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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의 한국미술과 부산 <1> '악의 꽃'을 피워내다

6·25전쟁 속에서 문화예술의 수도로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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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0-08-22 21:01:49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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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상잔의 비극으로 한반도가 절규하던 시절 항도 부산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이자 수도였다. 한국전쟁이라는 미증유의 역사 앞에 몸을 피해야 했던 화가들에게 영원한 유토피아로서 부산과 부산의 미술을 통해 우리 현대 미술사의 흐름을 더듬어 보고, 잠자고 있는 부산 미술의 혼을 되살리기 위해 국립현대미술관 전 학예실장을 지낸 정준모 교수의 글을 연재한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의 풍경을 묘사한 양달석 화백의 '자갈치 시장'.
바다를 접하고 있는 항구도시 부산은 일찍이 새로운 문명과 문물에 대한 이해의 폭이 어느 지역보다도 넓었다. 이는 아마도 지정학적인 특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새로운 것, 남다른 것에 특별한 관심을 지닌 사람들의 성격도 한몫 했을 것이다. 특히 서양문물을 일찍이 받아들였던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터라 부산은 늘 새로운 문화와 조우했고, 이를 수용하고 자신의 문화로 만들어내는 남다른 능력이 있는 용광로 같은 도시였다.

물론 1876년 병자수호조약에 의해 부산항이 개항하면서 더욱 활발하게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는 통로가 됐다. 개항 이후 무역과 기타 상업적인 활동을 위해 일본인들이 거주하게 되면서 일본에서 무명의 화가들이 건너와 그들 집안의 장식용으로 '일본화'와 '유화'를 그려 '구무품'(求貿品)을 팔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유화라는 근대적인 기법과 재료가 부산에 도래한 계기다. 특히 1922년 처음으로 창설된 '조선미술전람회'에 일본인 화가들 중 여럿이 출품한 기록으로 짐작해볼 때 이미 많은 일본인 화가들이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이런 중에 자연스럽게 부산 시민들도 '유화'라는 새로운 매체에 노출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새로운 교육제도가 시행되면서 동래고를 비롯한 일부 학교에 일본인 미술교사들이 재직했고 이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유화를 익히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반도에서 최초로 공모전이 열린 곳도 부산이고 보면 부산과 미술은 그 인연이 대단했다. 1928년 일본어로 발행되던 일간지 부산일보가 주최한 '부산미술전람회'가 그것이다. 그림을 공모해서 심사하고 시상하고 전시를 하는 일종의 유럽, 특히 프랑스의 살롱전 형식을 빈 미술전람회가 부산에서 처음으로 열린 것이다. 또 종군 사진작가로 6·25전쟁 분기점이 된 인천상륙 전쟁을 사진으로 남긴 임응식(1912~ 2001)의 형님으로 일본 도쿄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임응구(1907~1994)가 개인전을 연 것도 1934년의 일이고 보면, 부산 미술의 역사가 결코 녹록치 않음을 알 수 있다.

1939년에는 '춘광회'가 결성됐다. 부산지역에서 활동하던 우신출 양달석 서성찬 김남배 이일동과 일본인 화가들 두엇이 화우로 참가했다. 춘광회는 1942년까지 모두 3회의 전시를 가졌다. 그리고 1941년에는 남선미술전람회(南鮮美術展覽會)가 부산일보 주최로 열렸다. 이 전시회는 일제가 조선을 전쟁으로 내몰기위한 '미술보국' 차원의 전시였다.
광복과 함께 부산 화가들은 어느 지역보다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946년 부산 미술인들은 가장 먼저 '부산미술가동맹'을 결성해서 활동을 개시했고 휴전으로 전쟁의 포성이 멈추면서 오늘의 '부산미술협회'로 발전한다. 광복 3년 만인 1948년, 민주중보사 주최로 제1회 부산미술전람회가 열린다. 이는 광복 후 우리나라에서 열린 최초의 공모전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보다도 1년이나 앞선다. 이런 공모전의 역사가 부산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1968년 동아대가 창설한 동아국제전이 최초의 민간 주최 국제 공모전이었으니 말이다.

   
6·25전쟁은 부산을 문화예술의 수도로 만들었다. 본의건 본의가 아니건 부산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보루인 동시에 문화예술의 종착지였던 셈이다. 부산은 외지인들에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따뜻하게 대했으며 그들의 문화활동을 존중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전쟁이라는 폐허에 한 떨기 꽃처럼 문화와 예술 특히 미술가들이 위축되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다. 광복동과 중앙동 일대의 다방은 미술인들에겐 휴식처이자 창작의 공간이며 발표의 장이었다. 이들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더하는 속에서도 마치 '악의 꽃'처럼 예술의 꽃을 화려하고 탐스럽게 피워냈고, 부산은 그 바탕이 돼주었다.


▶필자 약력=국민대학교 행정대학원 초빙교수(미술관 박물관학 전공), 국립현대미술관 전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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