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싸움에서 ‘패’자는 무엇을 뜻할까? 배짱으로 버틴다는 뜻에서 한자로 패(覇)자를 쓰는 이가 있는데 이는 잘못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패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한자로는 영구한 세월을 뜻하는 ‘겁(劫)’자가 올바르다는 것이다. 쌍방이 서로 한 점씩 따내기를 되풀이 하여 끝이 없는 것을 영겁에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보에서 장 9단의 강한 도전으로 시작된 패싸움은 계속 이어진다. 흑이 ◎로 잇는 것과 백이 ‘가’로 따내는 것은 양쪽의 이해득실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패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천지대패라 할 만하다.
이런 패를 장 9단이 건 것은 팻감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팻감이 적은데도 패를 걸었다면 프로의 자격을 의심받는다. 하지만 최 9단이 흑109쪽에 팻감을 쓰니 의외로 만만치 않다. 이 곳에 네 개의 팻감이 있어 백의 팻감 부족.
장 9단은 흑115의 팻감에 백116으로 두어 흑을 1선으로 건너가도록 한 후 백120으로 받는다. 말할 것도 없이 하변 흑대마에 대한 공격수를 팻감으로 쓰려는 생각. 흑119로 건너간 흑돌 모양이 옥집의 형태이므로 전체 흑이 허술해졌다. 상대방이 팻감을 쓴 순간 이처럼 빈틈을 포착하여 유리하게 만드는 테크닉은 프로다운 수법이라고 하겠다.
백116때 돌수에 현혹되어 흑‘나’로 백 다섯점을 잡는 것은 백118로 바꿔치기가 되어 이득이 없다. 또 백116에 즉시 흑117로 넘어가 좌상귀 패를 따내는 것은 백118로 이어 실리를 취하고 패를 양보할 가능성이 있다. 흑은 그렇게 둘 수도 있지만 흑117에 받아줘도 패를 이길 자신이 있다고 본 듯하다.
백128까지 되어 각자 한 팻감씩 남은 상태에서 백130으로 팻감을 쓰자 최 9단은 흑131로 패를 해소해 버렸다. 이것으로 좌상귀에서는 흑이 막대한 이익을 얻은 모양. 이런 결과가 될 것이라면 장 9단이 좌상귀에서 강력하게 패를 건 것은 무모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변쪽의 팻감 계산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백은 패의 대가로 하변 흑대마에 보복 공격을 감행할 심산이다. 백132로 연타하여 흑의 생사를 위협한다. 이 공격이 주효하면 백은 충분히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114·124-◎, 121·129-111) /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9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