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북극해 중요성 커지면서
- 국가차원 북극정책·전략 추진

- LNG·디젤엔진 동시 탑재한 배
- '폴라리스' 세계 최초로 건조 중

- 연구센터·인력 등 인프라 탄탄
- 국제기구 '북극이사회'도 이끌어

"어? 없다!"

	아크테크 헬싱키 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첨단 쇄빙선 폴라리스를 취재진이 둘러보고 있다. 아리 혼카넨 제공·조봉권 기자

여기는 핀란드 수도 헬싱키 번화가의 호텔 글로 클루비(Hotel Glo Kluuvi). 여행책자에 '시내 중심가의 고급 호텔'로 나온 곳이다. 객실로 가려고 엘리베이터에 탄 뒤 '닫힘' 버튼을 누르려고 무심코 손을 뻗었다. 근데 닫힘 버튼을 아예 안 만들어 놓았다. 열림과 비상호출 그리고 층수 버튼뿐이다. 잠깐 기다리니 문은 자동으로 닫혔지만, 그 잠깐이 낯설다. 속으로 "한국 같으면 속 터진다고 난리 났겠네…" 하는 생각이 솔직히 들었다.

핀란드 외교부 초청으로 지난 3~8일 참가한 '외국 언론인을 위한 핀란드 북극산업 현장 방문(Arctic Media Visit to Finland)'의 첫날이었다.

핀란드의 첫 인상은 이렇게 조금은 낯선 '느긋함'으로 왔다.

도착한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헬싱키 중심가와 몇 군데 관광지는 한산하기만 하다.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 가게마저 거의 문을 닫았다. 오후 다섯 시밖에 안 된 시각이었다. 눈을 씻고 봐도 24시간 편의점은 하나도 찾을 수 없고, 화려한 네온사인도 보기 힘들다.

건널목에는 따로 정지선을 그려놓지 않았건만, 자동차는 보행자를 보면 먼저 멈췄고 보행자는 차를 별로 경계하지 않았다(부산에서 간 나그네에게는 이 점이 또 낯설다). 시내는 전차(트램)가 주로 다니게 돼 있어 분위기는 평온하다. '아등바등'을 느끼기 힘들다.

■핀란드 해양산업은 곧 북극산업

그런데 막상 '핀란드 북극산업 현장 방문'의 뚜껑을 열자, 이런 인상은 급속히 달라졌다.

핀란드는 북극해에 직접 면한 나라는 아니지만, 국토의 상당 부분이 북극권에 속하는 북유럽의 나라다. 북유럽의 내해인 발틱해도 접하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겨울철에 모든 항구가 얼음에 갇혀버릴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2012년 핀란드 외교부 자료)이다. 그래서 핀란드는 혹한, 바람, 얼음에 맞서거나 이를 관리하고 활용하는 기술과 산업을 오랜 세월 가꾸고 경험을 쌓았다.

최근 몇 년 사이 극지인 북극해의 중요성이 빠르게 커지면서 핀란드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주었다. 바로 북극산업(the Arctic Business and Industry)이다. 2013년 핀란드 정부는 신북극전략(New Arctic Strategy)을 의결하고 폭넓고 적극적인 북극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로 설립 20주년을 맞는 국제기구 북극이사회(the Arctic Council)도 주도한다. 이런 이유로 핀란드에서 해양산업이란 곧 '북극산업'을 뜻한다.

북극산업에 관한 한, 핀란드는 느긋한 나라가 전혀 아니었다. 약점을 끌어안아 강점으로 바꾸고, 역경을 오히려 자산으로 활용하는 핀란드 특유의 창의성과 실용주의는 북극산업 영역에서 폭넓게, 착착, 맹렬하게 돌아가고 있다. '느긋하다'는 말은 취소해야 할 것 같았다.

■한국 기업에도 쇄빙선 추진체 수출

	ABB 마린 앤 포트사의 아지포드 제작 현장.

아커 아크틱(Aker Arctic) 테크놀로지는 헬싱키 시내에 있는 쇄빙선 및 극지 항해 선박(ice-going vessels) 디자인 전문회사다. "우리는 자체 실험설비를 갖췄고 해상운송, 해상구조물과 항만, 항해시스템, 전문가 연수까지 다양한 일도 하죠. 2005년 개별 기업으로 독립했지만, 실질적인 역사는 70년이 넘어요."

한국 미국 러시아 덴마크 노르웨이에서 온 기자단을 안내한 아르토 우우스칼리오 세일즈 매니저는 이 회사의 길이 76m짜리 얼음실험 수조를 안내하면서 덧붙였다. "현재 세계에서 활동하는 쇄빙선(Icebreaker)은 110대 정도로 추산하는데 이 가운데 60%를 핀란드에서 디자인하고 만들었죠." 이 "현존하는 세계 쇄빙선의 60%가 핀란드산"이란 말은 핀란드 탐방기간 내내 무척 많이 듣게 된다. 자부심이 느껴졌다.

	VTT연구소의 선박 실험실.

이어 방문한 ABB 마린 앤 포트사는 쇄빙선에 장착하는 첨단 전기추진 시스템인 아지포드(Azipod)로 유명한 기업. 부산에 자회사인 ABB코리아가 있어 이 회사 사람들은 '부산 사람'을 더 반겼다. 사카리 소리시모 선임 부사장은 거대한 공장을 안내하며 "첨단 아지포드 시스템은 전기로 가동하며, 별도의기어가 필요없고, 얼음이 들어찬 바다에서 탁월한 기능을 발휘한다"며 한쪽을 가리켰다. 그는 "완성 단계인 저 아지포드 추진체는 조만간 한국의 거제도에 있는 삼성중공업으로 옮겨가 거기서 건조 중인 선박에 장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부산이 참고할 점 있을까

	1975년 건조한 현역 쇄빙선 우르호.

쇄빙선 7척을 운용하는 공기업인 아크티아(Arctia)사에서는 지금도 늠름하게 현역으로 활동하는 쇄빙선 보이마(1954년 건조), 우르호(1975년 건조), 시수(1976년 건조)를 직접 볼 수 있었다. "1954년에 만든 쇄빙선이 지금도 얼음을 깨고 다닌다"는 아크티아사 이이로 호카넨 홍보매니저의 설명에 놀랄 틈도 없이 일행은 이번에는 최첨단 쇄빙선 건조 현장으로 안내됐다. 헬싱키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바닷가에 있는 아크테크(Arctech) 헬싱키 조선소에서는 최신형 쇄빙선 폴라리스의 마무리 건조 작업이 한창이었다.

마르쿠 카요사리 수석 부사장은 전쟁 같은 막바지 작업이 펼쳐지는 폴라리스 내부를 일행에게 보여주면서 "몇 주 뒤 선체를 완성해 바다로 나가 시험 운항을 한다. 세계 최초로 LNG엔진과 디젤엔진을 동시에 갖춘 첨단 아이스브레이커로 기능뿐 아니라 환경보존 측면에서도 탁월한 배가 될 것"이라고 자부심을 담아 말했다.

이 같은 북극산업 최전선의 기업뿐 아니라 알토대학교 공과대학, 2600여 명 연구진을 보유한 북유럽 최대의 VTT국가기술연구센터 등이 헬싱키 시내와 근처에 집약돼 있어 자기 분야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발휘하는 점이 매우 인상 깊었다. 자연스럽게 해양도시 부산의 해양산업 체제에 참고할 점은 없는지 생각하게 됐다.

핀란드 외교부 아리 혼카넨 씨는 "북극 지역에는 세계 미개발 원유의 13%와 천연가스 30%가 있다고 추정된다. 북극항로가 본격적으로 열리면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화물선 운항 기간이 10일 이상 단축된다"고 말했다. 난관을 기회로 만드는 핀란드의 도전이 계속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