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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명품 <51> 합천 한문대학

현대판 서당에 60~70대 어르신들 "배움에 나이가 중요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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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군 초계면사무소에 마련된 한문대학 강의실에서 60, 70대의 어르신들이 초계향교 이성주 강사와 함께 명심보감을 독송하며 한문공부를 하고 있다.
17일 경남 합천군 초계면사무소의 합천한문대학 강의실. 요즘 같은 농한기에 비닐하우스 안 못지않은 열기가 강의실을 달구고 있다. 10여 년 전 폐쇄된 면사무소 회의실을 개조해 만든 이 강의실에는 60∼70대 노인이 한문공부에 여념이 없다. 어르신 학생의 눈망울은 초등학생 만큼이나 초롱초롱하다. 코끝까지 내려온 돋보기 안경 너머로는 선생님의 강의를 한자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모습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놀랍다. 옛 선비의 차림새인 도포에 유건까지 갖추고 수업이 진행됐다.

"며칠 전이 설날이었으니까, 선생님께 새해 인사를 겸해 인사하겠습니다. 차렷, 경례.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여러분도 올 한해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십시오."

"자! 오늘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입춘방을 한번 짚어보고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1년 24절기 가운데 첫 절기인 입춘은 봄이 시작된다는 의미인데 농경사회인 우리의 선조들은 입춘방을 집안의 출입구에 붙여 액을 막고 복을 빌었다고 합니다. 칠판을 봐 주십시오.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호납동서남북재(戶納東西南北財) 문앙춘하추동객(門仰春夏秋冬客)'…"

   
합천 한문대학에서 수업에 몰두하고 있는 학생들.
초계면 합천한문대학의 경우 합천군이 7년 전 농촌지도소 건물로 사용하다 폐쇄, 창고로 이용하던 곳을 정리해 책상을 들여놓아 강의실로 만들었다. 선생님은 갈색 한복에 유건을 쓰고 마이크를 잡았다. 60~70대의 어르신 학생들은 모두 조선시대 선비 처럼 하얀색 도포를 입었고, 남자는 유건을 머리에 썼다. 한문대학 중급반에 등록된 학생은 모두 37명으로 남자 13명, 여자 24명. 대부분 기초반을 통과한 이들은 중급반에서 어릴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선생님 이성주(63) 씨의 강의에 몰입돼 있다.

수업은 선생님이 먼저 한 문장을 읽고 풀이를 한 뒤 선창하면 학생들이 따라 읽는다. 그 뒤 학생들이 두 번을 더 복창으로 읽고 나면 선생님이 이번에는 학생들이 잘 새기고 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해 지명하여 읽게 한다. 이때 한문 문장을 읽을 때는 모두 창을 하듯 가락에 맞춰 읽는다. 천천히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한 문장을 읽고 나면 "낭랑하게 글 읽는 소리가 담장 넘어 퍼져 우물가에서 물을 긷던 아낙이 감동해서 자신이 뭐하는 줄도 모르고 글 읽는 소리에 빠지도록 잘 읽어 봅시다"라는 추임새를 넣는다. 선생님은 이어 "글이라는 것은 그냥 읽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읽으면서 잘 새겨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자 천천히 읽으면서 잘 새겨 보십시다"라며 복습을 하도록 한다.

   
경남 합천군 초계면장이 초계향교에서 수업을 마친 어른신 학생들을 격려하고 있다.
선생님은 한 문장을 세 번 네 번 풀이하고 읽기를 반복한 뒤 "이번에는 여러분들이 잘 읽고 새겼는지 점검을 해 보겠습니다. 잘 하면 다음으로 넘어가지만 잘 안된다 싶으면 다시합니다. 변종태 어르신, 먼저 읽어 보십시오"라고 하면서 수업을 진행한다.

경남 합천군에는 색다른 명품이 있다. 바로 합천한문대학이다. 합천한문대학은 현대식 강의실에서 옛 서당을 재현한 모습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농촌 어르신들이 옛 성현의 가르침을 되새길 수 있는 배움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마련된 한문대학. 2004년부터 시작된 이 강좌를 수강한 학생은 모두 3250명에 이른다. 해마다 450명가량이 등록한 셈이다. 해마다 추수가 끝나는 11월께 개강해 1년 동안 매주 한 차례씩 연다. 합천군은 면적이 넓다 보니 향교가 있는 동네별로 나눠 실시한다. 어르신의 교통편의를 감안해 중부와 남부에 3곳, 북부와 동부에 2곳 등 모두 9곳으로 나눠 진행하고 있다. 수준도 초급반과 중급반, 고급반으로 세분돼 있다.

교육내용도 다양하다. 초급반에서는 명절의 의미와 차례, 성묘, 덕담 등의 세시풍속과 1년 24절기를 짚어보고 윤리와 예절, 제례 등을 익힌다. 또 4급 수준의 생활한자를 익힌 뒤 사자소학과 천고담(한시를 쉽게 배우는 과정)을 배운다. 중급반은 명심보감과 소학을 익히고 고급반에는 맹자와 최고급 한자교육과정을 학습한다.


# 합천한문대학 이성주 선생
- "졸업한 어르신들 찾아와 한자 뜻 물을 땐 가슴 뭉클"

   
"한문대학에 오시는 어르신의 열의가 대단하시기 때문에 언제나 강단에 서는 것 자체가 두렵습니다. 하지만 교학상장(敎學相長:가르치고 배우면서 더불어 성장함)이라는 말처럼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경남 합천 동부지역(초계 적중 청덕 쌍책 율곡면) 한문대학에서 중급반을 이끌어 가고 있는 이성주(63·사진) 씨. 초등학교 3학년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익힌 것을 인연으로 평생 유학과 공부를 놓지 않은 그는 10여 년 전부터 초계향교 총무를 맡아오고 있는 한학자다. 합천군이 한문대학을 시작한 것도 이 씨 때문이다. 이 씨가 2004년에 한국한자급수자격평가원으로부터 한자급수의 최고 단계인 '사범자격'을 취득하자 친구들이 마을입구에 현수막을 걸었다.

그러자 마을 선배였던 당시 심의조 합천군수가 "이런 귀한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묵혀둘 수 없나. 담당 부서에 이야기할 테니 실무자와 활용 방안을 의논해 보라"고 제안했다. 이에 이 씨는 곧바로 초계향교에 한문대학을 만들어 사자소학과 명심보감을 중심으로 한문공부를 시작했고, 해를 거듭하면서 학습 진도에 따라 초급반과 중급반, 고급반 등으로 세분하고 학습지역도 합천군 내 전역으로 확대했다.

초계면 소재지에서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는 이 씨는 "한문대학을 거쳐 간 분들이 요즘도 책을 들고 불쑥불쑥 찾아와 풀이를 물어오면 가슴이 뭉클해진다"며 "항상 배우고자 하는 어르신의 열성에서 학문의 귀중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당대 거유(巨儒)인 춘산(春山) 이상학 선생에게 한학을 배운 그는 "글로 다른 사람을 깨우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함께 공부하며 선현의 뜻을 새기는데 노력하겠다"며 "유맥이 살아 있는 고장을 만들어 어른을 공경하고 윤리와 도덕이 바로 서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남명선생 고향, 선비의 고장 합천

- 전국 지자체 중 드물게 향교 넷

경남 합천군은 퇴계와 함께 우리나라 유학의 양대 거두인 남명 조식 선생이 태어난 선비의 본고장이다. 전국 자치단체 가운데 드물게 향교가 4곳(강양향교 삼가향교 합천향교 초계향교)이나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예의와 염치를 배우고 깨닫는 유학에 대해 지역 주민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합천군 내 읍면지역에서는 한문대학을 거쳐 간 학생은 밖으로는 서로 교유하며 성현의 정신을 실천하고, 안으로는 마을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합천군은 주민의 향학열을 충족시켜주고 선비정신이 살아 있는 고장으로 계승 발전하기 위해 명사초청 특강이나 서원견학 등을 통해 배움의 기회를 넓혀주고 있다. 특히 합천군은 한문대학을 10개년 특수시책 사업으로 추진하며 새로운 르네상스를 꿈꾸고 있다. 합천군 문화예술담당 이재학 씨는 "농촌주민의 학습의욕 충족을 위해 시작한 한문대학이 의외로 큰 호응을 보여 강좌를 다양하게 늘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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