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 시절을 떠올려 본다. 집권 후 곧장 대북 송금 특검을 했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호남을 잃었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했다. 진보와 젊은 층을 잃었다. 필사적으로 부동산 억제 정책을 폈다. 도시 중산층을 잃었다. 국가보안법 등 4대 악법 철폐와 과거사 청산 작업을 했다. 당연히 한나라당과 철천지원수가 됐고 원로들이 등을 돌렸다.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는 역시 바보였던가. 정치를 몰랐던 걸까.
4·29재·보궐 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전패했다. 사상 최악의 참패라는 문구를 언론에서 봤는데 그렇지 않다. 민주당 계열은 대부분 선거에서 늘 패배해 왔고 탄핵 역풍 때처럼 어쩌다 기적적으로 승리했을 뿐이다. 익숙한 풍경이다. 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문재인 대표가 사퇴하란다. 안철수, 김한길 지도부도 그렇게 사퇴했고 열린우리당 시절에는 누가 당을 대표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역시 익숙한 풍경이다.
당 대표의 장악력이 강하면 1인 사당화 됐다고 비판할 것이고 다양한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띤 지도부가 등장하면 리더십 부재라고 비판한다. 문재인이 대표라서 친노패권주의라는데 박지원이 대표였으면 호남 지역당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새누리당 내 친박 반박 비박 탈박 쪽박의 '지지고 볶는' 온갖 갈등을 넌더리 나게 보고 있건만 오직 새정치민주연합의 내부자 다툼에는 '봉숭아 학당'이라는 조롱이 차고 넘친다. 이 역시 익숙한 풍경이다.
사람들 기억 주기는 정말 짧다. 김대중 노무현 시대라고 당이 현자의 철인정치인 양 흘러갔던 것이 아니다. 김대중(DJ)은 김영삼의 영남계로부터 단 한 번도 전폭적 지지를 끌어낸 적이 없었고 노무현은 처절한 죽음 후에야 권위와 존중을 부여받았다. '노무현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네' 운운하는 몇몇 의원 언동을 보면 기가 찰 노릇이다.
연초 20%대까지 떨어졌던 박근혜 대통령의 최근 지지율이 45%에 이르렀다. 이 수치는 변하지 않는 상수다. 멀게는 일제 강점기부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거쳐 박근혜 정부까지 이른 이들 세력을 진보 용어로 지배계층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바라는 강력한 통치자의 안정된 국가 상대편에 근본적 변화와 개혁을 갈망하는 50%가 있다. 늘 패배하고 좌절하고 조롱과 멸시를 받지만, 이들 또한 김구 여운형 이래의 상수다. 이쪽 편의 정당과 정치인은 늘 지리멸렬해 보이고 대부분 선거에서 패배하고 못나 보이게 그려진다. 익숙한 풍경이란 말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 큰 그림으로 보자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것은 맞다. 하지만 지배 상층부의 세력교체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대적 한계였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야권에 투표하는 사람의 궁극적 열망은 대부분 선진국처럼 주류 교체가 가능한 국가를 만드는 일이다. 사장님들의 정당만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고 종업원들의 결사체 역시 절반의 권리를 갖고 상호 대등해지는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자는 뜻이다.
정치 아닌 정치인 과잉의 시대다. 다들 박근혜, 김무성, 문재인의 동향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에 불과할 뿐이다. 사람들은 참여정부 5년을 노무현의 얼굴로만 기억하지만, 그가 대부분의 지지를 잃어가면서 도전했던 과제들은 현대사 내내 쌓이고 쌓인 기득권 구조의 철폐였다. 그가 못나서 그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는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 담겨있던 개혁 의지까지 실종될 수는 없다. 그 특검과 창당에 호남은 분노했으나 지역주의 철폐 의지가, 그 파병과 통상개방에는 국제사회에서 협상 주체가 되고자 했던 남다른 포부가 있었다.
문재인 대표에게 주문한다. 세에 밀려 설사 대표직을 던져버릴지언정 노무현과의 단절 운운에 휘말리지 마라. 특권과 반칙의 기득권 구조와의 싸움이 당신이 정치하는 이유다. 천정배 의원에게 항의한다. 호남 정치 운운하지 말라. 지하에서 DJ가 통곡한다. 그동안 당신은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확실한 지역 기반이 있어야 대권을 바라본다는 공식이 앞으로도 통용될 거라고 믿는가.
야권 지지자에게 호소한다. 정교한 분열통치술에 놀아나거나, 내부의 지역주의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야권은 모양 좋은 단합이 아니라 험악한 노선 투쟁으로 존립해 왔다. 호남 정치 복원 운운이 과연 김대중 노무현을 계승하는 정치노선이라는 말인가.
차기 총선과 대선은 이미 시작됐다. 새누리당과 달리 새정치민주연합은 지지자 동향에 압도적 영향을 받는다. 관망 중인 종래의 지지자가 목소리를 내야 할 시점이다.
시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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