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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大 트레일을 연다 <5> 묵호~삼척(약 41㎞)

[창간 63주년 특집] 통일전망대 ~ 부산 650㎞

방황 다독이는 墨香의 바닷가 지나 관동팔경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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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호는 1930년대 일제가 항구로 개발
- 60~70년대 들어 동해안 제1무역항 전성기 누려
- 심상대 소설에선 술과 바람 도시로 묘사되기도
- 관동팔경의 1경인 오십천 죽서루 옛 정취 만끽


   
동해시 묵호항의 등대오름길은 묵호의 어제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들려주는 정취있는 마을길이다. 이 길을 내쳐 오르면 묵호 등대가 나온다. 동해시청 제공
'…'…그녀가 어둠 저 편으로 한 송이 커다란 꽃무늬 스카프를 감추며 사라졌을 때, 내 앞에는 새로운 바다가 놓여 있었다. 구르는 돌처럼 저항할 줄 모르고 언제까지나 이 해변에서 어정쩡히 서 있을 수는 없었다. 힘껏 뿌리쳐보지도 못하고 이대로 쓰레기 더미에 파묻혀버릴 수는 없었다. 문득 죽음을 생각했다. 웃음이 나왔다….'

마르시아스 심(본명 심상대)의 소설 '묵호를 아는가' 중 일부다. 이 빼어난 귀향소설이 아니었다면 묵호는 일찍 우리 뇌리에서 지워졌을 지 모른다. 이 작품이 있기에 묵호는 속에 감춘 이야기들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는다. 문학의 도저한 힘이다. 작가는 묵호를 '술과 바람의 도시'라고 했다. 바다와 술이 뒤섞이고, 바다의 짠내와 소주의 취기가 뒤섞여 싸우고 울부짖게 하면서도 기어이 살아가게 하는 곳이 묵호다.

■묵호를 아는가

   
이제 옛 묵호는 없다. 1980년 옛 명주군 묵호읍은 삼척군 북평읍과 합쳐져 동해시가 된 후 묵호동이 있을 뿐이다. 묵호는 1930년 일제에 의해 항구로 개발됐다. 인근 탄전과 영동선 개통과 함께 1941년 개항장이 되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60~70년대 묵호는 석탄과 시멘트를 실어 나르는 화주와 외항선원들이 북적였고 원근해 오징어잡이 배들이 700∼800척씩 몰려드는 동해안 제1의 무역항이자 어업기지였다. 이 때가 묵호의 전성시대였다.

작가가 묻고 있는 묵호는, 욕망이 들끓는 세속의 바다에서 방황하는 젊음을 돌려 세워 다독이는 곳이다. 그곳에 '부드럽게 출렁이는 젖가슴으로 돌아온 탕아의 야윈 볼을 투덕투덕 다독이는' 바다가 있다.

"그런데 왜 어둡게시리 묵호(墨湖)라 했을꼬?" 동해시 권역으로 들어서며 도보탐사팀의 누군가가 의문을 던진다. 동해시 홈페이지에는, 조선 후기 이곳에 큰 해일이 발생해 물도, 항구도, 물새도 모두 검게 변해 먹 묵(墨)자를 써 묵호(墨湖)라 했다고 돼 있다. 나쁘게만 볼 이미지는 아니다.

■까막바위와 호국 문어

   
묵호 어달리 해안에 있는 까막바위.
동해시 망상 해변 주변에서 동해안을 따라 걷는 도보꾼 2명을 만났다. 한 명은 20대 후반의 대학생, 또 한 명은 30대 후반의 직장인이다. 집이 서울인 대학생은 춘천~강릉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경북 영덕까지 걷고 있다고 했고, 직장인은 속초~삼척 구간을 답파 중이라고 했다. 구릿빛 얼굴에 목소리가 다소 갈라져 있었으나, 표정만은 밝고 당당했다. 대학생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스스로 인내를 시험하고 있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망상 해수욕장은 고운 백사장을 가진 도 지정 국민관광지. 풍경이 간결하다. 망상역과 인접해 있으며 여름철 '수평선 축제'를 열기도 한다. 인터넷에 '로맨틱 망상'이란 말이 떠돌아 뭔가 했더니, '망상(望祥)을 즐기라'는 뜻이란다. 혹시 헛된 망상(妄想)을 품었다면 '動트는 동해'에 던져버릴 일이다. '動트는 동해'는 동해시의 슬로건이다.

망상(역)에서 노봉교를 건너 서울대 동해해양연구센터와 대진해수욕장, 대진항을 지나면 어달리다. 대진 해수욕장 앞 삼거리횟집에서 해변으로 들어가자 탁 트인 바닷길이 나온다.

안묵호라 불리는 어달리에 이르자 해안에 까막바위가 수문장마냥 우뚝 서 있다. 고구려의 삼족오를 연상시키는 10m 높이의 괴석이다. 그 옆에 호국(護國) 문어상이 있다. 전설이 흥미롭다. 조선 중기 이곳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의로운 호장(이장)이 왜장을 보고 꾸짖었다. "내가 죽어도 너희놈들이 다시는 이곳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리라." 호통과 함께 천둥 번개가 일었고 거대한 문어가 나타나 왜적선을 모조리 깨부쉈다. 까막바위 앞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는 "이곳 해안은 호장의 영혼이 산다고 하여 해녀들도 잘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죽서루의 묵향

   
삼척 오십천 변의 자연암반을 절묘하게 활용해 세운 죽서루. 관동팔경의 하나이며 국가 지정 명승이다. 박창희 기자
묵호항을 구경하다 시장통에서 리어카에 실린 수십개의 가스통을 발견했다. 얼핏 보기에 녹슨 미사일 전시장 같았다. 신기해서 좌판 아줌마에게 물었더니 "수족관에 산소 공급하는 탱크"라고 일러준다. 묵호가 펄떡거리며 숨쉬고 있는 모습이다.

떠들썩한 묵호항을 지나면 발한삼거리이고, 시내를 통과하면 천곡동이다. 묵호항 여객선터미널을 넘겨보며 동해시로 들어간다. 동해항 방면에서 해안길은 북평산업단지로 인해 차단된다. 동해항 삼거리에서 북평교를 지나 시원하게 뚫린 해안길을 따라가면 추암(湫岩) 해변이다. 이곳에 애국가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촛대바위가 있다. 물은 깨끗하나 주변 풍광은 기대에 못미친다.

와우산 자락의 7번 국도를 따라 삼척으로 향한다. 삼척해수욕장-후진해수욕장을 따라 해안도로를 타면 새천년유원지를 만나고 곧장 삼척항이다. 도시 길이라 편하지 않다. 오십천의 삼척교를 건너면 맹방 해변으로 이어진다.

오십천의 죽서루(竹西樓·보물 제213호)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관동팔경 제1경으로 불리는 데다 3년 전 국가 명승으로 지정됐다. 자연 암반을 활용(그랭이 기법)한 조상들의 지혜에 눈길이 머문다. 누정에 앉으니 세상 근심이 씻기는 듯하다.

"진주관(삼척) 죽서루 오십천 흘러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차라리 그 물줄기를 한강변 남산에 닿게 하고 싶구나./ 왕명에 따른 여정은 유한하고 풍경은 볼수록 싫증나지 않으니,/ 그윽한 감회가 많아 나그네의 시름 둘 데가 없구나."(정철의 '관동별곡' 중)

죽서루 옆에는 선사시대의 암각화와 신라 문무왕이 뚫었다는 용문바위가 있다. 문무왕이 죽은 뒤 용이 되어 동해를 지켰다는 말은 들었으나, 오십천으로 뛰어들어 바위를 뚫고 승천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 어쨌든 이곳에서 많은 이들이 아름다움과 장수, 다복을 비는 기도처로 삼고 있다니 이채로운 자연물이다.

# 얘깃거리 많은 묵호

- 영화촬영 단골 묵호 등대, 정취 그윽한 붉은언덕 위 집들

묵호는 인구 5000명이 안 되는 작은 항구지만 얘깃거리가 많다. 묵호 등대와 등대오름길, 붉은 언덕의 집들, 영화의 고향, 흔들다리 등은 하나 하나가 쫄깃쫄깃한 추억을 선사한다.

묵호 등대는 '영화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1968년 '미워도 다시 한번'이 여기서 태어났다하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뿐만 아니라, '연풍연가' '인어공주' '파랑주의보' '찬란한 유산' 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여기서 촬영됐다.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내가 너 믿는데~ 좋은데~ 갖고 싶은데…." SBS 드라마 '찬란한 유산'에서 주인공인 환이(이승기 분)와 은성(한효주 분)의 사랑놀음을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려온다. 두 사람이 첫 키스를 나눈 장소가 묵호등대 앞 흔들다리다.

흔들다리를 걷다 보면 묵호의 붉은 언덕을 보게 된다. 논골, 산제골, 게구석, 돗제비골 등 정겨운 지명들이 향수를 자극한다. 비탈길을 오르다보면 오징어를 그려넣은 벽화, 좋은 글귀, 시화를 만날 수 있다. '묵호는 아낙의 마음입니다'란 글귀가 마음을 적신다. 흙벽돌에 의지해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게딱지처럼 모여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부산의 영주동, 수정동 산복도로보다 정취가 한결 그윽하다.

묵호 어달리에서 횟집을 하는 김경동(62) 씨는 옛날 저곳에 '묵호언덕빌딩'이 있었다고 술회했다. "대단혔지. 밤에 외항선원들이 입항하면 언덕길이 휘황찬란했어요. 수십층 고층빌딩이 즐비했다구. 하지만 아침이 되면 간밤의 고층빌딩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려요."

고층빌딩은 다름 아닌 언덕길에 자리잡은 판잣집과 슬레이트집에서 흘러나온 불빛이었다. 밤은 묵호의 실상을 어둠과 불빛으로 가려줬다. 그것도 옛 이야기. 묵호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이곳 언덕길도 쓸쓸해지고 있다. 묵호 언덕 슬레이트 삼 칸 집들이 주인을 잃고 하나 둘씩 헐려가고 있다. 살릴 '길'이 없을까.

※ 공동기획: 국제신문·(사)걷고싶은부산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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