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여진이 가라앉지 않습니다. 상고심 선고는 이 후보 사건이 대법원에 접수된 지 34일 만, 전원합의체에 회부된 지 9일 만에 나왔는데요. 이례적으로 짧았던 상고심 심리 기간을 두고 조희대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사건 기록을 제대로 검토했는지가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지난 1일 대법원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선고 재판에 참석해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일 대법원의 이 후보 공직선거법 위반 선고 이후 민주당 등 정치권을 중심으로 상고심 심리 기간에 6만 쪽의 기록을 검토하고 숙지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이에 대해 천대엽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지난 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긴급현안질의에서 ‘6만여 쪽 소송기록을 대법관 12명에게 모두 복사해서 줬느냐’는 질문에 “재판 사항이라 깊이 알지 못한다”고 답했습니다. 추궁이 계속되자 천 처장은 “지체 없이 제출 문서를 읽어보고 내용을 숙지하는 등 충실하게 기록을 검토했다고 판결에 기재돼 있다”며 “형사기록 전자 스캔으로 (대법관들이) 기록은 모두 봤다고 확인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90페이지로 판결이 나온 것은 그 자체가 충실한 심리 검토를 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죠.

이에 민주당 김용민 의원은 “대법관들이 기록을 모두 보고 재판한 것이 맞냐”고 지적했고요. 장경태 의원도 “재판 기록 7만 쪽을 하루에 1200페이지씩, 거의 39권을 6일 만에 읽은 것”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조국혁신당 박은정 의원은 “대법관별로 이 전자문서를 언제부터 언제까지 읽었다는 것인지 답변해달라”며 “대법원이 기록을 안 보고 제출된 문서만으로 판결하는 경우도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고 질타합니다.

게다가 민사·가사·행정소송 등에는 도입됐지만 형사소송에는 적용되지 않는 ‘전자문서’로 소송 기록을 봤다는 천 처장의 답변은 논란을 키웠습니다. 전자소송은 수사·재판 기록을 종이가 아닌 전자문서 형태로 기록하는 제도인데요. 대법원은 오는 6월로 예정됐던 형사사건 전자소송 시스템 도입을 10월로 연기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면서 ‘대법관들이 6만 쪽 소송기록을 진짜 다 본 것이 맞는가’라는 의심에 불을 붙입니다.

민주당은 ‘다수 의견을 낸 대법관 10명의 사건 기록 열람 로그 기록을 공개하라’는 공세를 이어갑니다. 민주당 김민석 상임공동선대위원장 겸 수석최고위원은 지난 4일 국회 기자회견에서 “대법관들이 챗GPT보다 탁월한 속독력으로 6만 페이지의 기록을 독파했다는 것인데, 국민은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을 것”이라며 “전자문서를 다 읽었는지 즉각 공개 답변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대법원 측은 법률심인 상고심 특성 등을 고려할 때 대법관들이 모든 기록을 전부 읽고 재판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관들이 1쪽에서 6만 쪽까지 기록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읽어야 판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각 업무 방식에 따라 다른 것”이라고 밝혔죠. 대법원 측 주장대로 대법관들이 일일이 사건 기록 전체를 볼 의무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3심 제도는 1·2심은 구체적 사실 관계를 심판하는 사실심으로 하고, 3심은 원심의 법률 적용이 틀리지 않았는지 등을 보는 법률심으로 역할을 한정하는데요. 이 후보 사건을 예로 들면 허위사실 공표죄를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게 대법원의 역할이지, 모든 사실 관계를 재확인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6만 쪽 기록 대부분이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증거인데, 대법원은 사실관계 증거를 들여다볼 필요가 없죠.

게다가 대법관만 사건을 검토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법원은 많은 사건을 쟁점 위주로 신속하게 심리하기 위해 재판연구관을 두는데요. 대법원 측은 대법관 심리를 보조하는 대법원 재판연구관들도 동원돼 기록을 검토하고 보고하는 만큼 대법관 혼자 기록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했죠.

또 형사사건 전자소송 제도가 아직 시행되지 않아 원칙적으로는 원본을 토대로 심리하지만, 전자문서를 보조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고도 해명합니다. 현재 형사재판 실무에서는 소송기록 원본을 스캔해 전자화한 뒤 이를 보조 자료로 활용하는 방식이 통상적으로 행해지는데요. 특히 주요 사건이 많은 서울고법 형사부는 스캔을 통한 기록의 전자화를 거치는 게 일반적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6만 쪽 기록을 다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대체로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전히 찝찝함은 남습니다. 처음에는 ‘대법관들이 기록을 모두 봤다’더니, 논란이 거세지자 ‘기록을 다 읽어야 하는 건 아니다’며 갑자기 말을 바꿨기 때문인데요. 결국 기록을 모두 읽은 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게 됐습니다. 대법원 선고 이후 정치적 공방과 그에 따른 의혹 제기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이번 사태로 사법부 권위와 신뢰도 추락도 피하기 어려워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