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지방정부가 중층적으로 작동하는 다중심의 거버넌스체제가 중앙집권화와 단일 정부의 획일적 통치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이는 여성 최초로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엘리노어 오스트롬이 시장과 국가가 효율적이라는 '통념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언급한 말이다. 작은 지역공동체가 발달될수록 오히려 사회 전체적 효율성이 높아진다고 보았으니 역설적이다.
서구와 비교하면 한국사회는 시장 남용, 국가 남용의 측면이 강하다. 국민도 시장과 국가를 가장 효율적이고 모든 것을 해결해줄 만능장치로 보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경제 예산의 비중이 높고 시장의 지배력도 막강하지만, 오히려 다수 국민은 시장이 규제로부터 더 자유로워져야 경제가 더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은 국가 통제력이 이상 비대해 있지만 국민은 국가가 더 권력을 강하게 쥐어야 안심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우리는 절대빈곤의 시대를 거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기를 벗어나려는 '속도와 시간의 경제학'에 익숙한 채 살아왔고 공동체를 통한 협력에는 여전히 낯설다. 분단체제의 경험은 남북대치의 위기상황에서 국가를 통해 안정을 회복하고자 하는 경향을 강화시켰다. 이런 한국사회의 특수성은 보수정당이 특별히 독재를 하거나 부패하지 않으면 60점 이상 점수를 따고 선거에 임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과잉성장한 국가체제는 시민사회의 자율 영역을 위협하고 집권적 통제에 익숙한 국민들은 자율을 향한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생각한다. 그 속에 지방자치도 포함된다. 오랜 지방자치를 경험한 선진국가의 경우 지방자치에서 보충성의 원리를 강조하는데 지방자치 영역이 우선이고 거기에서 다룰 수 없는 일을 국가가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국가가 대부분을 관리하고 국가가 관리하기에 귀찮은 일들만 지방자치가 떠맡는 역할을 한다는 느낌이다.
기초자치 정당공천 폐지와 '자당 무공천' 카드를 내세우며 진격했던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공동대표가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회군한 사태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새누리당과 골수 보수를 자처하는 언론들은 세 번째 '철수(撤收)정치'라며 안 공동대표를 공격하는 데 열을 올렸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경험주의 방법론의 최고봉인 폴 라자르스펠드가 사회적 인과규명에 대해 설명하면서 원인은 결과에 시간적으로 선행한다고 했다. 이를 적용하면 자당 후보만의 기초자치 무공천을 선언했던 안 대표의 행위는 결과이고 원인은 그 이전의 18대 대선의 공약이다. 기초자치 정당공천 폐지 논란의 원인제공자는 이를 공약으로 내건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이 실제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자리에 앉은 후 아무런 조치도 않고 철저히 침묵함에도 이상하리만큼 책임에서 멀리 비켜나 있다. 기초자치 공천 폐지는 큰 예산이 드는 것도 아니고 애초 양당 의견 차이가 있었던 것도 아니며, 국민 상당수가 찬성했기 때문에 국민적 공감대도 컸던 부분인데도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지난 11일 발표한 국정지지도 조사에서 61%라고 한다. 이러한 높은 정치적 지지는 원칙과 소신의 강조, 중후하고 훈련된 처신, 그리고 보수 의존적 한국의 정치적 토양도 작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국민과 시민운동단체, 그리고 전문가들이 기초자치만이라도 정당공천을 폐지함으로써 국회와 중앙당 지배로부터 지방자치를 자유롭게 해주자는 가치에 공감하여 수용했던 공약에 대해서 침묵으로 대처한다는 것은 정치 윤리뿐 아니라 국민에 대한 적절한 대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고령화, 저출산, 돌봄 위기, 양극화 등으로 복지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겠지만 중·저성장시대 도래, 고용없는 성장으로 세수 부족 등 재정 압박은 크게 늘어날 것이다. 모든 국민들의 생활을 국가의 재정만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무리함을 넘어서 불가능할 것으로 본다. 이럴 때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며 서로를 돕고 공동체의 힘을 향상시키는 일이야말로 사회적 자본은 높이고 비용은 절감하는 한국 사회문제의 유력한 해법이 된다. 지역구 국회의원과 중앙당 지배로부터 오염된 공천구조를 타개하고 주민 기초자치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지역공동체를 키우는 지방자치는 단순한 정치게임을 넘어서서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갖고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공유지가 시장과 국가의 획일성의 통제 아래 놓이면 비극이 되지만 이 비극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자율적 지역공동체의 신뢰를 통해서 가능하다'. 엘리노 오스트롬의 말이다.
신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