 보관하는 장소다. 사용후핵연료는 아직 영구 저장할 곳이 없어 고리·한빛·한울·영광 발전소의 임시저장시설(수조)에 쌓아두고 있다.

지난 4월 23일 본격 가동을 앞둔 경주 방폐장을 찾았다. 지하로 1.4㎞를 천천히 따라 내려가자 축구장 3배 크기의 하역동굴과 사일로(콘크리트 처분용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해수면보다 95m 아래 지하에 설치된 사일로는 높이 50m, 지름 25m에 이른다. 대형 크레인 '트롤리'는 200ℓ 드럼 16개가 담긴 처분용기를 들어서 사일로에 차곡차곡 쌓는다. 사일로 1개당 1만6700드럼을 수용할 수 있다. 사일로에 쌓은 방사성폐기물의 처분 기간은 1400년이다. 2017년 2단계 공사를 시작해 총 7단계 공사를 마치면 경주 방폐장에는 폐기물 총 80만 드럼이 처분된다.

경주 방폐장은 '갈등의 역사'였다. 부지 선정부터 운영까지 29년이 소요됐다. 부지 선정은 1986년부터 9번이나 번복됐다. 폭력사태로까지 번졌다. 2003년 전북 부안군 위도가 부지로 선정됐을 때, 유치에 앞장선 부안군수가 주민에게 감금돼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단순한 반대가 아니었다. 원자력 폐기물이란 고위험 부담을 수 십만년 동안 감내할 수 있느냐는 '생존권'이 근본적 이유였다.

중저준위보다 훨씬 위험부담이 높은 고준위 처분장 설립까지는 더 심각한 갈등이 불 보듯 뻔하다.

한국원자력연구원 김건영 박사는 "핵폐기물 처분 선진국인 핀란드와 노르웨이 등은 발전을 시작하면서 처분도 동시에 고려한다. 우리나라는 '싼 전기 공급'에만 급급하다 보니 고준위 처분장 설치 논의는 늘 뒷전이었다"고 지적했다.

■고준위 방폐장은 이제 논의 단계

	숱한 갈등을 겪으며 부지선정부터 운영까지 29년이 걸린 경주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이 오는 24일 준공식을 갖고 가동된다. 사진은 방폐장 내 동굴처분시설 모습. 김화영 기자

고리 1호기가 상업운전을 시작한 1978년부터 국내 23기 원자로가 배출한 사용후핵연료는 1만9000t. 매년 750t가량이 나온다. 문제는 2019년부터 월성 1~4호기를 시작으로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이 가득찬다는 점이다. 고리 1호기 폐로 과정에서 쏟아질 폐기물은 포화를 가속화할 전망이다.

조창국 장안읍발전위원장은 "고리 주민들은 그동안 핵발전소 사고 위험과 사용후핵연료 보관에 따른 방사성 물질 누출 불안을 떠안고 살아왔다"며 "고리 1호기 영구정지를 계기로 사용후핵연료 영구 처분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영구 처분이란 핵폐기물을 지하 500m 이하 깊이의 동굴에 매립해 주거지와 철저히 격리하는 것이다. 사용후핵연료에서 방사성 위험 물질이 모두 사라지는 기간이 최소 30만 년인 만큼 고도의 설비가 필요하다.

정부는 2013년 뒤늦게 민·관 전문가 9명으로 구성된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위원회'를 출범했다. 위원회는 지난 11일 "고준위 처분장을 2051년까지 건설하라"고 정부에 권고했다. 또 2020년까지 핵연료 처분 지하연구소 입지를 선정해 2030년께 실증·검증 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가장 큰 걸림돌은 입지 선정 문제이다. 경주 방폐장 입지 선정에만 20년이 걸렸다. 강한 방사성 물질인 사용후핵연료를 저장하는 고준위 시설에 대한 반발은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한국수력원자력에 따르면 2024년까지 소요될 사용후핵연료 처분비용은 53조 원(2012년 기준)으로 추산된다. 지난해까지 적립한 기금은 2조2800억 원에 불과하다. 고리1호기 폐쇄 범시민본부 천현진 간사는 "원전 내 모든 핵폐기물 저장시설이 포화하고 있는 만큼 고준위폐기물 처분장 유치는 더 미룰 수 없는 과제"라면서 "원전 신규 건설 때 무조건 영구처분에 대한 문제를 고려하게끔 제도화하는 법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선진국도 '사용후핵연료' 고민

세계적으로도 사용후핵연료 폐기장을 건설·운영하는 사례는 없다. 스웨덴과 핀란드만 각각 2023년과 2020년을 목표로 주민 의견 수렴과 기술개발을 진행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9일 부산에서 열린 '제2회 기장포럼'에 참가한 해외 전문가들도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미국 글로벌전략경영원 제임스 안 부장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양의 방사성폐기물을 비축하고 있지만 중간 임시저장소도 없다"고 토로했다. 미국은 1980년대 후반부터 고준위 처분장 건설을 추진하다가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네바다주 유카산(Yucca Mt.)을 후보지로 선정했다. 그러나 2008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예산을 전액 삭감하면서 사업이 무산됐다. 방사능 누출을 우려한 현지 주민들의 반발이 커지자 오바마 정부가 계획을 전면 취소한 것이다.

'폐로산업 1번지'로 불리는 영국 셀라필드의 상황도 마찬가지. 고준위 폐기물을 보관할 심지층 처리시설(GDF) 건설이 극심한 반발로 중단 상태다. 영국 방사성 폐기물관리 전담기구(NDA)의 마크 웨어링 매니저는 "2040년까지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설치와 운영이 사실상 어렵다. 두꺼운 금속 벽 컨테이너를 이용하는 대체 전략을 수립해 위험한 폐기물을 저장한다는 계획"이라고 밝혔다.

반핵부산대책위는 15일 성명서에서 "우리나라보다 원전 해체를 앞서 시도한 국가 가운데 사용후핵연로 처분 문제 등으로 폐로가 지연된 적이 많다"면서 "정부는 해체 계획을 수립하는 단계에서부터 시민사회와 지자체, 지역주민 등 이해 당사자들이 직접 참여한 사회적 협의기구를 구성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경성대 김해창 교수는 "고리 1호기 영구정지 과정을 지켜본 많은 국민들이 사용후핵연료 처리 비용까지 감안하면 원자력이 결코 값 싼 에너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됐다"며 "원전을 쓰고 있는 우리 세대가 후손들에게 사용후핵연료 처리라는 무거운 짐을 떠넘겨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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