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신문을 뒤적이다 마주한 '탄신(誕辰)'이라는 용어는 당혹스러움 그 자체다. 탄신은 임금이나 성인이 태어난 날을 뜻한다. 임금이 군주정치를 대표하는 반면 성인은 지혜와 덕이 뛰어나 길이 우러러 본받을 만한 사람을 일컫는다. 그래서 탄신은 특정 종교나 사상의 차원에서 성인이 태어난 날을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그것이 일반적일 뿐 모든 것을 아우르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신문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어느 탄신은 의아하다.

단정 수립 이듬해 3월 26일 전후, 중앙 일간지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탄일(誕日)'과 '탄신 축하식' 소식을 일제히 보도한다. 초대 대통령의 예우라기에는 일단 '탄신'이라는 용어부터 거북하다. 거기에 '한국의 영광'인 대통령, 그의 건강을 축원하는 탄신축하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는 기사가 더해진다. 그 시절에도 종교를 떠난 탄신일은 세종대왕과 이충무공에 현양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정치인의 탄신행사를 정치적 책략으로 널리 이용했던 것은 히틀러가 대표적이다. 이에 못지않던 일제강점기 천황 탄신행사 또한 식민지 조선인이 치 떨며 감내해야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뜬금없이 이승만 대통령의 '탄신 축하식'이라니. 그것은 그가 제창했던 일민주의, 이른바 국민 대통합을 앞세운 이승만식 반공주의가 이미 '우리의 영명하신 최고 영도자' 1인을 위한 국시로 변질되고 있다는 증표 아니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그해 탄신 축하식은 더욱 가열된 양상을 띤다. 여기에 국영방송 서울중앙방송국이 전면에 나선다. 전기 공급이 열악했던 상황에도 대대적인 탄신 축하행사를 위해 서울중앙방송국은 종일 방송을 감행한다. 그해를 통틀어 라디오방송이 하루 내내 가능했던 것은 단 하루, 이승만 대통령 '탄신일'뿐이었다. 이러한 탄신 행사는 1951년을 제외한 한국전쟁 와중에도, 그리고 3·15부정선거 직후에도 정도를 달리할 뿐 계속되었다.

탄신이라는 이름 아래 도사리고 있던 권력에의 욕망과 아집,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합작품이었다. 탄신 행사가 이어지는 동안 독재정권의 아성은 굳건해졌고, 그러한 정권의 부정과 부패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선거 정국이 아니라면 국민의 피폐한 삶은 손쉽게 도외시되었다. 결국 모든 것은 4·19혁명의 함성 속에서 막을 내렸다. 그랬던 1950년대가 우리는 왜 그리 낯설지 않은가.

대통령 탄핵정국이 막바지에 달했다. 헌재가 탄핵심판 시기를 결정했지만 진통은 여전하다. 특검 수사를 성실히 받겠다던 대통령은 발언과 달리 노골적인 지연전략 속에 조사가 무산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에 발맞추듯 헌재를 향한 대통령 대변인단의 무례함이 극단으로 치닫고, 자취를 감추었던 탄핵 기각의 목소리도 당명만 바꾼 여당에서 다시 높아지고 있다. 이 가운데 국민적 지지를 받아온 특검은 수사기간의 연장이 불투명한 상황에 처했다.

생뚱맞게 관행을 문제 삼아 특검법 개정안이 거부당한 가운데 이제 황교안 권한대행의 결정만 남겨뒀다. 탄핵정국을 이끌어냈던 촛불집회, 1000만이 넘는 국민의 한결같은 염원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건만 다시 막막하게 기다려야 하는 형국에 이르다니.

일찍이 장자는 '개철지어(個轍之漁)'라는 말로 세상을 경계한 바 있다. 수레바퀴가 지나간 바로 그 자리에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 물속에 고기 한 마리가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구해달라고 애걸복걸하며 빈다. 이때 행인은 동해 물을 끌어들일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그러자 물고기가 "그때는 나를 어물전 말라죽은 고기에서 찾으라"고 비명을 질렀다 한다. 물고기의 비명이 이즈음 우리네 애끓는 기다림과 얼마나 다를까.

탄핵정국을 초래하고 또 이어지는 기나긴 시간, 우리는 개철지어의 희생을 감내하며 울분을 삼켜야 했다. 창조경제의 화려한 깃발 아래 시행된 청년실업 대책은 비정규직만 양산하다 결국 공무원시험에 매달리게 했다. 게다가 창업전선을 약화시키면서 청년층을 넘어선 실업의 위기감을 사회 전반에 팽배하게 했다. 그뿐인가. 기다리라는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월호의 희생자들은 어떠했는가. 기다림이라는 희망 고문이 열정 페이에서 무위로 돌아서는 데에서 나아가 처참한 주검들을 수없이 내놓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누구 하나 제대로 책임지지 않았고, 이제는 그 책임을 밝히려 해도 길을 막아서서 다시 기다리란다.

기다림에 소스라친다. 탄신과 탄핵을 가로지르는 세월,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모양새는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물고기도 아닌 하물며 국민에게 최소한 인간에 대한 존중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듯하다. 권력만 단단히 부여잡고 있으면 그만인가 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이기에, 사람이기 위해서 분노하며 싸우고 살아야 한다'. '군함도'의 한 강제징용인의 발언이 2017년 민주주의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유효하다는 사실은 그래서 더 비극적이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