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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자 이성희 '이미지의 모험' <12> 김환기 '항아리와 여인들'-조각난 삶을 끌어안는 항아리의 악보

풍요의 바다, 평화로운 여인들…그 속엔 참혹한 현실 극복 소망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5-06-16 18:47:20
  •  |   본지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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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작 '항아리와 여인들'.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 여름 부산 해변가에서 여인들이 백자항아리를 안거나 머리에 이고 있다. 피란살이 힘겨움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낸 거장의 숨결이 느껴진다.
전쟁이 한창인 1951년 부산, 궁핍함과 고달픔의 피란살이
그 절망의 삶을 다시 붙들어 일으켜 세우는 치유의 여인들
바다에선 환한 달항아리 같은 재생의 꿈이 피어 오르고…

항아리를 안거나 머리에 인 여인들은 평화롭다. 항아리 속에는 푸른 하늘이거나, 지느러미를 가지런히 출렁이는 바다, 혹은 따사로운 햇살이 풍요롭게 넘실거릴 것만 같다. 오른쪽 여인은 큰 물고기를 담아 머리에 이고 또 손에도 큰 물고기를 들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풍족해 보인다. 어느 먼 이상향의 풍경인가? 넓게 펼쳐진 바다와 해변의 긴 가로선에 걸려 있는 여인과 항아리와 돛단배는 악보의 음표들 같아서 정적 속에 있다가도 금세 선율이 될 것만 같다.

여인들의 팔만 이어본다면, 그 선율과 어울릴 우아한 춤사위이지 않은가. 견고한 기하학적 윤곽선들도 수평선과 해변의 운율적인 가로선에 의해 움직임을 얻고 넉넉한 양감을 가진 채 따뜻하게 흐른다. 견고한 정지와 부드러운 운동이 서로를 안고 있는, 김환기(1913~1973)가 그린 '항아리와 여인들'이다.

■6·25 해군 종군화가로 활동

김환기의 1951년 작 '피난열차'
그런데 서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이 풍요로운 풍경이 가장 참혹하고 궁핍했던 피란살이 풍경이라면 의외일까? 김환기는 6·25 때 해군 종군작가로 활동하며 비참하고 고단한 피란 풍경을 놓치지 않았다. '피난열차' '판잣집' 등 작품이 그것인데 '항아리와 여인들' 역시 이때 그렸다. 화면 왼쪽 해변에 보이는 천막은 피서지의 낭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칙칙한 카키색은 군용막사임을 짐작하게 하는데, 당시 부산항 부둣가에 설치되었던 피란민 임시거주용 천막이다. 그런데 김환기는 한 많고 설움 많은 피란지 부산 항구를 왜 젖과 꿀이 흐를 듯한 낙원으로 바꿔놓았을까?

미당 서정주는 피란 도중 잠시 머물렀던 과수원에서 꽃과 새와 벌들이 여는 생명의 환희를 찬미하는 시 한 편을 남긴다.


꽃밭은 그 향기로만 볼진대 한강수 상류와도 같은 융융한 흐름이다. (중략) 우리가 이것들을 사랑할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무쳐서 누어있는 못물과 같이 저 아래 저것들을 비취고 누어서, 때로 가냘푸게도 떨어져내리는 저 어린것들의 꽃잎사귀들을 우리 몸우에 받어라도 볼 것인가. 아니면 머언 산들과 나란히 마조 서서, 이것들의 아침의 유두분면(油頭粉面)과, 한낮의 춤과, 황혼의 어둠속에 이것들이 자자들어 돌아오는―아스라한 침잠이나 지킬 것인가.('상리과원' 부분)


이 절창의 산문시는 참혹한 현실로부터 도피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가 보여주는 존재의 심원한 조화와 평화는 전쟁 중이어서 더욱 절실할 수 있지 않을까? 전쟁 중 그린 '항아리와 여인들' 또한 그러한가? 우리는 그림의 이미지가 자신의 표면에서 미끄러지고 흐르면서 역사의 강에 이르기도 하고, 깃털을 세우고 날다가 우주의 추억과 어깨를 스치기도 하는 것을 좀 더 따라가 보아야 할 것 같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가족과 삶과 사랑과 꿈을. 그 잔혹한 폐허를 견디고 치유하는 것은 여자들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여자들은 삶을 위해 삶을 넘어선다. 김환기는 천막을 마치 장난감처럼 작게 그렸다. 그 때문에 여인들은 압도적인 크기를 갖는다. 이 압도적 크기는 이미지의 현실성을 초과해 그 너머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하여 이 거대해진 여인들은 신화시대 거인 여신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화가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궁핍한 피란살이를 이겨내는 여인의 끈질긴 생명력을 신화의 '위대한 어머니 여신'과 연결한 것일까. 다산과 풍요의 여신들 말이다.

■추상 속에 흐르는 생명 리듬

전경에 있는 여인들은 항아리를 신성의 상징물처럼 하나씩 가지고 있다. 백자 항아리들은 그 풍만한 형상이 완연히 조선의 달항아리다. ('달항아리'는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이 붙인 이름이다) 김환기는 조선의 백자, 그중에서도 달항아리에 거의 미쳐있었다. 화실과 뜰은 달항아리로 가득했다. 그는 말했다. "달밤일 때면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으로 인해 온통 내 뜰에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깡마른 화가는 달항아리를 끊임없이 그려댔던 모양이다. 오죽하면 파리 시절 친구에게 "여전히 항아리를 그리고 있는데 이러다간 종생 항아리 귀신이 될 것 같다"고 편지를 쓰기도 했을까.

화가 김환기에게 달항아리란 무엇이었을까? 김환기는 우리 화단에 추상화를 도입한 1세대이다. 이후 그의 추상화는 그것이 전적인 수입품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는 달항아리를 만났다. 달항아리는 큰 형상이면서도 내용이 비어 있다. 그래서 항아리라는 윤곽을 가진 구상이면서도 구체적 대상이 비어버린 듯한 추상을 꿈꾼다. 이것이 이후 김환기의 추상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을까. 서양 추상화가 대상을 기본 요소로 분석하고 쪼개거나, 대상과 분리된 개념 공간에 칩거한다면, 김환기 추상화에서는 대상이 쪼개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대상은 분장한 가상 이미지를 벗고 달항아리 같은 민낯의 소박함으로 우리 마음과 직접 사귀려 한다. 그리하여 대상과 우리 마음이 하나의 리듬이 된다. 차가운 분석이 아니라 따뜻한 피가 흐르는 노래가 되려 한다. 그래서 김환기의 추상화는 기하학적 구성 속에서도 생명의 리듬과 율동을 품는다.

■재생을 꿈꾸게 한 바다, 부산

항아리는 가장 오래된 여성성, 모성의 원형적 상징이다. 낭만주의 시인 키츠는 그리스 항아리를 "너 더럽혀지지 않는 고요의 새색시"라 했다. 큰 항아리는 형태나 상징에서 여성의 몸이며, 자궁이다. 달항아리는 여기에 가장 어울리는 도자기일 것이다. 17세기 후반 조선에서 달항아리의 등장은 의미심장하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참혹한 전란이 휩쓴 폐허에서 달항아리는 홀연히 등장한다. 이미지의 논리로 추론한다면, 조선백자가 품은 따뜻한 곡선의 인력이 사금파리처럼 조각난 삶을 치유하고자 원형적 모성 상징인 달 이미지를 끌어당긴 것 아닐까. 조각난 대로, 그래도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민중(도공)의 상상력 속에서.

조선 도자기를 시만큼 사랑한 초정 김상옥은 수필 '백자송'에서 말한다. "이 둥근 달덩어리는 흡사 그 모양이 보름달이긴 해도 환히 밝은 달이 아니라, 약간 우기(雨氣)를 머금은 채 어슴푸레 돋아 오는 그런 달이다." 상처의 그늘을 품은 달항아리의 마음일까. 그래서 김환기는 달항아리에 빗금을 긋고 거기에 슬쩍 그늘을 넣은 것일까?

전쟁이 한창인 1951년 부산, 잔혹한 상처와 궁핍, 모든 종류의 절망과 절망이 꾸역꾸역 모여들어 그 벼랑 끝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꿈꾸던 곳. 부산이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바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는 끝이면서 시작이다. 바다는 모두의 어머니이며 새로운 삶을 꿈꾸는 모태다. 삶의 벼랑에서 만난 바다, 그 재생의 꿈을 김환기는 여인과 항아리로 보여주는 것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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