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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의 한국미술과 부산 <3> 고난의 피란길-도강파냐 잔류파냐

서울잔류 일부 화가 부역자 심사로 곤욕

여섯빛깔 문화 이야기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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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0-09-05 20:45:14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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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화백의 '피란열차'(1951)
6·25 전쟁으로 불과 삼일 만에 서울은 인민군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이로 인해 많은 화가들이 수난을 겪었다. 특히 한국문화연구소 같은 반공투쟁기관에서 일했던 김병기의 경우 피란을 가지 못하고 후암동 집에 칩거하다 명동의 미술동맹에 나가 동향인 평양 출신의 문학수에게 회원증을 청했는데 서울대 미술대학 투쟁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김진항이 의용군 입대를 요구했다. 이 요구에 의해 1차 집결지인 일신초등학교(현 서울의 극동빌딩 자리)에 대기하던 중 인민군 장교의 도움으로 도망한다. 이인성과 류경채도 인민정치보위부에 체포당했다.

고희동은 도봉산에, 김은호는 퇴계원을 거쳐 금곡 천마산에 은거했고 장우성은 아내가 포도장수를 하며 인민군의 노력동원령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상범은 누상동 집 마루 밑에 구덩이를 파고 숨어 지냈다. 고등학교 미술교사였던 박고석은 수레를 끌고 행상을 다니며 경기도를 거쳐 충청도까지 내려갔다가 미군들을 만나 9·28 수복 후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12월 말 군인이었던 친구의 도움으로 트럭 편으로 부산으로 향했다. 유영국은 물론 김종영은 안암동 집에, 정신여학교 교감으로 재직 중이던 김경승도 서울에 남았다.

내수동에 살던 장욱진의 경우 서울에 남았다가 수복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자신도 곧이어 부산으로 향했다. 대전사범에 근무하던 이동훈도 부산으로, 서울대학에 재학 중이던 하인두는 1950년 6월 28일 가족과 함께 관악산에 노숙을 한 후 걸어서 수원까지 가 그곳에서 열차를 얻어 타고 대구로 내려갔다. 탈출해서 의용군 입대를 면한 김병기는 수복 후 유엔군과 함께 군복을 입고 평양까지 올라갔다. 1·4후퇴 때 유엔군과 함께 퇴각하여 우여곡절끝에 제주를 거쳐 부산에 당도하였다.

9·28 서울 수복은 모두에게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미처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화가들은 부역자 심사를 거쳐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안타까운 희생자들이 나왔는데 김진우도 그중 한사람이다. 항일 독립운동가로 일세를 풍미한 묵죽화의 대가 김진우는 미도강파 저명인사로 분류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1950년 12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만화가 임동은도 전쟁 중 부역자로 체포되어 경찰서 유치장에서 죽음을 맞았다. 인민군에 체포됐던 이인성은 11월 3일 한국경찰의 오발사고로 숨졌다.
   
서울수복 후 대한미술협회는 인공치하 3개월간 미술인들의 부역행위를 조사 심의하는 기구로 심사위원회를 조직했다. 심사위원으로는 협회장인 고희동을 비롯해 이종우 이마동 이순석 장발 이유태 장우성이 맡았고, 종군화가단 사무국장을 지낸 이세득이 조사위원을 맡았다. 심사위원들은 부역미술인들을 정도에 따라 A B C급으로 분리하고 그중에서도 A급에 해당하는 자들은 조사위원회에 넘기기로 했는데 그 중에는 도상봉 박상옥 이봉상 윤효중 김환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도 성북경찰서에 끌려갔는데 인민공화국을 상징하는 심벌을 그렸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경기중학에 재직하던 박상옥의 경우는 요령부득인 성격과 좋은 체격 때문에 부역자로 몰려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미술동맹에 동원되어 김일성의 초상화와 승전고취의 포스터를 그린 그는 부역자로 분류되었고 그의 부인은 떡장수로 생계를 이으면서 남편의 구명운동을 하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1·4후퇴와 함께 풀려나온 박상옥은 가족과 함께 평택의 오지로 들어가 칩거하다 경기중학이 부산에서 피란학교로 문을 열자 1951년 9월 부산에서 복직했고 종군화가단에 적을 두기도 했다.

사실 미술동네에서는 잔류파다 도강파다 하는 이야기는 무성했지만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다만 화가들 사이에서 감정적으로 격해지거나 술자리에서 상대방을 폄훼하기 위해 말다툼을 할 정도였고 대부분은 1·4후퇴 당시 부산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내막을 좀 더 살펴보면 1955년 일어나는 대한미협과 한국미협의 분열시 세력판도와 매우 유사한 그림이 그려진다는 점에서 유감이다.

국민대 초빙교수·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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