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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5월 발생한 부산 시크노래주점 화재 현장의 부상자 구조 장면 등 지역 소방관들의 활동 모습들. 국제신문DB |
- 시간 흘러도 처참한 장면 생생
- '구조통'도 20년 가까이 불면증
- 최근 6년새 부산 5명 목숨 끊어
- 고위험군 17.2% 전국 평균 상회
- 1인당 치유 예산 7000원도 안돼
- 가족 연계 상담 프로그램 절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쯤 나름의 신체적 정신적 위기를 겪지만,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이어질 정도의 심각한 상황에 노출되는 사람은 흔치 않다. 하지만 이런 위기가 일상화된 이들도 있다. 그런 직업군 중 하나가 사상(死傷) 사건·사고 현장에 상시 출동하는 소방관이다. 소방관에게 트라우마는 '직업병'이다.
■트라우마 못견뎌 자살 속출
"입사 초기엔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현장에 가는 게 무척 신이 났죠. 근데 지금은 어지럼증부터 생깁니다." 부산 해운대소방서 이홍렬 구조대장은 이따금씩 가슴팍이 질퍽해지도록 땀이 나고 호흡이 가빠지곤 한다. 과거 기억이 훅 스쳐 지나갈 때 생기는 증상이다. 이런 증상은 구조 활동 중 3층 높이의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져 죽을 뻔한 1996년부터 시작됐다. 그 때부터 정신치료약 없이는 잠을 못 잔다.
그는 1988년 부산에서 첫 설립된 119구조대(중부소방서)의 창설 멤버로 참여한 뒤 여태껏 현장을 누비고 있다. 대형 재난현장에 늘 함께하며 '구조통'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트라우마는 계속 깊어졌다. 1993년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사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 대장은 "시신 수습을 맡았다. 시신들 사이에 인형이 있어 무심코 꺼내들었는데 숨진 여자아이였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1995년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도 같은 일을 했다. 부패한 시신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는 눈으로 본 것보다 더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해운대구 우동 119안전센터의 이모(52) 구급대원은 2002년 김해 돗대산의 중국 민항기 추락사고 기억이 아직도 강렬하다. 그는 "시신을 뜯어내다시피 했다. 팔을 당기면 툭툭 떨어져 나왔다. 한 달 동안 고기를 입에 대지도 못했다"며 "구급 일을 하던 동기 2명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직장을 그만둬버렸다"고 전했다. 같은 센터에서 일하는 A 씨는 지난 6월 8일 사건 현장에서 받은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자해·투신소동이 벌어졌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는데 현장은 처참했다. 환각 상태에 빠진 남자가 여자 친구를 살해한 뒤 얼굴 피부를 벗겨낸 것이다. 같은 팀 동료 김민규 씨는 "A 씨가 이 사건 하나 때문에 입원한 것은 아니고 스트레스가 누적되다 보니 지탱할 수 있는 정신적 한계를 넘어선 것 같다"고 말했다.
"죽은 이의 혼령이 구급차 뒤칸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차에 오르는 것 자체가 두렵습니다." 동래구의 한 119안전센터에서 소방·구급 차량을 모는 이모(47) 소방장은 환시·환청 증상까지 겪고 있다. 오랜 세월 운전과 함께 현장 촬영 업무를 겸한 결과다. 흉기에 찔린 목에서 피를 쏟는 사람, 휴지처럼 구겨진 차 안에 쓰러진 상처 투성이의 사상자 등 참혹한 장면들을 수없이 카메라에 담으며 트라우마가 악화돼 갔다. 그는 "직렬은 무관하다. 소방서에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트라우마에 노출된다"고 말했다.
■쥐꼬리 예산…치유는 요원
소방관의 피로와 스트레스 누적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지난 4월 11일, 부산 B 소방서 김모 진압대원은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면 장애와 우울증을 동반한 트라우마가 사인으로 추정된다. 부산소방본부 관계자는 "업무 피로에 개인적인 고민이 더해지면서 자살로 이어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부산소방본부에 따르면 2008년부터 2013년까지 부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방관은 5명이다. 전국적으로는 39명에 이른다. 전국 18개 소방본부 가운데 부산이 3번째로 자살자가 많다. 그만큼 정신건강 상태가 심각하다는 얘기다. 지난 4월, 전국 소방공무원들의 심리검사를 한 결과 부산지역에서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소방관이 총원의 17.2%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국 평균치(11.4%)를 훨씬 웃도는 것이며, 지난해 검사 때 확인된 고위험군(5.6%)의 3배가 넘는 수치다.
하지만 소방방재청과 부산시의 트라우마 대응 시스템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부산소방본부는 2011년 3월부터 '찾아가는 심리 상담'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정신보건 전문가가 트라우마 테스트를 한 뒤 고위험군을 선별해 상담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이 일을 맡은 전문가가 소방방재청 산하 부산시재난심리지원센터 소속 인력 2명 뿐이어서 2596명이나 되는 지역 소방관들의 정신적 상처를 보살피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같은 사정은 예산난에서 기인한다. 소방관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부산시가 올해 지원한 예산은 1790만 원. 소방관 한 명당 7000원도 안 되는 금액이다. 소방본부 관계자는 "가족까지 연계해서 상담을 받아야 효과를 볼 수 있다"며 "제대로 된 치유 프로그램을 운용할 수 있도록 정부와 자치단체의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 "상설 상담센터 설치 조기 치료를"
■ 배정이 재난심리지원센터장
- '낙인찍기' 조직 분위기 쇄신도
"보통 사람이 평생 한 번 경험하기도 힘든 끔찍한 사건·사고를 소방관들은 늘 겪고 있죠. 그러니 날이 갈수록 스트레스는 쌓여가고 덩달아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도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배정이(인제대 간호학과 교수·사진) 부산시재난심리지원센터장은 부산지역 소방관들을 상담한 결과, 10명 중 2명 꼴로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2011년 3월부터 부산시내 67곳의 119안전센터를 순회하며 소방관들을 만나고 있다.
"소방관의 트라우마 유병률은 일반인보다 훨씬 높습니다. 일반인은 1.5%인 반면 소방관은 집단에 따라 최고 30%까지 증세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고 학계에 보고돼 있어요." 배 센터장은 설문조사 때 주위의 편견과 인사 불이익 등을 우려해 솔직하게 답변하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다며 조사를 통해 확인된 것보다 실제 트라우마 환자가 더 많을 것으로 예측했다.
소방관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트라우마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전환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라우마를 앓는다고 하면 '저 친구는 이상한 사람이니까 승진시키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게 현재의 조직 분위기죠. 이런 환경에서는 드러내놓고 상담이나 치료를 받기 어렵습니다. 자꾸 감추다 보면 트라우마는 만성화하고 결국 자살 등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집니다."
배 센터장은 이와 함께 참혹한 사건·사고를 겪었을 땐 반드시 조기에 상담·치료를 받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상설 상담센터를 설치해놓고 정신적 충격을 받을 만한 상황에 노출되면 3일 내에 상담·치료를 받도록 의무화돼 있어요. 우리처럼 형식적인 관리가 아니라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관리를 통해 소방관을 보호합니다." 그는 소방관 1인당 정신건강 관련 예산이 7000원도 안 되는 부산소방본부의 현실을 이에 대비시켰다. 이어 안타까움 깔린 호소를 덧붙였다. "가장 고생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홀대해서는 결코 우리 사회가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