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여 년 전 인류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진짜 전쟁을 마주해야 했다. 좁은 대피소 안에서 공습의 불안에 떨어야 했고 앞잡이들의 밀고로 이웃조차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각자의 공간 속에 갇혀 지내야 했고 일상은 점점 수감자의 모습을 닮아갔다.
탈옥영화를 보면 울분을 주체하지 못한 죄수가 벽을 향해 몸을 던지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물리학은 ‘에너지’라는 다소 추상적인 양을 통해서도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죄수가 지닌 운동에너지가 벽이 지닌 잠재(potential)에너지보다 크다면 포탄처럼 벽을 뚫고 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몸짓이 만들어내는 운동에너지는 콘크리트 담벼락이 지닌 잠재에너지에 비하면 턱없이 작다. 결국 죄수는 벽에서 튕겨나가는 반작용만 경험하게 되고 벽은 견고한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한다. 설령 벽 속으로 들어가는 가정을 하더라도 에너지보존법칙은 큰 잠재 에너지의 벽 속에서 죄수의 운동에너지가 음수가 되기를 요구한다. 입자의 운동에너지는 속력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음수의 운동에너지는 고전물리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상태다.
하지만 양자역학이 작동하는 미시세계에서는 작은 운동에너지를 지닌 입자들도 큰 잠재에너지의 장벽 속으로 스며들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 기이한 광경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양자역학은 벽을 뚫고 지나갈 확률도 예측할 수 있다. 이를테면 양자 교도소 담벼락 밖에서 기다리다 보면 열에 한두 번 정도는 벽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뚫고 나온 죄수를 만날 수 있다. 실제, 실험 물리학자들은 에너지 감옥의 벽을 뚫고 나온 미시세계의 양자 죄수들을 자주 목격한다.
‘양자 터널링(quantum tunnelling)’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1926년 슈뢰딩거의 양자파동방정식이 발표된 후 체계적으로 설명되었지만 1939년 시작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구가 단절되었다. 그런데 1941년 아비규환의 전쟁 중에 ‘벽 뚫고 지나가는 남자’(Le Passe-muraille)라는 소설이 독일 점령 하에 있던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 벽을 뚫고 지나갈 수 있다는 판타지적 설정과 현실의 일상이 공존하는 스토리의 풍경은 나노 스케일에서 일어나는 ‘양자 터널링’과 제법 많이 닮아있다. 하지만 벽을 뚫고 지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독자들에게 물리적 장벽 이상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주인공 남자는 마흔이 넘도록 소극적 삶이라는 내면의 벽에 고립되어 살아왔다. 주변 이웃들 역시 좁은 공간 안에 수많은 벽을 두고 밀집한 몽마르트르의 집들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고립되고 단절된 삶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벽을 뚫고 지나가는 능력은 주인공 자신과 주변의 삶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권위로 억압하는 직장 상사를 통쾌하게 조롱하고, 자본주의적 욕망을 상징하는 은행을 털고, 개인을 구속하는 사회의 감옥에서조차 자유롭게 탈출한다. 또한 젊은 나이에 온 종일 집안에서만 갇혀 지내야 하는 한 여인을 사랑하며 통념적 도덕의 벽조차 넘어 선다. 좁은 공간에 갇혀 매일 죽음의 공포를 삭혀야 했던 전쟁 중에도 희망을 찾고 싶었던 작가의 욕망이 이 소설을 쓰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코로나 사태로 1년 넘게 고립된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는 꽤 묵직하게 다가온다.
대면 방식에 길들여진 기존 세대로선 만족스럽지 못한 방법이겠지만 자라나는 세대들은 소설의 이야기처럼 대면 방식보다 매력적인 가상공간 속에서 소통하는 세상을 마주할 것이다. 아마도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 속에서 참여하게 될 신기술의 소통문화는 시간, 공간 같은 물리적 제약뿐 아니라 대면 방식에 존재하던 다양한 편견의 벽을 뛰어넘으며 기존 사회 체계를 크게 바꿔 놓을지 모른다. 마치 ‘양자 터널링’이라는 새로운 신호 전달의 원리가 반도체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스마트폰으로 집약된 글로벌 네트워크로 진화한 것처럼 코로나 사태 이후에 펼쳐질 새로운 기술은 80년 전 한 소설가의 상상처럼 현재의 권력과 사회적 차별이 만들어 낸 많은 벽들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지 모른다.
김광석 부산대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