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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의 한국미술과 부산 <4> 화가들, 남으로 부산으로

1·4후퇴 후 부산은 문화예술 수도로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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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0-09-12 20: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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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으로 향하던 피란민의 행렬을 묘사한 김원의 '한국전쟁-1·4후퇴'.
서울수복으로 비롯된 도강파와 잔류파의 부역논쟁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중공군의 갑작스런 참전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과 국군은 눈물을 머금고 철수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인들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압록강변까지 북진한 유엔군을 따라 북한 땅을 밟았다. 김병기는 고향인 평양으로 가 '북한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를 결성했다. 당시 평양에 잔류하고 있던 윤중식 장리석 황염수 등이 합세해 위원장에 오영진, 김병기 자신은 부위원장을 맡았다. 권옥연은 서울수복 후 강원도 양구를 거쳐 고향인 함흥까지 올라가는 도중에 이중섭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도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중공군의 참전은 대규모 피란 행렬을 낳았다. 가장 규모가 큰 피란은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의 미군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합동으로 흥남항에서 이루어졌다.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무기를 모두 하역하고 피난민 1만4000여 명을 태워 남으로 철수한 것이었다. 이 작전은 현재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것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이때 많은 화가들도 자유를 찾아 이 배를 타고 부산으로 왔다.

1951년 1월 4일 수도 서울이 다시 인민군과 중공군의 손에 넘어갔다 두달 뒤 3월 14일 재탈환되고 이어 7월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됐지만 여전히 부산은 미술과 문화예술의 중심이었다. 1·4후퇴 당시 부산으로 피란 온 일군의 화가들이 있다. 평양에 살던 최영림과 장리석은 선배의 소개로 금강산에 신축 중인 호텔의 벽화를 그리다 마치 북진하던 국군정훈부에 배속돼 군속화가로 북진을 해 원산에서 이중섭을 만나기도 했다. 이들은 1·4후퇴 땐 부산을 거쳐 제주로 내려와 해군부대 정훈반에서 포스터 그리는 일을 했다. 이때 최영림은 마산으로 피란와 있던 숙부와 연락이 닿아 숙부에게 가고, 장리석은 제주에 남았다.

이중섭은 화가 한상돈과 함께 처자와 조카 영진을 데리고 1950년 12월 6일 원산에서 해군함을 타고 사흘 뒤 부산에 당도했다. 그는 피란민 수용소에 살면서 부두노동자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38선 이북인 강원도 금성에 살았던 박수근은 전쟁이 터지자 마을 뒷산 방공호에 은거했다 가족들을 둔 채 홀로 남한행을 단행하여 군산에 정착했다. 여기서 부두노동자 생활하던 그는 그 뒤 월남한 가족들의 소식을 접하고 극적 해후를 한다. 이수억은 함흥사람으로 9·28수복 후 연합군이 진주하자 수도사단 정훈부에 군속으로 입대, 선무공작에 나섰다가 1·4후퇴 때 배를 이용해 포항을 거쳐 대구로 갔다. 또 함흥사범 교사였던 김형구는 12월 함흥에 주둔하던 수도사단 종군화가 자격으로 흥남부두에서 LST로 월남해 부산에 자리 잡았다.

1951년 6월께 당시 부산에 도상봉 이종우 김인승 이마동 박영선 손응성 박상옥 이봉상 김환기 장욱진 박고석 구본웅 문신 남관 고희동 김은호 변관식 배렴 이유태 등의 많은 화가들이 머물고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장욱진은 1·4후퇴 당시 부산으로 왔다 9월 고향인 충남 연기로, 유영국은 고향 울진에, 김종영의 경우 부산을 거쳐 고향인 창원으로 옮겨갔다. 윤효중의 경우 충무공동상을 만들기 위해 진해에, 이중섭의 경우도 부산, 서귀포, 대구, 통영, 진주 등지를 전전했다. 유강렬의 경우도 부산에서 활동했다지만 실은 1951년 통영의 도립 경상남도 공예기술원 양성소 주임강사로 근무했다. 또 천경자는 광주에서 부산을 오갔다.

따라서 당시 작가들의 거처와 활동지를 구분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작가들 대부분이 전쟁 중 주거가 불분명하고 친구나 지인의 집에 얹혀 지내거나 지방을 떠도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유일한 활동무대이자 발표의 장이 여전히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수도였던 부산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국민대 초빙교수·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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