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부산등산연구소 실내암장 개장식을 앞두고 노종백 소장(왼쪽)이 암장을 둘러보고 있다.

- 금정산 부채바위 첫 개척
- 가마불계곡 빙벽 찾아내
- 록클라이밍 산악회 창설
- 히말라야 원정까지 성공
- 등산교실 설립, 강습회도

부산 산악계의 등반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노종백(1949~2010) 씨다. 그는 30대 젊은 나이에 전문 클라이머를 자임하며 등산연구소를 설립했다. 1983년 문을 연 부산등산연구소는 직원 한 명 없는 1인 연구소였지만, 등산연구소라 이름 붙인 사설기관으로는 국내 두 번째였다. 산악문화에 대한 관심과 천착이 남달랐던 그는 금정산을 비롯한 부산·경남의 주요 암벽과 빙벽 개척에서부터 해외원정, 부산지역 등산문화에 대한 연구와 대중화 작업 등 광범위한 활동을 폈다.

노 소장의 산악 인생은 1965년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시작됐다. 군용 텐트를 치고 항고(飯哈) 밥을 해먹는 재미로 학업은 뒤로하고 산에만 쫓아다니다 학교를 세 번이나 옮겼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려산악회에 들어간 그는 산에 대해 눈을 뜰 무렵, 경남상고 산악부·해병대 산악반 출신 권강수와 양정고 산악부 출신 현익만을 만났다. 의기투합한 이들은 금정산 부채바위 개척에 나섰다. 1968년 가을 권강수의 군용 마닐라 로프와 군용 카라비너, 현익만의 등반 로프, 철공소에서 직접 만든 하켄과 볼트 등을 가지고 몇 달간 바위에 매달렸다. 이때 개척한 루트가 북면 '기존A' 코스다. 이듬해 부채바위 개척보고서를 냈는데, 이는 공식적으로 부산 최초의 암벽 루트 개척으로 기록된다.

그 후 세 사람은 부산에 없던 록클라이밍 전문 산악회를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고, 1969년 창립한 산악회가 오늘날 클라이머 집단으로 성장한 '부산크라이머스'다. 이들은 부채바위 개척의 소문을 듣고 모여든 패기에 찬 젊은 산악인들과 함께 부산·경남의 암장을 찾아 종횡무진 활약을 펼쳤다. 1970년 권강수 현익만 등이 금정산 상계봉의 기존 루트를 열었고, 1973년에는 이종량 회원 등이 밀양 백운산 암장을 개척했다. 이러한 등반활동의 기획과 추진은 항상 노 소장의 몫이었다.

그 당시 괄목할만한 활동은 가마불계곡의 빙벽 개척이다. 1970년을 전후해 부산의 클라이머들은 빙벽 기초훈련을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허비하며 설악산에 갔다.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부산·경남 일원의 계곡을 누비다 찾아낸 훈련장이 밀양 얼음골의 가마불계곡이다. 2년에 걸친 시도 끝에 1974년 노 소장과 이종량 회원이 빙폭을 완등, 부산 빙벽 등반사에 큰 획을 그었다. 개척 당시 노 소장은 맹호부대원으로 월남에 파병됐다가 귀국해 휴가 중이었다. 등반에 열중한 나머지 귀대일자를 깜빡 놓치고 말았고, 부대에서 탈영보고를 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는 웃지 못할 후일담이다.

1980년대 노 소장의 활동은 히말라야 등반으로 이어졌다. 대한산악연맹 부산연맹 기술이사로 활동하던 그는 가맹단체 회원들과 합동대를 조직, 1984년 탐세르쿠(6618m) 한국 초등의 쾌거를 이뤘다. 당시 부산은 원정 경비를 지원해 줄 후원자를 구하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웠던 만큼 열악한 상황에서 이룬 값진 성과였다. 이듬해 대구 파라마운트 산악회의 동계 캉테가(6779m) 원정에 참가, 동계 초등에 힘을 보태는 등 부산 산악계 초창기 히말라야 원정의 선구적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990년에는 '한일 합동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장을 맡아 부산 산악인 3명(복진영 김재수 박창우)을 정상에 올려, 세계 최고봉 부산 초등의 꿈을 이뤘다. 2002년에는 산악회 후배들과 한국 최초의 히말라야 빙벽등반대를 꾸려, 꽝데(6187m) 북서벽의 빙벽을 통산 세 번째로 완등해 한국 초등을 일궈냈다. 이러한 공로로 1991년 금정대상을, 2009년에는 월간 '사람과 산'이 수여하는 산악지도자상을 받았다.

그러나 노 소장에게 마냥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에베레스트 원정 때 대원 1명이 추락사하고, 그가 아끼던 후배가 동상으로 발가락을 모두 자르는 아픔도 있었다. 원정경비 마련을 위해 자택을 처분한 일로 가족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산에 관한 기획력은 뛰어났지만, 타협을 모르는 외골수에다 개성이 강해 선후배들과 인간관계가 원만치 못했다. 그러다 보니 때론 잘한 일도 평가절하돼 인정받지 못하거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노 소장만큼 굳건한 집념과 전심전력을 쏟아부어 산을 사랑한 산악인은 부산에 그리 많지 않다. 40여 년간 부산지역 산악문화 발전에 헌신한, 부산 등반계의 역사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노 소장은 주변의 평과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2003년 부산등산연구소 부설 부산등산교실을 설립, 시민을 위한 무료 강습회를 열었다. 정규반 외에도 여성교실, 사진촬영과 GPS 강습회 등 특별반도 개설했다. 2008년에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산악도서실까지 갖춘 실내암장을 개장, 스포츠클라이밍의 대중화에 마지막 정열을 쏟았다. 침과 뜸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무료급식 노인들에게 치료봉사를 하는 한편, 부산의 원로 산악인들을 초청해 대접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의 산에서 모든 것을 배우고 이룬, 산밖에 몰랐던 노 소장의 소원은 부산지역에 산악문화가 활짝 피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병으로 2010년 61세의 아까운 나이에 등산 세계와의 인연을 영영 끊고 말았다.

부산산악연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