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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문학기행 <98> 박형준 시인과 고향 정읍

흩뿌려진 민초의 피눈물도… 처녀비행 어린 매의 고독도…

여린 詩 한자락도 품어주는 그의 고향은 들녘

  •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
  •  |   입력 : 2010-06-22 20:35:45
  •  |   본지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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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정읍은…들녘입니다." 부산에서 달려간 문학기행 일행과 서울서 내려온 박형준 시인이 정읍역에서 처음 만났을 때 박 시인이 들려준 첫마디였다. 지금 그날 하루를 돌이켜 보니, 이 말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정읍은 들녘이다'.

■지평선이 보일 듯

박형준 시인이 정토사 마당에서 고향 들녘을 가리킨다.
"어! 저게 뭐지?" 박 시인과 문학기행 일행을 태운 버스가 들판 사이를 달릴 때 창밖을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건 지평선이었다. 카메라 줌렌즈로 풍광을 당겨보니 멀리 땅끝으로 희미하게 산능선이 보였다. 그러니 그건 순수한 뜻에선 지평선이라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도시에서 사는 사람의 맨눈엔 그건 분명히 지평선으로 보였다.

그렇게 넓고, 농번기를 맞아 푸르게 빛나는 들녘을 달려 일행이 처음 간 곳은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동학농민혁명기념관(www.donghak.go.kr)이었다. 혁명기념관 전시실로 들어서자 처음 눈길을 끈 것은 '진혼'이라는 조형물이었다. 커다랗고 투명한 사각 유리기둥이 여러 개 있고 그 속에는 모두 합쳐 수천 개는 될 법한 백열전구가 들어있었다.

딱 보는 순간 이게 뭔지 알 것 같았다. 기둥의 쓰임새는 뭔가를 받치는 것이다. 그러니 유리기둥도 뭔가 받치는 것을 상징할 것이다. 이 장소가 '혁명기념관'인 만큼 겨레의 혼이나 공동체의 운명 같은 것을 떠받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둥 속에는 수천 개의 백열등 알전구가 들어있다. 백열등은 빛을 내는 도구다. 한 개가 빛을 내면 자기 한 몸 빛나거나 집 한 채 정도는 밝히는 작은 존재다. 그런데 수천 개가 동시에 빛을 내면? '아! 이 백열전구들은 동학농민혁명에 나섰던 농민들을 상징하는구나'. 어린이들도 금방 이해할 것 같았다.

그 단순함과 선명함 앞에서 문득 '이건 좋은 예술작품이다'란 생각이 들었다. 메가폰에 대고 크게 육성 그대로 토로하는 방식이 아니라 살짝 '상징'이라는 우회장치를 거치면서도, 선명히 제 목소리를 내고 자신이 서 있는 공간과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정열이 담긴 설명으로 이날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안내해준 문화유산해설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기념관엔 사실 유물은 많지 않아요. 하지만 저 바깥 들녘 전체가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입니다. 저 들판에서 겨레를 위해 일어섰던 수많은 동학농민혁명군이 싸우다 쓰러져 갔으니까요. 그땐 저 들녘이 피로 물들었겠죠." 동학농민혁명으로 희생된 조선의 백성은 4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혁명의 유적과 푸르른 바람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조형물 '진혼'.
'정읍은 들녘이다'. 너른 들녘이니까 산물이 많았다. 산물이 많았으니까 힘 있는 자들의 착취도 질겼다. 그 착취 탓에 농민들은 일어섰다. 일어섰다는 이유로 권력과 외세는 참혹하게 이들을 밟았다. 그런데 들녘은 역시 품이 넓다. 역사와 혁명과 유적 같은 큰 것들뿐 아니라 박형준 시인의 시 같은 작고, 섬세하고, 내밀하고, 깊고, 여린 것들도 품어주었기 때문이다.

'첫 비행이 죽음이 될 수 있으나, 어린 송골매는 절벽의 꽃을 따는 것으로 비행 연습을 한다-근육은 날자마자/고독으로 오므라든다//날개 밑에 부풀어오르는 하늘과/전율 사이/꽃이 거기 있어서//絶海孤島(절해고도),/내리꽂혔다/솟구친다/근육이 오므라졌다/퍼지는 이 쾌감//살을 상상하는 동안/발톱이 점점 바람 무늬로 뒤덮인다/발 아래 움켜쥔 고독이/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서녘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동이일까//천길 절벽 아래/꽃파도가 인다'(박형준 시인의 '춤' 전문, 시집 '춤'(창비) 수록)

이 시는 현재 한국 시단에서 강력한 조명을 받고 있는 박형준 시인의 최근 시집에 두 번째 순서로 실린 작품이다. 굉장한 수직의 운동감이 느껴진다. 높이 날아오를수록 근육은 긴장으로 오므라든다. 높이 오를수록 고독해진다. 그리고 내려꽂힌다. '꽃이 거기 있으니' 그걸 보고 내려꽂히는 것이다. 그대로 내려꽂히기만 하면 땅에 부딪쳐 죽는다. 다시 솟구친다. 이 시는 시 창작에 대한 시인의 태도도 보여주는 것 같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 시에서 느껴지는 큰 심상은 수평으로 넓게 펼쳐진 들녘이다. 하늘 높이 고독하게 올라간 어린 송골매의 눈에 뭐가 보일까. 날개 아래 펼쳐진 들녘일 것이다. "내게 고향 정읍은 들녘입니다. 녹두장군 전봉준과 동학의 역사와 유적도 많아 좋지만 들녘의 바람과 향기를 느끼셨으면 합니다."

■호남선을 보면 가슴이 뛰었고

박 시인이 어린이 참가자들과 걷고 있다.
박 시인은 일행과 함께 정읍시 정우면 정우초등학교로 갔다. 시인도 오랜만에 와본다고 했다. 정우초등학교에서 그는 잠깐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옛날의 학교 모습을 보고 싶어 뒤쪽을 돌아보고 왔다"고 그는 말했다. "저는 초등학교 때 반장도 했어요. 선생님한테 욕하고 도망가는 친구를 쫓아가서 들판 한가운데서 잡기도 했어요."(웃음) 그의 고향마을과 정우초등학교 앞으로 그때도 지금도 호남선이 지나가고 있다. '저 기차를 타면 서울로 갈 수 있다'고 끝없이 속삭여줬던 호남선이었다.

"초등학교 때 실제로 아이들이 호남선 열차를 타고 가출을 감행하는 일이 많았죠." 그는 "나도 호남선을 보면서 먼 곳을 동경했고 지금도 그런 동경이 남아있다. 그 때문인지 내 시가 멋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전히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가 살던 정우마을은 한 자로 맑을 정(淨) 비 우(雨) 자를 쓴다고 했다. '맑은 비'가 내리는 너른 들녘의 마을에서, 가난했지만 다 같이 가난했으므로 가난을 느끼지 못하고 살면서 들의 내음과 빛깔을 간직한 소년은 도시 변두리로 전학갔다. 거기서 비로소 가난을 실감하고, 삶의 균열을 느끼면서 점점 "혼자 노는 캐릭터"가 되어갔다. 방안에서 계몽사 50권 문학전집을 모조리 읽으면서 시인의 길로도 들어섰다.

일행은 정우마을 뒷언덕의 정토사로 시인과 함께 올랐다. 정읍 들녘, 시인의 고향마을과 집, 수시로 열차와 KTX가 지나가는 호남선, 멀리 신태인…. 모조리 잘 보였다. "어릴 때 이 절에 자주 올라와서 놀았습니다. 들판에서도 잘 뛰어놀았고. 내 시엔 두 가지 풍경이 많이 나와요. 정읍의 들판 풍경 그리고 어린 시절을 보낸 인천의 변두리 마을. 고향은 확실히 내 시의 토양입니다."

그의 시는 그물에 잘 걸리지 않는 물고기 같아서 깊이 감상하기는 좋아도 뭐라고 똑 부러지게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그를 평단에선 "한국 전통시의 서정을 가장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정토사 마당에서 고향마을을 내려다보며 시인이 말했다. "막상 고향마을로 올 때는 보여드릴 게 없어 부끄럽고 죄송하단 생각이었는데 실제 와보니 소박한 우리 마을도 참 좋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고향마을에 오기 전까지 "보여드릴 게 없어서 걱정"이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근데 막상 와보니 또 느낌이 달랐던 것이다. "시인은 역사가가 아니니까 실제 고향과 내 시 속의 고향은 다르겠죠. 내 시 속의 고향은 저의 추억이 덧칠된 이미지일테니. 그런 데서 시는 나온다고 봐요. 큰 것보다 작은 것, 쥔 것보다 놓친 것…그런 데 눈길을 주면 문학이 잘 보이겠죠." 정토사에서 독자들에게 문학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는 고향마을과 들녘을 다시 보았다.

신문학기행 참가문의=동보서적 (051)803-8000 부산문화연구회 (051)441-0485 http://문학기행.kr


# 박형준 시인은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산문집 '저녁의 무늬'. 제15회 동서문학상, 제24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등 수상. 그는 "서울예대 85학번으로 고 오규원 시인께 시를 배우며 혼도 많이 났다"고 했다. "고향마을 이름이 '맑은 비가 내리는 마을'을 뜻하는 정우(淨雨)다. 왠지 소설가보다는 시인이 더 잘 어울리지 않느냐"며 시의 길로 간 사연(?)을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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