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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0> 한글에 숨겨진 초원의 지혜

간략한 획의 조합·실용적 쓰임새… 초원제국 문자, 한글과 닮았다

간단한 기호로 만든 돌궐의 표음문자, 글 배우기 간편하고 정보 공유력 풍부

한글 특장점과 통해 초원과 조선의 지혜 시대 거슬러 상통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4-12 19:57:37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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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왕의 명령에 따라 단기간에 매우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글자로 전 세계적으로도 참 드문 예다. 하지만 약간 시야를 넓혀 보면 자신의 글자를 만드는 전통은 세종대왕 이전에 초원의 여러 제국들에서 시작되었다. 과연 한글의 기원은 초원의 문자와 관련이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또 그 기원은 어디였을까.


글자를 모르던 초원민족

돌궐제국의 비문이다. 윗부분에는 늑대가 그려져 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이 초원민족인 스키타이족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를 소집했을 때의 일이다. 다리우스왕은 보스포르해협을 건넌 후 그곳을 지키는 이오니아 군대에게 60마디가 엮인 매듭을 주면서, 하루에 하나씩 자르고 다 자를 때까지 우리 부대가 돌아오지 않으면 배로 만든 다리를 끊어버리라고 했다. 페르시아나 이오니아 같은 문명국가는 이미 문자가 고도로 발달돼 있었다. 문자가 있음에도 굳이 매듭을 주었던 이유는 초원 지역의 영향으로 중요한 약속은 매듭으로 의사를 소통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매듭으로 배수의 진을 치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초원민족은 글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던 흉노도 글자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매듭을 엮는 식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물론 흉노의 외교문서는 높은 수준의 한문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문서를 실제로 쓴 사람들은 망명한 중국인들이었다. 아직 흉노인들의 글자는 발견된 바 없다. 흉노 같이 거대한 제국이 글자 없이 어떻게 전체 국가를 다스릴 수 있었을까.

이는 초원제국들의 독특한 지배체제와 연관돼 있다. 즉, 군인 10명은 1명의 장수가 통치하고, 또 10명의 장수는 다시 1명의 장군이 통치하는 일종의 십부장제다. 나라가 아무리 커진다 해도 각 군인이나 백성은 1명의 명령만 듣고 10명만 통제하면 되는 셈이니 굳이 글자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글자 대신 초원민족들은 '탐가'라는 기호를 썼다. 원래는 자신이 기르는 가축이나 말에 찍는 낙인을 말하는데, 무기나 토기에 자기 집단의 상징으로 그려넣기도 했다.


돌궐의 글자를 발견하다

니콜라이 야드린체프가 19세기 말 발견한 돌궐비석에 돌궐왕조의 제2대 카간 퀼-테긴의 치적이 돌궐문자로 기록돼 있다. 사진은 퀼-테긴의 두상.
19세기 말 시베리아의 인텔리 중에는 시베리아를 러시아에서 분리시켜서 독립할 것을 주장하며 시베리아의 향토사 연구와 대외활동에 힘쓴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인 니콜라이 야드린체프(1842~1894)는 본업(?)인 대중계몽보다는 시베리아 고대사 연구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 이유는 그가 몽골의 올혼강 답사 중 발견한 돌궐제국의 비문 때문이다. 특히 그 중 한 개는 제 2 돌궐왕조의 제 2대 카간(왕)인 퀼-테긴의 기념비로 돌궐제국이 자신의 문자를 사용했음이 밝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퀼-테긴의 비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견된 광개토왕비와 함께 19세기말 동양 고대사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더욱이 돌궐의 비문은 중국어도 같이 쓰여 있어 비교적 손쉽게 해독될 수 있었다.

흉노 이래로 초원국가는 한문을 빌려 쓰고 있었으며, 유목을 하는 일반 백성들에게 글자를 가르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돌궐제국은 왜 자신들의 글자를 만들었을까. 돌궐이 문자를 만든 이유는 자기 제국의 권위와 자주성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돌궐문은 모두 중국어가 같이 쓰인 비문에서만 발견되며, 그 내용은 돌궐 카간의 치적을 열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돌궐문자는 마치 한글의 ㄱ,ㄴ,ㅁ 같은 간단한 기호로 '알파벳'을 만든 표음문자이다. 돌궐문자를 처음 해독한 덴마크의 언어학자 톰센은 돌궐의 문자를 '룬문자'라 하고 근동의 아람어에서 기원했다고 보았다. 초원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돌궐문자의 기호는 이전 스키타이 문화의 토기나 암각화의 탐가와도 유사하다. 아마도 독자적인 글자체계를 만들 때 이전 시대의 문자부호를 참고했을 것 같다. 좌우간 단기간에 글자를 만들고 사방에 반포할 정도였다면 돌궐제국에는 한문과 다른 글자에 능통한, 마치 집현전 같은 기구가 있었을 것이라 상상해볼 수 있다.


한글과 초원문자는 어떤 연관 있을까

손잡이에 서하문자를 새겨넣은 청동칼(왼쪽)과 원나라 파스파 문자가 새겨진 은판.
문자는 보통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로 나뉜다. 4대 문명의 글자는 모두 상형문자에서 기원했다. 한자 이집트어 인더스어 모두 상형문자 계통에서 발생했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역시 그 출발은 상형문자였다. 다시 말해 모두 표의문자 계열인 것이다. 반면 돌궐 이래로 거란, 서하, 몽골 등 초원제국은 기본적으로 표음문자를 만들었다.

초원제국의 문자들은 서하문자처럼 한자의 획을 조합하거나 간략화해서 만든 것(일본어의 가나도 이에 해당한다)과 부호식으로 글자를 만든 경우로 나뉜다. 글자를 만든 원리가 어떻든지 간에 공통점은 글을 배우는 데에 번잡하지 않고 실용적이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글자의 목적이 선택된 소수의 독점이 아니라 널리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바로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인 '나랏말씀이 중국에 달라…사람마다 널리 편안하게 쓰려 함이라'와 상통한다.

한글의 기원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논란이 있다. 한글 창제 당시 옛글자를 참고해 만들었다는 기록에 근거해서 산스크리트어나 단군시대의 문자인 가림토에서 참고했다는 설, 몽골의 파스파문자를 참고했다는 설, 그리고 발성기관을 본따 만들었다는 설 등 분분하다. 사실 현재로서 어느 설이 결정적으로 맞는지 근거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조선이나 초원의 유목제국들 모두 나라의 기틀이 잡히면서 가장 먼저 자신의 문자를 고안하고, 또 자신의 말로 된 역사를 편찬했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에 몽골을 비롯한 여러 초원지역 국가들과 교류했기 때문에 그러한 표음문자가 쓰이는 방법을 참고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몽골의 파스파문자, 인도의 구자라트어, 산스크리트어 등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한글과 유사한 자모가 제법 있다. 하지만 기호의 형태가 비슷할 뿐 실제 음가나 언어체계는 완전히 다르다. 아마 특정한 글자를 따왔다기 보다는 다양한 초원국가 언어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우리말에 걸맞은 새로운 문자를 재창조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한글의 기원은 다양한 언어의 장점을 취합한 자체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돋보이는 한글의 가치

강인욱 부경대 사학과 교수
돌궐에서 시작된 초원지역 표음문자의 전통은 한글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또한 한글은 초원의 제자(題字)전통을 따른 문자 중 가장 발달한, 유일한 문자이기도 하다. 이전의 서하문, 돌궐문, 여진문, 몽골문, 거란문 등은 이미 사어(死語)가 되었거나 그 쓰임이 거의 없다. 지금도 중국의 내몽고나 영하 등의 자치주에 가면 간판에 한자와 함께 조그맣게 회어나 몽골어를 병기해놓았다. 하지만 그 글자들을 제대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는다. 조만간 사라지고 한자사용권으로 통합될 운명이다.

이렇듯 세계는 서양의 알파벳문화권, 아시아의 한자문화권, 그리고 러시아문자인 끼릴문화권으로 재편되고 있다. 그 와중에서도 한글의 편리한 체계는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더욱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다른 초원제국의 언어가 사라지는 마당에 한글만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 중 하나는 한글이 삼국시대 이래로 써오던 향찰을 변형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호를 창조해서 모음과 자음이 결합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점에 있다. 이로써 다른 초원국가들의 표음문자가 가지는 장점을 갖는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음가 표현의 호환성을 갖추었다. 게다가 한자문화권 안에 있어 한자와도 잘 어울린다.

다양한 글자를 읽는대로 쓰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그 뜻에는 초원민족의 지혜가 녹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세기 유교가 널리 퍼져 있던 조선에서 이런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을 했던 이유는 그 이전 몽골, 서하 등의 국가가 펼치고자 했던 초원과 농경국가의 완벽한 조화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지혜는 21세기인 지금에도 더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한글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발명품인 동시에 초원제국 글자 전통을 잇는 마지막 표음문자라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유산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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