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 만에 강도 누명을 벗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14일 오후 부산 동구 부산역에서 만난 권혁호(66·동구 초량동) 씨는 부친인 고 권잠술 선생이 일제강점 시절 강도죄로 7년형을 선고받은 지 90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선생은 1898년 경남 밀양 부내면 내일동에서 태어나 22살 때인 1920년 10월부터 다음 해 5월 사이 밀양 부호 안홍원으로부터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5만 원(현재 약 40억 원, 당시 쌀 한 가마 2원)을 모금하다 3000원을 강취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당시 권 선생은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 홍재문 선생(1990년 애국장 수훈), 김덕곤 선생과 의기투합해 일을 도모했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1921년 대구고등법원에서 강도죄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26년 2월 가석방됐다. 선생은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다 1965년 골수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광복된 지 66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서야 강도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한 것은 스스로 공을 내세우지 않던 겸손한 성격 때문이다. 선생의 4남 혁호 씨는 "어릴 때 밀양군에서 3·1절이 되면 아버지에게 표창장과 놋그릇 세트 등 기념품을 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 친구분들도 '너희 아버지는 우리와 비교도 안 될 만큼 큰일과 수고를 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아버지가 뭔가 큰일을 하셨다고 짐작했지만 단 한 번도 독립운동 행적에 대해 말씀해 주신 적이 없어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은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말했다.

혁호 씨가 부친의 독립운동 행적을 찾아나서기 시작한 건 2009년. "어느날 여동생에게 전화가 왔어요. 꿈을 꿨는데 흐르는 물 위에 아버지와 제가 앉아 있더라는 겁니다. 흐르는 물을 역사로 봤을 때, 흐르는 물 위에서 떠내려가지 않고 앉아 있었다는 건 뭔가 회한이 있다는 메시지로 읽혔습니다."

혁호 씨는 당장 서울 국가기록원을 찾아 아버지의 재판 기록을 살폈다.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에 도움을 청해 권 선생 사건과 관련한 자료도 수집했다.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국가보훈처에 서훈 신청을 했지만 몇 차례 '활동 성격 불분명'이라는 이름으로 유보 처분을 받았다. 포기하지 않고 자료를 보태고 수정한 끝에 15일 제66주년 광복절을 맞아 권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애족장을 받게 됐다. 

혁호 씨는 "아버지의 성품과 당시 어렵지 않았던 가정형편으로 미루어 강도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버지가 강도 누명을 벗게 돼 더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억장이 무너집니다. 독립운동 공적은 인정하면서도 친일을 하지 않은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 유공자 서훈을 못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을 역임한 백농(白農) 이규홍(1893~1939) 선생의 손자 이경우(60·경기 안산시) 씨는 14일 절규에 가까운 하소연을 토해냈다. 올해도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 포상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1930년 귀국 후부터 사망할 때까지 9년간의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게 제외 이유다.

경남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출신인 이규홍 선생이 살아온 이력을 보면 보훈처의 결정은 석연찮다. 선생은 1916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 귀국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7년 부산 백산상회 건너편 일광상회라는 위장 무역업을 경영하며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 1919년 3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경상도 선출의원, 청년단 출판부장, 재무총장, 의정원 부의장, 국무원, 임시헌법개정 위원으로 활동했다.

상해임시정부 각료들이 찍은 사진에는 선생이 빠지지 않고 나온다. 국내 독립운동사 사료에는 임시정부의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등의 활약상이 기록돼 있다. 무엇보다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국내항일독립운동 및 국가수호사적지 조사보고서'를 통해 이규홍 선생의 생가 터까지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보훈처는 유족 종친회 양산지역향토연구사 등의 수십 년간 이어진 호소에도 서훈을 거부하고 있다. 광복 전에 귀국한 뒤 사망할 때까지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은 만큼 변절·친일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유족과 양산지역 향토사학자들에 따르면 선생은 귀국 후 투병생활을 했다. 상해에서 중병을 얻어 가족들이 고향인 양산으로 모셔왔다는 것이다.

선생의 손자 이 씨는 "할머니와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당시 아래채에는 일본경찰이 상시 거주하며 할아버지의 활동을 감시했고, 일본 외무성 자료에도 요시찰 인물로 기록돼 있다"며 "변절이나 투항, 친일을 했다면 오히려 근거가 있겠지만 친일명부에도 들어가 있지 않은 분을 추측만으로 서훈을 거부하는 보훈처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부처인지 묻고 싶다"며 답답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