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고전·주체사상이 결합된 평양
- 사회주의 건축물 등 54점 소개
- 11월 20일까지 고은사진미술관
“공간은 이데올로기·정치와 동떨어진 과학적 사물이 아니다. 공간은 언제나 정치적이다.” 프랑스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말이다. 공간뿐 아니라 사람들이 만드는 모든 것은 정치적이며 지배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모든 건축 양식은 그 시대의 미학적 특징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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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 모더니즘’ 시리즈 중 우크라이나 백화점. 오른쪽은 ‘평양’ 시리즈 중 노동당 창건 기념탑. ⓒRoman Bezjak |
이런 점에서 고은사진미술관(부산 해운대구 우동)에서 열리는 로만 베작(Roman Bezjak)의 사진전 ‘시대의 고고학(ARCHEOLOGY OF AN ERA)’은 건축에 대한 기록이면서 동시에 건축을 생산한 이데올로기와 욕망의 제도에 관한 이미지다. 일종의 건축적 여정이라 불리는 작가의 작업은 유럽 사회 내 만연한 동구권에 대한 편견과 불편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베작은 누구인가. 1962년 사회주의 공화국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난 베작은 독일 도르트문트 대학교에서 사진과 디자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AZ) 매거진을 비롯해 메리안, 지오, 슈테른, 슈피겔 잡지 등에서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하며 동유럽의 변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기록해왔다. 1995년 러시아 재소자들에 대한 시리즈로 독일 사진상을 받았다. 사진계에서 단숨에 그를 주목하게 만든 ‘사회주의 모더니즘’ 시리즈(2005~2010)를 비롯해 ‘평양’ 시리즈(2012), 현재는 동유럽을 넘어 북마케도니아와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까지 포괄하는 장대한 프로젝트로 확장 중이다.
이번 전시에는 베작의 주요 작업 중 ‘사회주의 모더니즘’과 ‘평양’ 시리즈 54점을 엄선해 아시아 최초로 소개한다. 고은사진미술관 이미정 수석큐레이터는 “베작의 작업은 이상사회를 꿈꾸며 규범과 질서를 만들었던 모더니즘이 인간 존재를 어떻게 규정했는지 뿐만 아니라 국가체제와 제도, 사회이념과 질서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인간의 삶이 어떻게 그 안을 꿰뚫고 중첩되는지를 탁월하게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사회주의 모더니즘은 대형카메라의 장점을 극대화한 작업으로 평가된다. 베작은 일관된 눈높이에서 실제와 유사한 비율과 거리, 비슷한 빛과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채 등 절제된 관점을 적용하면서도 개별 이미지의 다양성과 고유한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조립식 공동주택, 대규모 주거단지 등 서구에서는 비인간적인 감시 시스템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건축물에서의 삶을 매우 중립적으로 묘사한다.
평양 시리즈는 베작이 속한 세계였던 동유럽과 달리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그의 말처럼 서구의 소비문화나 세계화의 분위기를 애써 거부하고 있는 평양의 모습은 마치 과거로 회귀한 박물관, 박제된 풍경 같은 인상을 준다. 평양은 한국 전쟁 이후 폐허에서 재건되면서 신고전주의 양식과 북한의 주체사상을 토대로 한 건축 양식이 혼용된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사진에는 평양의 주체사상탑, 만수대기념비 등 주요 건축물은 물론 평양 사람들의 일상과 벽화, 매스 게임 등이 담겨있다. 폐쇄적이고 고립된 공간으로서의 평양이 아니라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장소로서의 평양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군정치만세!’와 같은 각종 선전 문구들은 거리낌 없이 그 공간을 지나는 사람들과 자동차,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사람들에 의해 장악된다. 11월 20일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051)746-6865
정홍주 기자 hjeye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