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엔지니어링토건에서 시공을 맡은 남극 세종기지 부두 공사 현장.

- 극지서 공사·기업 이미지 제고
- 남극에 부두 건설 가슴 뿌듯

- 지역 이기주의·정치논리 떠나
- 부산이 북극항로 출발 최적지

2003년 제17차 남극월동대 때의 일이었다. 세종과학기지에서 근무하던 27살 꽃다운 나이의 전재규 대원이 고무보트가 전복되면서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기상 악화로 귀환하지 못한 3명의 대원을 구조하려다가 인명피해를 낸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남극기지의 열악한 환경이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특단의 조치로 1000억 원이 넘는 쇄빙선 건조를 지시했다. 유능한 한 대원의 죽음이 남극기지에 희망을 선사한 셈이 되었다.

정부는 또 쇄빙선 건조가 될 때까지 남극기지에서 사용할 수 있는 100t급 배 한 척을 건조해 주었다. 그런데 세종기지에는 배를 접안할 부두가 없었다. 2004년 극지연구소는 세종기지 근무 경험자에다 토목업을 하는 나에게 자문했다. 설계사무소가 만든 부두 설계도를 보니 기후나 계절별 지질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나의 조언을 귀담아듣던 극지연구소는 아예 나에게 부두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10년 만에, 남극과의 인연이 그렇게 이어졌다.

사실 남극의 토목공사는 기후나 환경 등을 알지 못하면 힘들고 위험해 남는 게 없는 장사다. 현대나 삼성 같은 대기업이 남극 공사를 수주하려고 경쟁하는 건 이윤이 목적이 아니었다. 극지에서의 공사경험이라는 무형의 자산과 기업 이미지를 높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손해를 보고서라도 하려는 것이다.

나 역시 남극에 대한 지독한 인연으로 다시 일을 맡았다. 세종기지 부두건설 참여로 남극에 대한 애정과 순수성이 훼손되는 게 싫었다. 그래서 극지연구소와 인건비를 받는 정도의 형식적 계약을 체결하고 돈이 드는 자재와 장비는 직접 조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부두공사는 우리 회사 직원 5명이 칠레근로자 10여 명을 고용해 시공했다.

부두 설계는 애초에 배를 줄로 끌어 육지 위로 올리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극지연구소 남상헌 박사의 아이디어로 바다에 유빙을 막는 게이트를 설치함으로써 굳이 배를 끌어 올릴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공사는 2005년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남극기지 건설과 관련된 증빙자료는 일부러 보관을 해두었다.

전재규 대원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이 쇄빙선을 만드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우리나라가 쇄빙선을 만든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쇄빙선은 남북극기지뿐 아니라 국익 차원에서도 정말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쇄빙선은 배가 얼음 위로 올라타 배의 무게로 얼음을 깨고 전진하면 고물 밑바닥의 아이스 나이프가 빙판을 좌우로 밀어내는 구조를 가진 배다. 따라서 일반 선박에 비해 매우 무겁다. 엔진 출력도 크고, 얼음을 깨기 쉬운 뱃머리 구조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조선기술은 세계 제일이지만 1m 두께의 얼음을 뚫고 나가야 하는 쇄빙선은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뚫고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는 건조 3년 만인 2009년 6월 11일 쇄빙연구선 '아라온호'를 탄생시켰다. 극지연구소 쇄빙선 건조사업단의 노력도 큰 힘이 되었다.

우리나라가 남극기지를 세우고 자력으로 쇄빙선을 건조한 것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우선 우리 남극기지가 쇄빙선을 갖추고 제대로 연구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또 다른 의미는 북극항로다. 기후 온난화에 따라 여러 개의 북극항로를 개척 중인데 20년 안에는 상용화될 전망이다. 뱃길이 열렸다 하더라도 북극항로를 그냥 항해하지는 못한다. 충돌의 위험 때문에 맨 앞에 쇄빙선이 서고 내빙선이나 일반선이 뒤따라가야 안전하다.

통행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이들 배를 이끌 많은 쇄빙선이 필요하다. 선박건조 기술이 세계 최고인 우리나라가 쇄빙선을 만들 경우 가격경쟁력 애프터서비스(A/S) 등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가 없게 된다. 한마디로 쇄빙선 하나로 우리나라 조선업이 한 단계 도약할 계기가 마련되는 셈이다.

지구본을 거꾸로 세워놓고 보면 부산은 축복받은 도시다. 남극항로와 북극항로의 일직선상에 부산이 놓여 있는 것이다. 최단거리인 데다 쇄빙선도 부산에서 만들어졌다. 쇄빙선은 북극항로의 초입에서부터 앞장서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다. 그 도시도 바로 부산이다.

그뿐만 아니라 북극항로가 개발되면 부산항은 최적의 물류 메카가 된다. 북극항로로 갈 화물을 부산항에 모아 행선지별로 분류하면 더욱 운임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중국 해안도시에서 대형 화물선이 서해를 거쳐 부산까지 오는데 대략 2, 3일 걸리고 기름값이 7000~8000만 원이나 소요된다. 중국은 북극항로에 대비해 북한의 나진·선봉지구를 50년간 임차해 쓰기로 했다. 일본 고베항도 북극항로 대비에 나섰다. 경쟁국을 앞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상의 입지를 지닌 부산에 모든 기능을 집결시키는 길뿐이다.

아직도 극지연구소는 인천에 있다. 일각에선 해양과 극지는 별개라고 선을 긋는다. 그게 과연 그런가. 현실적으로 남극과 북극의 개척은 해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정학적으로 그 출발점은 부산 외에 거론할 바가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해양과 극지가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제2 극지연구소든 해양이나 극지와 관련 있는 기관들은 부산에 다 모여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해양은 물론 남북 극지와 가장 가까운 장소가 부산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역 이기주의도, 정치적 논리 때문도 결코 아니다. 오랜 세월 남극과 인연을 맺어 온 나로선 이런 모든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남경엔지니어링토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