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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大 트레일을 연다 <8> 영덕 블루로드(상)

[창간 63주년 특집] 통일전망대 ~ 부산 650㎞

고운 모랫길 온몸 파고들고 절명시 한 구절 폐부를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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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래불~대진해수욕장 명사이십리길
- 의병장 김도현 울분이 담긴 도해단
- 이문열 소설 '그해 겨울' 무대 등 역사 현장·희망 오롯

- 영양 남씨 집성촌 괴시리 전통마을
- 忠臣 목은 이색의 관어대·산책로 등 호젓하게 되밟아

블루로드(Blue Road). 재미있는 이름이었다. 동해의 쪽빛바다를 끼고 하염없이 걷는 길. 블루오션(새로운 사업영역)이란 말과도 통할 것 같다. 왜 '푸른길'이라 하지 않았는지는 묻지 말자. 길을 낸 사람들의 감각도 중요하니까. "멋지다!" 블루로드를 답사한 보도탐사팀이 감탄사를 쏟아냈다. 바다와 해안길, 마을길, 숲길, 산길이 절묘하게 엮여 있다. 동해안을 여행할 때 스쳐지나곤 했던 영덕(盈德)이 비로소 '덕'이 '차오르는' 고장으로 다가왔다.

■동해 트레일의 핵심 코스

영덕 블루로드의 도보 전용 아치교. 빨간색 아치와 푸른 동해 바다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런데 아직 아치교의 이름을 짓지 못했다고 한다. 박창희 기자
"어디부터 걸어 볼랑교?"

고래불 해수욕장에서 만난 영덕군청 강영화(46) 계장(관광개발담당)은 다짜고짜 갈 길을 묻는다. 후덕한 인상이다. 첫 음절에 악센트가 잔뜩 들어가는 경북 사투리가 구수하다. (사)걷고싶은부산의 박재정 상임이사가 "가장 인상적인 코스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 강 계장이 "허허~" 웃는다. "다 좋니더. 블루로드 전체 구간이 50㎞니더. 간단치 않니더. 다 걸어 볼랑교?" 탐사팀이 선뜻 대답을 못하자 따라오라고 한다.

블루로드 50㎞는 거리로나, 내용으로나 동해 트레일로서 자체 완결성을 갖는 코스다. '바다, 길 그리고 삶… 사색을 위한 푸른 길'이란 홍보 문구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할 때 주목한 것도 자체 완결성이다.

블루로드는 3개 코스로 구성돼 있다. 저마다 독특한 맛과 정취를 선사한다. 강구항에서 고불봉과 풍력발전단지를 거쳐 해맞이공원까지 이어지는 A코스(17.5㎞)는 바다를 꿈꾸는 산길이다. B코스(15㎞)는 해맞이공원에서 축산항에 이르는 환상의 바닷길이다. C코스(17.5㎞)는 축산항을 출발해 대소산 봉수대와 목은 이색의 산책로, 괴시리 전통마을을 거쳐 고래불 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문화 탐방로다.

강 계장은 "골라잡기가 힘들다면, 다 맛보라"고 권한다.

■"고래뿔 봐라"

영덕 고래불 해수욕장을 걷고 있는 도보탐사팀.
우리는 답사 흐름상 고래불 해수욕장에서 시작해 거꾸로 내려왔다. 내려와도, 올라가도 상관없는 게 길이다. 고래불에서 영리- 덕천- 대진 해수욕장까지는 백사장이 장장 8㎞, 명사이십리다. 하나로 길게 이어진 모래밭을 지명이 파고들어 나눠 놓았다. 수평선 어디를 봐도 배 한척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다.

길은 백사장 길, 솔숲 길, 인도 세 가지다. 선택은 자유. 신발을 벗고 백사장 길을 걷는다. 고운 모랫길의 촉감이 발에서 다리로 허리를 거쳐 가슴과 머리로 고스란히 전달된다. 바다와 하늘의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듯하다. 그런데 발이 자꾸 빠져 속도가 나지 않는다. 얼마 못가 손을 들고 나온다.

그런데 왜 고래불이라 했을까. 강 계장이 들은 얘기라며 궁금증을 풀어준다. "두 가지 설이 있니더. 옛날 이곳에서 학문을 닦던 목은 이색 선생이 동해의 고래가 하얀 분수를 뿜으며 노는 모습을 보고 '고래뿔 봐라'하고 말했다는 설과, 고래가 많아 뻘(불)처럼 보였다고 하여 고래불이 됐다는 설이 있니더." 어느 설이거나 고래가 주인공이다. 걷다보니 어느새 대진 해수욕장이다.

■바다로 걸어 들어가다

바다를 밟고 들어가 사라진 인물이 있다. 구한말~일제시대 의병장이었던 경북 영양군 청기면 출신 김도현(1852~1910)이 그다. 나라가 무너지던 1910년,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절명시를 남긴 뒤 영덕군 영해의 바다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장렬한 순국이다. 따라온 조카에게는 "결코 내 시신을 찾지 말라"고까지 일렀다고 한다.

대진 해수욕장 남쪽에 있는 도해단(蹈海壇)이 그 현장이다. 기념비가 서 있다. '…아무런 방도가 없으니(百計無一方)/ 만 리 먼 바다가 보고파라(萬里欲觀海)'. 절명시의 한 구절이 폐부를 찌른다. 일렬횡대로 넘실대는 동해의 파도가 비장하게 다가온다. '도해(蹈海)'는 중국 진나라가 천하를 차지한다면 바다를 밟고 들어가 죽겠다고 했던 중국 제나라 노중련의 이야기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대진 해수욕장은 이문열의 소설 '그해 겨울'(젊은 날의 초상 3부)의 무대다. '…돌아가자. 이제 이 심각한 유희는 끝나도 좋을 때다. 갈매기는 날아야 하고 삶은 유지돼야 한다. …받은 잔은 마땅히 참고 비워야 한다. 절망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그 진정한 출발이다.'

동해는 역사의 현장이면서 희망의 원천이다.

■목은 이색의 길

목은 이색의 관어대 소부 기념비.
블루로드는 송천의 고래불대교와 도해단을 지나 영해면의 내륙으로 파고든다. 바다가 편안한 곳, 영해는 전통이 흐르는 고장이다. 괴시리(槐市里) 전통마을과 목은 이색 유적지가 포인트다. 블루로드가 이것을 놓칠 리 없다.

고려 말의 문신 목은 이색이 살았던 괴시리는 원래 호지마 또는 호지촌이라 불렸으나, 이색이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온 후 이곳 지형이 중국의 '괴시촌'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조선 중기 이후엔 영양 남씨 집성촌이 되었고, 200~300년 된 전통 고가 30여 호는 문화재로 인정받고 있다. 이곳의 상당수 전통가옥들은 영남 반촌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口'자형 구조다. 중국의 영향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영해 상대산(183m) 아래엔 이색이 유상했다는 '관어대(觀魚臺)'가 있다. 무슨 고기가 노니는 지 살핀 자리다. 관어대 소부(小賦)의 한 대목을 들춰본다. '…파도가 일지 않는 날 고기들을 내려다보니, 서로 같고 다른 놈 있어 느릿한 놈 활발한 놈이 제각기 만족해 하는구나.' 이색은 충신이기 이전에 빼어난 문장가였다.

괴시마을 뒤편엔 목은 전시관이 세워져 있고, 산쪽으로 '목은 등산로'라고 적힌 팻말이 나타난다. 이를 본 탐사팀이 한마디씩 한다.

"목은 등산로가 뭐냐? 목은 산책로라고 해야지."(박정애 시인)

"그것도 딱딱해요. '이색 충신의 길' 정도로 이름해야 눈길이 가지 않을까요?"(민병욱 부산대 교수)

■아치교 이름짓기

목은 등산로는 호젓했다. 걷자니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레라… '하는 시조 한 구절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영해 스므나골을 넘어서자 산뜻한 아치교와 함께 푸른 바다가 활짝 열렸다. 블루로드를 열면서 놓은 다리인데 아직 이름을 못 지었다고 한다. 강 계장이 "운해가 몰려들면 환상적인 곳"이라고 운을 떼자, 즉석 이름짓기가 시작됐다.

"이곳이 스므나골이라고 하니, '스므나골 안개다리' 쯤으로 하지."

"운중교(雲中橋)가 그럴듯하지 않나?"

"사랑海다리는 어때요? 영덕의 슬로건이 '사랑海요 영덕'이던데."

민병욱 교수가 또 이색 제안을 한다. "이 멋진 구름다리를 그냥 둘 게 아니라, 중국의 어느 관광지처럼 소원을 적어 자물쇠를 채우게 하는 이벤트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강 계장이 고개를 끄떡이며 말을 받는다. "이 지역을 6진(津)이라 하니더. 대진 1, 2, 3리, 사진 1, 2, 3리를 통틀어 그리 부르는데, 관광개발 때 참고해야겠니더."

설왕설래 속에 대소산(282m ) 봉수대를 올랐다. 부산에서 봉화를 띄우면 울산, 포항을 거쳐 이곳에 닿았다고 한다. 천지사방이 트여 막힌 가슴을 뻥 뚫렸다. 축산항에 도착하자 걸어온 길이 푸른 그리움으로 나풀거렸다.


※국제신문·(사)걷고싶은부산 공동기획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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