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선거를 20여 일 앞두고 대선 후보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1946~2009)의 ‘통합의 정치’를 언급하며 ‘노심(盧心)’ 잡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국제신문 2월 8일 자 5면 ‘盧心 잡아라…여야 가릴 것 없이 노무현 소환’ 기사를 보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물론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까지 가세해 이른바 ‘노무현 마케팅’을 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대선이 양강 구도 속에 승부를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박빙승부가 펼쳐지면서 아직 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스윙보터(swing voter)’를 겨냥한 전략으로 풀이됩니다. 적지 않은 유권자의 고민은 찍을 후보가 마땅찮다는 겁니다. 이 같은 ‘비호감 선거’ 분위기 속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습니다. 바보 노무현….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2월 25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 할 것’을 선서하고 있다. 국제신문DB

국제신문 2월 8일 자 5면

국제신문 2월 14일 자 4면

●노무현이 만난 링컨

필자는 서재에 꽂혀 있던 『노무현이 만난 링컨』(학고재) 책을 꺼내 읽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1년 전쯤인 2001년 11월 이 책을 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책 서문 ‘왜, 다시, 링컨과 만나야 하는가’를 통해 2000년 4월 13일 16대 총선 개표일에 링컨(1809~1865) 대통령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 충격적인 감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나는 링컨과 극적인 재회를 했다.” 16대 총선에서 노 대통령은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해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하고 떨어졌습니다.

노무현이 만난 링컨

그날 밤 노 대통령은 『월간조선』 2000년 4월호 별책단행본 <세계를 감동시킨 위대한 연설들>에 나온 링컨의 두 번째 취임 연설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노 대통령이 읽고 이 책에 인용한 링컨 대통령의 연설 내용입니다.

“…어느 쪽도 남북갈등을 초래한 ‘원인’이 전쟁 종식의 순간에, 혹은 전쟁 종식 이전에 제거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양측은 모두 승리를 기대했을 뿐 이처럼 근본적이고 놀라운 결과가 초래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양측은 모두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느님에게 기도하며 서로 상대방을 응징하는 데 신의 도움이 있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남이 흘린 땀으로 자기 빵을 얻는 자들이 감히 정의로운 하느님의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만, 그러나 우리가 심판받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를 심판하지 않도록 합시다. 남북 어느 쪽의 기도도 신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노 대통령은 링컨 대통령의 두 번째 취임연설문을 읽은 감동에 휩싸여 사흘 뒤 『시사저널』에 아래와 같은 낙선소감문을 기고했습니다. 적지 않은 감동을 줍니다.

“승리니 패배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누구와도 싸운 일이 없습니다. 상대 후보와 싸운 일도 없고 부산 시민들과 싸운 일도 없습니다.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목표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을 뿐입니다. 저 역시 투표 하루 전날만 해도 선거를 승부로 생각했고 승리를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개표하는 날 저녁,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링컨의 연설문을 읽는 동안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링컨은 남북전쟁의 승리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한 취임사에서 승리나 패배니 하는 말을 쓰지 않으려 했습니다. 남부를 적으로 몰아 세우지도 않았고, 정의나 불의니 하는 말이나, 선이나 악이니 하는 말로 남과 북을 갈라 치지지도 않았습니다. 화해와 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같은 성경으로 같은 하느님을 섬기면서 제각기 상대방을 응징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느 쪽의 기도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라는 구절에서는 참으로 미국의 역사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왜 부산으로 왔느냐고 묻습니다.…감히 말씀드리면 저는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부산으로 갔습니다. 지난날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에서 정치인들이 이런 저런 이유를 내세워 집단 간의 불신과 적대감을 부추겨서 벌인 일치고 그 집단에게 불행을 가져오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뒷날 역사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상황을 그런 역사의 하나로 쓰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정치인은 그런 역사 속에서 겪어야 할 우리 민족의 불행을 막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상극의 정치문화에 대한 반성

노 대통령은 고뇌에 찬 링컨의 웅변을 읽고서 상극의 우리 정치판을 부끄럽게 여기고 반성했습니다. 보통의 정치인은 자기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적을 부각시키고 분노와 증오를 부추기는 등 익숙한 수법을 동원한다고 했습니다. 이럴수록 자기 편을 단결시키기 쉽고, 중간에 있는 사람을 제압하기 편리하며, 적을 공격해 승리의 자신감을 불어넣기에도 유리하니까. 편을 갈라서 분노와 증오를 부추기고 나를 중심으로 단결하라고 하는 것이 정치게임에서 승리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으로 알려졌습니다.

링컨은 불의와 정의, 승리와 패배 같은 용어를 멀리하려 했고 전쟁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상대를 어떻게 껴안을까부터 고민하고 있었다는 게 노 대통령의 분석입니다. “남과 북을 똑같은 하나의 공동체로 생각하고 자기의 고민을 끌어안듯이 동족상잔의 전쟁을 이야기한다. 증오가 아닌 애정을, 내침이 아닌 관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인간의 존재와 삶의 방식에 대한 깊은 성찰로 담담하게 상황을 바라보는 링컨을 느낄 수 있었다. 고통과 갈등 속에 있는 모순된 인간의 삶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극복하고자 하는 짙은 고뇌가 링컨에게서 배어나옴을 보았다.”

●링컨과 노무현 동병상련

필자는 『노무현이 만난 링컨』을 읽는 동안 노무현과 링컨이 오버랩 됐습니다. 노 대통령 역시 링컨을 통해 자신이 처한 사면초가의 상황을 극복할 지혜와 용기를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흑인 노예해방론자인 프레드릭 더글러스는 링컨 11주기 추도식에서 연설을 통해 “대통령직에 있는 동원 에이브러햄 링컨보다 더 맹렬한 공격을 받은 위대한 공직자는 별로 없다. (…) 자기 진영 내부와 외부, 그리고 반대편 진영에서 강력하고 신속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노예제 폐지론자’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노예 소유주에게도 공격을 받았다”고 표현했습니다.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미국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국제신문DB

링컨은 이런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갔을까요? 노 대통령은 “(링컨은) 진보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열망이 있었고 한 발 한 발 치밀하게 나아갔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최선을 추구했다.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 서 있었으며,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성급히 내딛지 않았다.” 노 대통령을 링컨을 인간의 이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인도주의자인 동시에 환상이 아닌 현실에서 출발하는 전략적 현실주의자로 인식했습니다.

아울러 링컨은 실패와 약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노 대통령은 강조합니다. 링컨은 스물두 살 때 처음 일리노이 주의원에 도전했으나 패배했고, 재수해서 주의원이 되었고, 서른다섯 살에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할 때는 공천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1846년 비로소 연방 하원의원에 선출됐고 임기를 마친 후 대통령에 당선되는 1860년까지 11년간 정치 도전은 모두 실패로 점철됐습니다. 낙선을 거듭했던 노 대통령과 링컨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두 대통령은 한국과 미국에서 16대 대통령이라는 공통분모도 있습니다.

링컨은 정치적 실패뿐 아니라 인간적 시련도 겪었습니다. 스물여섯 살에 첫사랑이었던 여인과 사별했고, 40대에 둘째 아들을 잃었고, 50대에는 셋째 아들이 사망했습니다.

노 대통령이 이 책을 냈던 2001년과 링컨 시대의 정치 상황이 비슷했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민족이 남북과 동서로 분열되어 쟁투가 끊이지 않은 오늘의 이 시대는 링컨이 직면했던 시대와도 유사하지 않은가.”

●바보 노무현의 울림

노 대통령이 링컨을 극적으로 만났던 2000년 4·13 총선. 노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은 서울 종로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는 의지를 앞세워 부산에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네티즌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조직했습니다.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바보 노무현은 지역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일념으로 역경을 딛고 2002년 12월 19일 16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당히 당선됩니다.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가능했습니다.

“‘낮은 사람이, 겸손한 권력으로, 강한 나라’를 만든 전형을 창출한 사람, 그가 곧 링컨”이라고 책에 썼듯이 노 대통령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옳은 길을 갔고 성공했기에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했습니다. “이제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의 자존심이 활짝 피는 사회, 원칙이 승리하는 역사를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이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자 정치를 하는 이유이다.”

바보 노무현이 혼을 담아 쓴 『노무현이 만난 링컨』의 부제는 ‘겸손한 권력으로 강한 나라를 만든 정치인’입니다. 다음 달 9일 20대 대선에서는 뽑히는 새로운 대통령 역시 국민을 섬기면서 행복한 나라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강한 나라’는 ‘강권적 권력’이 아니라 ‘겸손한 권력’으로 나온다는 노 대통령의 말씀을 새겨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한 권력은) 대중의 신뢰와 민주적 절차에 뿌리박은 통합의 지도력이다. 또한 수평적이고 개방적이며 자율적인 지도력이다. 이러한 지도력만이 남북 분단을 극복하고, 지역 갈등과 계층 대립이 만연한 우리 사회의 고질을 치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