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소설가이자 향토사학자인 최해군 선생이 부산 연제구 거제동 자신의 아파트에서 '부산학'과 문학, 가족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박창희 선임기자

- 한평생 향토사 연구한 소설가
- 저서 27권 중 15권이 지역사
- 12년 동안 아내와 딸 병수발
- 기막힌 처지에도 항상 미소

이 어른으로 말하자면 '부산학'과 준 동의어다. 그만큼 오래, 깊이, 헌신적으로 부산을 연구한 사람이 없다. 부산학의 뼈와 살이 부산에 대한 애정과 연구 탐사, 집요한 기록의 산물이라고 할 때, 그는 이 지난한 작업의 으뜸 자리에 앉힌다. 그래서 어른이다.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일곱. 그가 펴낸 27권의 책 중 소설과 문학책이 12권이고, 부산의 역사를 다룬 것이 15권이다. 본령인 소설이 향토사학에 압도당했다고나 할까.

최근 그를 인터뷰하면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았다. 온화하고 다감한 그에게 외로움이, 그것도 산 같은 외로움이 황혼처럼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를, 이 어른을 단순한 작가·향토사학자로만 알았던 게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는 털털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 다 그런 거여. 나이 들면 외로워지고 아프면 서럽고…. 그렇게 강물처럼 흘러 바다가 되는 거여."

인터뷰 말미에 가족사를 슬쩍 여쭤본 것이 결과적으로 '뇌관'을 건드린 꼴이 되었다. 숨기진 않았으나 말하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무슨 소문을 낼 일이라고, 이제 생활이 돼 버렸는 걸…. 그렇게 12년을 살았는데 뭐…." 그가 다시 껄껄 웃었다. 웃음 따라 희미한 외로움이 떠다녔다.

최 작가는 1990년 초부터 연제구 거제현대아파트에서 부인 김기분(84) 씨와 함께 살고 있다. 부인은 오래전부터 병환 중이다. 병명은 인지장애, 즉 치매다. 12년 전의 일이라니 까마득한 세월 저편이다. 지금은 조금 나아져 사람 정도를 알아보지만, 몇 년 전까지 못 일어나 장기간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최 작가의 막내딸(57)마저 오랜 병치레(정신장애)를 겪고 있다. 어려서부터 뇌성마비를 앓아온 막내딸은 50세를 넘기며 뇌졸중으로 쓰러져 아예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아파트에 파출부가 오지만, 부인의 수발과 딸 간호는 최 작가의 몫이다. 요즘도 그는 병원비를 내기 위해 주기적으로 딸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오간다. 작가는 이 기막힌 처지를 몇년 전 자신의 수필에 담아낸 적이 있다.

'오후 2시, 항상 문이 열린 그대로인 노인병원 별관 입원실 302호실로 들어갔다. 아내는 구석진 침대에 앉은 채 멍청히 병실 문쪽을 바라본다. …간병사가 와서 환자의 아랫도리를 벗기며 나에게 곁눈질을 했다. 나가달라는 말이었다. …퀴퀴한 냄새는 복도나 병실이나 다를 바 없다. …이번에는 신관에 있는 작은 딸 한이 병실로 가야 했다. 신관에 오르는 난간 모서리를 잡고 한동안을 멈췄다가 현관으로 들어 소파에 앉았다.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소파에서 머리를 식혔다. 신관 딸애의 방도 제 어머니가 있는 방과 다름없다'.

부인과 딸의 병 수발을 십수 년째 해오면서도 최 작가의 표정은 어둡지 않다. 얼마 전엔 노환 탓인지 탈장이 생겨 수술까지 했다는데도 웃을 땐 얼굴에 살짝 홍조가 내비친다. 어디서 이런 홍조가 발원하는지 모를 일이다. '부산 이야기 62마당' 등 최 작가의 지역사 관련 대부분의 책을 펴내온 도서출판 해성 김성배 대표는 "당신은 지금도 노추(老醜)를 걱정하고, 사후의 평가를 저어하는 모습을 보이신다"면서 "이런 어른이 우리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우린 행복한 것"이라고 했다.

눈썹마저 희끗해진 최 작가에게 "신선처럼 보이신다"고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허허, 나는 소설가예요. 그런데 인자 손이 떨려서 못 써요. 안 써져요."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