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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김동호의 세계 영화제 기행 <18>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피렌체한국영화제

월드컵으로 상처입은 이탈리아인들, 한국영화에 열광하다

  • 국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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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0-05-12 20:41:14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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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본선 패배 후 반한감정 해소 위해
- 리까르도 젤리 집행위원장과 한국인 장은영 씨 한국문화 소개행사 2003년 개최 시발
- 이듬해 6월부터 본격 영화제 꾸려

- 르네상스 건축 조각 고색창연 도시에서 한국 주류영화부터 독립영화까지 망라
- 2년 뒤엔 10회 맞아

   
리까르도 젤리 피렌체한국영화제 집행위원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피렌체 현지에서 필자(오른쪽에서 두 번째), 정수완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오른쪽에서 네 번째) 등 영화제 한국대표단과 기념 촬영을 했다.
내가 처음으로 이탈리아 피렌체를 찾은 것은 문화공보부 공보국장으로 재직했던 지난 1976년 7월 29일이었다. 그해 6월 29일부터 7월 20일까지 3주간동안 영국 공보성(COI)초청으로 브라질 이란 말레이시아 요르단 나이지리아 등 개발도상국가의 정부 공보책임자 7명과 함께 영국 중앙 및 지방정부와 공공기관의 공보활동상황을 시찰하였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를 거쳐 7월 28일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했다. 대학 동기인 강종원 일등서기관의 안내로 조상호 대사를 만났지만 그의 공무에 지장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문화의 중심지였던 피렌체를 방문하고 싶었던 나는 생각 끝에 다음날 새벽, 강종원 서기관에게 연락도 하지 못한 채 피렌체로 떠나는 관광버스를 탔다. 피렌체에 도착해서 안내원을 따라 두오모 대성당, 산 지오바니 세례당, 우피치 미술관 등 문화유적들을 돌아봤다. 당시 영어를 잘 못했던 나에게는 '주마간산'격의 문화탐방일 수밖에 없었지만 유럽을 지배했던 르네상스 문화에 대한 충격은 엄청났다.
그로부터 32년이 흐른 2008년 3월 8일 두 번째로 피렌체를 방문했다. 프랑스 도빌아시아영화제에 참석하러 가던 도중 피렌체한국영화제를 방문한 것이다. 피렌체한국영화제는 좀 특이하다. 통상적으로 해외에서 개최되는 '한국영화제'는 런던의 한국영화제처럼 주재국의 한국문화원이나 코리아소사이어티 같은 기관이 개최하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이곳만은 예외다. 이탈리아 사람인 리까르도 젤리가 창설해서 운영하고 있다. 그는 피렌체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그래픽을 전공했다. 평소 한국에 대한 애정이 많았던 그는 이탈리아가 월드컵 본선에서 한국에게 패한 후, 이탈리아 국민들이 품고 있던 반한감정을 해소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한국인 친구인 장은영과 함께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행사를 개최했다.(2002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와 한국의 경기는 지금까지도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사건이다) 그녀는 이화여대 조소학과를 졸업하고 패션디자이너로 피렌체에서 살고 있었다.

최초의 한국문화소개행사는 2003년에 열렸다. 당시 한국대사관과 삼성, 대한항공, 토스카나 주정부, 피렌체 시 등 관련 기관의 협찬으로 26점의 조각전시, 김종건의 '태극-사진전', 자수박물관 소장 자수전시, 이순화 한복패션쇼, 부산시립무용단 공연과 함께 한국영화 15편을 상영하였다. 이때 한국교민은 물론이고 피렌체를 비롯한 토스카나 주민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이에 힘을 얻은 리까르도 젤리와 장은영은 2004년 6월 본격적으로 영화제를 꾸리기 시작했다.

   
리까르도 젤리 피렌체한국영화제 집행위원장과 장은영 집행부원.
'쉬리'(강제규), '나쁜 남자'(김기덕), '색즉시공'(윤제균), '친구'(곽경택), '집으로'(이정향), '엽기적인 그녀'(곽재용), '바람난 가족'(임상수), '동승'(주경중), '춘향뎐'(임권택), '폰'(안병기) 등 9편을 초청하여 상영함으로써 한국영화제를 정례화하기 시작했다. 4월로 옮겨 개최한 제3회 한국영화제에는 김기덕 감독 회고전을 개최하여 전작 11편을 모두 상영하는 것 이외에도 '스캔들'(이재용), '원더풀 데이즈'(김문생) 등 단편, 애니메이션을 포함한 총 22편의 한국영화를 상영했다. 제4회부터는 개최시기를 3월로 옮기고 영화제 명칭을 '삼성한국영화제'로 바꾸었다. 이 해에는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박찬욱(7편), 김지운(6편), 송일곤(8편)의 영화를 망라한 것을 포함하여 모두 28편을 상영했다. 제5회 영화제에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12편과 임상수 감독의 영화 5편을 각각 회고전으로 상영하면서 모두 25편의 한국영화가 초청됐다.

내가 처음 찾았던 제6회 영화제에서는 이명세 감독의 'M' 등 4편, 이윤기 감독의 '아주 특별한 손님' 등 4편, 임순례 정재은 이미연 변영주 등 한국 여성감독 작품 4편 등 모두 34편의 한국영화가 상영됐다. 나를 포함해서 이명세 감독, 오수미 프로듀서, 정수완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로마 거주 이현 화가 등이 참석했다. 10만 유로의 소요예산 중 삼성에서 3만 유로를 지원받고, 나머지는 토스카나 주정부, 피렌체 시정부의 지원금과 일부 스폰서의 지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6000명의 관객 중 80%가 이탈리아 사람이라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나는 나흘간 머물면서 학예연구사를 겸한 프란체스카와 하정선의 안내로 피렌체의 문화유적들에 대해, 그리고 특히 메디치 가문에 대해 전문적이면서도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지금까지 무관심했던 유럽의 근대 미술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진품을 만날 수 있는 피렌체는 그 자체로 유럽의 정수를 담고 있다. 메디치 가문에서 소장한 르네상스의 작품을 모아놓은 우피치 미술관에는 보티첼리의 작품을 비롯하여 르네상스의 유수한 작품을 맛볼 수 있는 곳이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실물로 볼 수 있는 아카데미아미술관은 이 예술품을 관람하는 사람들로 항시 붐비는 곳이다. 입구에는 미켈란젤로의 후기작을 볼 수 있는데, '노예' 시리즈로 알려진 돌 위에 튀어나올 것 같은 인물들의 형상은 그의 다양한 면모를 짐작하게 한다. 4m가 넘는 다비드상이 고전적인 우아함을 보여주는 형식미의 절정이라면 후기작은 포스트모던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가 일생에 걸쳐 구현한 리얼리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보는 것도 경이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고색창연한 도시에서 영화제를, 그것도 한국영화제를 한다는 것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곳에서 현대 미술이 전시되는 경우는 드물다. 올해 영화제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르네 마그리트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이처럼 현대 미술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것이 피렌체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라고 한다. 하긴, 오페라 하우스를 개조한 메인 상영관의 모습에서조차도 이곳에서 현대영화가 상영되는 것은 어쩐지 낯설게 느껴진다. 과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극장의 모습은 '오페라의 유령'에서 나올 법한 분위기를 띠고 있고, 거리 곳곳이 모두 르네상스의 건축물과 조각품으로 쌓여 있어 이곳에서 한국영화제가 열린다는 것 자체가 확실히 이국적으로 느껴진다.

이런 고도(古都)를 배경으로, 피렌체의 한국영화제는 조금씩 성장해 왔다. 지난해 제7회 영화제에서는 이창동 감독의 회고전을 열었고, 곽재용 감독이 참석했다. 영화제 후반에 양익준 감독이 '똥파리'를 들고 스위스를 거쳐 유럽순례의 마지막으로 피렌체를 방문했다. 그는 상영이 끝난 후 현지 관객들과 함께 맥주를 마실 정도로 친밀한 시간을 보냈다. 이처럼 피렌체 한국영화제는 전문적인 경쟁섹션을 도입하기보다는 한국영화를 소개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영화제에 가깝다. 그러나 최근에는 관객상과 보다 전문적인 영화관객을 모아 시상하는 섹션을 통해 점차적으로 영화제의 규모를 키우고 있다.

   
올해 제8회 영화제에서는 허진호 감독의 회고전을, 특별 프로그램으로 한국의 공포영화를 한데 모았다. 박기형 감독의 '여고괴담'을 비롯하여 1990년대 후반에서부터 2000년대의 주요한 공포영화들이 한 자리에 소개됐다. 현지인들의 관심은 높았다. 특히 '한'이 서린 원귀가 등장하는 다양한 공포영화들은 한국영화에 대한 또 다른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올해는 유난히 기자회견이나 특별 프로그램을 통해 홍보도 적극적으로 펼쳤는데, 사람들의 관심을 끈 프로그램은 박기형 감독과 이탈리아 공포영화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이 함께 무대에 선 장면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한국과 이탈리아 영화가 어떻게 직간접적으로 교감해 왔는지를 토론하였다. 아르젠토 감독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의 특별전 주인공으로 방문하였는데, 그것이 한국과 한국문화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을 것이다.

피렌체한국영화제는 한국의 주류 영화나 작가 감독의 영화뿐만 아니라 독립영화들을 지속적으로 상영하는 곳으로도 자리잡고 있다. 한 달 뒤인 4월에 열리는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 한국 영화의 몇몇 작품들이 소개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발 빠르게 한국영화의 이모저모를 소개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창구가 바로 르네상스의 향기를 지닌 피렌체인 것이다. 물론 영화제를 본격적으로 꾸려가기에는 상영편수도 다소 적은 편이고, 아직까지 관객 동원에 있어서도 일부 마니아에 한정된 것 같은 인상은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문화 중심 도시인 피렌체에서 한국영화들이 매년 대거 소개가 된다는 것은 충분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제에서는 열정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현지 한국 유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 특별한 혜택도 보수도 없지만 외국에 나간 한국인들이 그러하듯이 애국심과 향수가 얼룩져 한국의 영화인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장소인 것이다. 리까르도 젤리 집행위원장은 10회 때 맞이할 보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2년 뒤에는 피렌체에서 열리는 제10회 영화제를 통해 한국영화의 다양한 흐름들이 소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16세기의 중심지였던 이곳에서 5세기가 흐른 뒤에 또 다른 르네상스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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