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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참사(오른쪽) 현장과 부산 모 고교 수학여행 버스 참사 현장(왼쪽)의 합성 사진. |
■ 부산 모 고교 수학여행 참사
- '닮은꼴' 세월호 사고에 14년 전 악몽 떠올라 몸서리
- 당시 희생된 친구들 모습 떠올라 늘 상실감 속 예민한 상태 생활
- 교사들도 자책 속에 갇혀 살아
어두운 걸 못 참아 자기 전엔 꼭 불을 켜야 한다. 지난 7월 어느 비오는 밤, 인기척에 눈을 뜨니 암흑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 목덜미를 쓱 더듬는 것 같았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이모(32) 씨에게는 이런 가위눌림 증상이 어김없이 나타난다. 사고가 났던 날처럼 비가 오면 더 심하다. 죽은 친구가 자기 옆에 누워 쳐다보고 있기도 한다. 악몽과 멍해지는 증상도 자주 겪는다.
14년 전 7월 14일, 2학년이던 이 씨는 수학여행을 마치고 관광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피곤에 지친 친구들 모두 곯아떨어져 있었다. 급제동에 눈을 뜬 순간 '쾅'하며 앞차와 부딪혔다. 시커먼 연기가 얼굴을 덮쳤다. 연기를 연거푸 마신 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13명의 학생 사망자 모두 이 씨의 버스에서 나왔고, 남자는 7명만 살았다. 그는 "사고 후 친한 친구가 다 떠났다는 상실감에 늘 예민한 상태로 살았다"고 말했다. 사고 때 목격한 '검은 연기'는 이후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한 장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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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버스참사에서 구조된 후 울고 있는 여학생. 국제신문DB |
같은 차에 탔던 김모(여·32) 씨는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코가 내려앉고 두 귀는 머리 쪽으로 눌어붙었다. 김 씨는 "6년 간 화상 수술이 계속됐다. 지금도 피부 곳곳에 울퉁불퉁한 '떡살'이 남아있다"며 수줍게 팔을 내밀었다.
사고 후 감정 조절이 안 되는 건 큰 변화였다. 김 씨는 "반소매를 입고 서점에 갔는데 누군가 혼잣말로 '뭐야 징그럽게'라고 말했다. 순간 '욱'하고 화가 치솟아 욕하며 크게 싸운 적이 있다"고 일례를 들었다.
"쟤네들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나오려고 발버둥 쳤을 건데…." 세월호 참사 땐 한동안 눈물만 났다. 14년 전 기억이 떠올랐고, 어느 순간 자신도 단원고 학생이 돼 있었다. 김 씨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멍하다가 화가 난 뒤 의욕이 사라진다. 롤러코스트를 타듯 감정의 굴곡이 심하다. 두 달 동안 이런 증상이 지속되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당시 학생주임으로 여행에 동참했던 최모 교장도 지금까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제자들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원인이다. 그래서 사고 후 유족과 피해 학생들을 위로하는 게 일상이 돼버렸다. 자신처럼 교사가 된 제자 한 명은 세월호 참사 후 연락이 끊겼다. 그러다 몇 주 후 문자가 왔다. "선생님, 너무 힘들어요. 옛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요." 그 순간 최 교장의 억장이 무너졌다. "사고 당시에는 트라우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없었습니다. 정부나 자치단체가 심리 상담·치료를 할 생각조차 못했죠. 그 때문에 정신치료를 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지금 만성 트라우마로 신음하고 있어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지역 트라우마센터가 설립돼 치료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최 교장과 피해 학생들의 간절한 바람이다.
이들은 취재에 응하면서 학교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겨우 아물어 가는 상처가 덧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때 인터넷에 학교 이름과 함께 사고 얘기가 언급돼 모두 몸서리쳤다고 했다. 이 학교를 '모 고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연유다.
※모 고교 수학여행 버스 참사
2000년 7월 14일, 경북 김천시 봉산면의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상에서 부산 모 고교 수학여행단을 태운 관광버스 3대가 승용차 등과 연쇄 추돌했다. 이 사고로 버스 2대와 승용차가 전소됐고, 학생 13명 등 18명이 숨지고 97명이 부상했다. 당시 이 학교 학생 285명은 버스 7대를 나눠타고 강원·경기도 일대를 관광한 뒤 귀가하는 중이었다.
■ 구포열차 전복사고
- 나는 살고 그들은 죽었다는 죄책감 21년째 괴롭혀
- "남의 목숨으로 사는 것 같아"…생존자들 정상적 생활 불가능
- 당시 기관사는 우울증 시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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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포참사 생존자 박진환 씨. |
임신부가 오더니 자기 자리라며 비켜달라고 했다. 목적지인 부산 구포역까지 불과 한 정거장 남은 물금역에서였다. 입석표로 동대구역서부터 잘 앉아왔다고 여겼다. 뒤칸으로 옮겨 내릴 준비를 하기 위해 서 있는데, 갑자기 '쾅'하는 굉음과 함께 객차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넘어졌다. 객차 유리창을 깨고 탈출했지만, 그곳은 움푹 패인 구덩이의 가파른 비탈이었다. 같은 처지의 수많은 승객들이 탈출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먼저 올라서는 이는 어김없이 끌어내려졌다. 앞 사람의 다리를 잡고 올라서려다 굴러떨어지길 반복했다. 간신히 평지로 올라와서 보니 임신부가 탄 객차는 구덩이에 처박혀 휴지처럼 구겨져 있었다.
널브러진 시신과 부상자들의 귀를 찢는 비명…. 1993년 3월 28일,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참사를 겪은 박진환(66·부산 북구 구포동) 씨는 아직도 사고 현장의 지옥도가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는 당시 무릎뼈가 부러져 세 달간 깁스를 했다. 요즘도 비만 오면 무릎이 쑤시고 참혹한 참사 현장이 떠오라 밤잠을 설친다. 부상의 기억도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이지만, 정작 박 씨가 지금까지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요인은 죄책감이다.
자리를 내주는 바람에 임신부는 죽고 자신은 살았다는 죄책감이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 그래서 박 씨는 세 차례 받은 1000만 원가량의 피해보상금을 전부 부산 북구청에 기부했다.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고 싶어서였다. 그는 사고 후 봉사에 모든 신경을 쏟았다. 매년 사고가 난 날이면 수십만 원을 들여 사고지점 근처에서 제사를 지냈다. "남의 목숨을 받아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보은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더라고요. 매년 수백만 원씩 기부하다 보니 주위에서 나보고 정신병자가 됐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이혼하자는 말까지 할 정도였어요." 박 씨는 감정이 격해지는지 가슴에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원인이야 어떻건 간에 종착역까지 안전하게 승객을 못 모셨잖아요. 그런 죄책감이 저를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사고열차를 몰았던 기관사 이모(53) 씨에게도 지난 21년은 순탄치 않은 세월이었다. 세월호 참사 같은 사고 소식이 들릴 때마다 어김없이 당시의 끔찍했던 현장이 떠올라 우울증에 시달린다. 사고 후 몇 년간은 고통이 극심했다. 6개월을 쉬었지만 적응이 안돼 2개월의 병가를 더 써야 했다. 기관차에 다시 오를 자신이 없어서였다. 기관차와 객차를 연결·분리하는 '이판' 작업을 하며 겨우 운전대를 잡고서도 구포역 이북 지역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자신과의 고투 끝에 6개월 후 서울·부산 간 장거리 운행에 복귀했지만, 구포역을 지날 때마다 진땀, 가슴 울렁증과 함께 떠오르는 사고 기억을 억누르기는 힘들었다.
구포역 인근 주민 김의중(68) 씨는 사고가 나자 바로 현장에 달려갔다. 구조를 돕기 위해서였다. 열차 사이에 낀 사람, 피비린내, 처참하게 훼손된 시신은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그는 "지옥 같았다. 끔찍한 모습에 질려 적극적인 구조를 못 했다. 열차 밖으로 튕겨 나온 사람들만 안전한 곳에 옮기는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지금도 조명이 밝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불안해요. 그때 생각에 움츠러듭니다." 그는 당시 밤새도록 사고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수많은 구조용 조명이 환하게 현장을 밝혔었고, 그 모습이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사고
1993년 3월 28일, 구포역 부근 경부선 하행선상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전복돼 78명의 사망자와 198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시공사(삼성종합건설)가 궤도 아래를 관통하는 지하 전력구를 건설하려고 사전 협의 없이 발파작업을 한 게 참사의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